brunch

매거진 교육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희 Jul 16. 2019

노예는 노예를, 시민은 시민을 기른다

(2018년 1월)  교사에게 정치기본권을 허하라 

꽤 오래 전에 정치성향 테스트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자유주의자, 경제적 차원에서 좌파 성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그때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몰랐다. 앞으로의 교직생활에서 이런 성향이 내 삶을 어떤 식으로 구성할지도 알지 못했다. 


내 성향의 사람들은 권위주의와 수직적 질서에 대단히 민감하다. 장유유서, 윗물 아랫물, 관습의 이름으로 물 흐르듯 넘어가는 것들에서 불평등의 냄새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격식과 지나친 예의범절을 피곤해 한다.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해 학생들에게 경어를 쓴다. 사생활 보호와 각종 인권침해에 민감하다. 다양한 이슈 중에서도 빈곤과 교육 불평등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런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 교직에 있으면 학생들에게 한없이 온화하고, 자상하기만 할 것 같지만 내 경우를 볼 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나처럼 수평사회를 지향하는 이들은 학생들 사이의 수직관계에도 몹시 예민하다. 유무형의 따돌림, 은근한 무시, 배척, 언어적, 관계적 폭력에 제3의 눈이라도 달린 듯 현란한 육감을 발휘한다. 그래서 특정 사안에 있어 학교 내 어떤 교사보다 엄격하다. 교실에서 수직적 관계는 자주 특정 학생들의 파벌 형성으로 시작된다. 나는 교사로서의 권력을 선용해 교실 내 파벌과 수직 질서를 산산이 무너뜨리려 한다. 내 정치적 성향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렇게 구현된다.  


교육과 교사의 정치적 중립 


교사는 교사이기 이전 한 명의 시민이다. 나름의 정치적 성향과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교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매우 다양하며  위에서 보다시피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암묵적이고, 역동적으로 발현된다. 교사에게 정치 성향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마치 ‘교사는 음악 취향이 없어야 한다’는 말처럼 비상식적일 뿐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요구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낡은 담론은 여전히 한국 교육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국내 최대 교원단체인 한국교총은 전교조가 투쟁을 할 때마다 근엄하게 외쳐왔다.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라, 교실로 돌아가라!’ 


                                                   2018년, 한국교총의 내로남불


얼핏 전교조처럼 보이는 위 사진은 사실 교총이다. 최근 정부가 ‘내부형 교장공모제 확대 방침’을 발표하자 ‘나쁜 정책! 무자격 교장공모 확대 폐지!’를 외치며 조끼를 입고,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른 채 거리로 뛰쳐나왔다. 정권이 바뀌면 투쟁하는 교육계 세력이 달라지는 것만 보더라도 교육의 정치 중립성은 위선이자 허구다. 중립의 의무를 부르 짖으며 정치 혐오와 기피를 조장하는 이들이야 말로 오히려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다.  


교사들의 정치기본권 침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그늘에 갇혀 교사들의 정치기본권 역시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악의적 법률 개정, 헌법 조항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헌법 제31조 4항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헌법 제27조 2항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신분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이승만 정권은 갖은 명목을 동원해 일요일에도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 시켰다. 당시 경쟁자였던 장면 민주당 부통령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학교와 교사는 부당한 권력의 앞잡이 노릇에 내몰렸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헌법 제27조 제2항이 신설된다. ‘보장된다’는 말에서 보다시피, 이는 이승만 정권과 같은 독재세력이 교사와 공무원에게 행한 패악을 헌법 차원에서 막고자 한 시도였다. 다시 말해,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애초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강제 등교에 반발에 시위에 참여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

출처 -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그러나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교사와 공무원의 ‘권리’에 가깝던 규정을 ‘금지'조항으로 바꿨다. 법률개정으로 공무원의 모든 정치 활동을 불법화했다. 직무상의 의무를 ‘신분상의 의무’로 해석 적용해 학교 안팎에서 교사들의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 정은균, 살림터) 


교사들의 정치기본권 침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교사는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 정당이 진행하는 국민경선에도 참여할 수 없다. 정치후원금을 낼 수 없고, 공직선거에도 출마할 수 없다. 국회의원, 자치단체 의원 선거 뿐 아니라 교육감 선거에도 출마하지 못한다(반면 교수들은 교수직을 유지하며 교육감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 심지어 교사들은 페이스북에서 특정 정치적 입장에 ‘좋아요’ 만 눌러도 징계의 위협에 노출된다. 국제 기준에서 볼 때 황당한 실정이다. OECD 회원국 중 어느 국가도 교사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이토록 제한하지 않는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인권이사회도 권고안과 특별보고서를 통해 한국 교사들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국가인권위원회 ‘2007~2011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안’ / 2011년 유엔인권이사회가 제출한 ‘한국 표현의 자유 보고서 ; Mission to the Republic of Korea’) 


최근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 ‘교사 정치 기본권 찾기 연대’가 발족되었다. 이들은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는 하위 법령들(국가공무원법 제65조, 공직선거법 제60조 등)에 대한 위헌 청구를 위해 1천명 이상의 교사 청구인을 모집했다. 이 헌법소원의 취지는 교사의 정치교육에 관한 주장이 아닌 교사 개개의 ‘시민으로서의 권리 회복’에 관한 내용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교사의 정치기본권에 관해 제기되는 몇 가지 의문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교사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학생에게 주입하지 않을까”라는 염려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보자. 교사들은 이미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교회나 절에 가고, 헌금을 낼 권리도 있다. 하지만 교사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학생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건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는 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학생에게 주입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휴일에 교회에 가는 권리가 보장되는 것처럼,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교사가 특정 종교를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행위를 금지하듯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주입하려 할 경우에도 제도적 방안으로 이를 제지하면 된다.  


나아가, 사실 학교의 민주시민교육과 정치교육의 방향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적으로 어느 정도 이정표가 제시되어 있다.



*보이텔스바흐 협약: 1976년 서독의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교육자, 정치가, 연구자 등이 독일의 소도시 보이텔스바흐에 모여 정립한 교육지침이다. 좌우 진영 관계자들은 치열한 토론 끝에 이념과 정권에 치우치지 않는 교육을 목표로 하는 교육지침을 마련하고, 정치교육의 원칙에 대해 합의했다. 본래 학교 정치교육의 지침으로 만들어졌으나 모든 공교육 영역으로 확대 적용되어 독일 정치교육의 헌법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출처: 시사상식사전] 


독일은 1976년 보이텔스바흐 협약으로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현재는 이를 수정 보완하는 논의까지 진행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은 독일에 비해 40년 이상 뒤쳐졌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노예는 노예를, 시민은 시민을 기른다 


현재는 과거의 선택과 행동의 결과다. 어떤 일도 뿌리와 연유 없이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들의 연이은 소환에서 반복되는 대형 참사에 이르기까지 현재 한국 사회가 겪는 비극의 뿌리는 많은 부분 박정희 시대의 독재와 정경유착, 왜곡된 제도와 일상의 비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육정책은 늘 정권에 따라 요동친다. 국가교육과정의 명시적 목표가 ‘민주시민교육’임에도 정작 학교 안에서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현장의 중심에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없다. 기괴한 교사 승진제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교사들, 이에 형식적일 수밖에 없는 ‘민주시민교육’의 현주소도 박정희 유신독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제는 잘라내야 한다. 

노예는 노예를 기르고, 시민은 시민을 기른다.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박탈 당한 교사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을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교사들에게 정치기본권을 허하라.    



* 이 글은 딴지일보에 실렸습니다. (2018-01-31)


<참고>

1.교사정치기본권 찾기 연대 결의문

http://cafe.naver.com/teacherscivil/10

2. 민주시민교육, 보이텔스바흐 교육으로 한 걸음 더

http://nowseouledu.com/2017/03/05.php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