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개척시대 개척민의 삶 (3)
인도 오른편 지상낙원 지척에 캘리포니아라는 한 섬이 있음을 알라. 그 곳의 사람들은 남자란 없고 오로지 검은 빛의 여성들로만 이루어져 있느니라. 그들은 아름답고도 건장한 체구를 가졌으며, 용맹하고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섬은 천혜의 요새라. 험준한 절벽과 바위 해안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의 무기는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맹수들의 갑옷 또한 금으로 되어 있는 바, 그 섬에는 금 이외에 다른 금속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
- 에스플란디안의 모험(1510)
서부개척이라 하면 으레, 고독한 남성 몇몇이 뿔뿔이 흩어져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떠오르곤 하지만, 북미 대평원(Great Plains)에서 남자 혼자서 농장이나 목장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가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개척민들 사이의 상식이었다.
초기 개척지에서 농부의 아내들은 뙤약볕에 나가 일함으로써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특히 줄곧 동부의 따사로운 기후에서 살던 여성들 같은 경우엔, 나무 한 그루 없고, 거센 돌풍이 윙윙거리며, 끝없이 펼쳐져있는 태양에 그슬린듯한 대지를 보고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서부의 여성들은 따사로운 동부의 추억을 서부로 이식하곤 했다. 정원을 가꿨고, 나무를 심었으며, 보기 흉한 풍경을 조금씩 아기자기하게 바꾸어놓았다. 대부분의 열악한 개척지에서 아내들은 남편이 파종하고 수확할 때 곁에서 도움을 주었고, 양털이나 아마로 실을 잣거나 옷을 수선하기도 했다. 개척이 진행되고, 점차 정착생활이 안정을 찾자, 서부 개척지 뿐 아니라 인류 역사 속 모든 농경사회에서 그러한 현상이 벌어졌듯, 아내들은 집안으로 들어가고, 남편들은 바깥일에 나갔다.
서부 정착지의 생활은 공동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헛간 세우기(barn raising)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특히 핵심적인 집단 행동이었다. 헛간은 곡물이나 건초를 비축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건축물이었고, 가족 하나가 스스로 조립하는 데에는 매우 큰 힘이 들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전에 서둘러 건설하지 않으면, 기껏 얻은 한 해 소출이 전부 망실될 수도 있었다.
전문 목수나 다른 용역들을 고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오지의 서부에서, 일가족의 개인 헛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돌아가며 일손을 돕는 공동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남성들은 이웃에게 노동력을 비롯하여 각종 연장이나 들짐승들을 제공했고, 여성들은 노동자들이 먹을 새참을 준비했다. 헛간이 완성되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축하 잔치가 벌어졌다.
공동체가 충분히 거대하다면, 더 큰 건물도 힘을 모아 짓곤 했다.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목재뿐 아니라 석재도 필요했던 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서부의 개척지는 결코 텅 비어있는 황무지가 아니었다. 그 곳에는 먼저 살던 선주민들, 서로 여러 형태의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던 일군의 '인디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백인 정착민들은 주요한 무역 파트너인 동시에 침입자였다. 어떤 인디언들은 우호적이었고, 다른 인디언들은 그렇지 않았다.
개척자들은 따라서 스스로를 방비해야했다. 밭을 경작할 때에는 늘상 무장한 남성 개척민들이 주위의 숲을 순찰해야했고, 대부분의 주거용 건물에는 총안이 뚫려있어서 언제라도 요새로 쓰일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인디언들과의 충돌은 종종 신체절단과 납치, 그리고 끔찍한 고문을 수반했기에, 개척민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19세기 초 버몬트 주의 어느 묘비에는, 한 부부가 그들보다 먼저 떠난 열세 명의 자녀들을 추모하는 글귀가 적혀있다. 꼭 개척지가 아니더라도 열악했던 당시의 의료환경을 감안하면, 하나의 자식도 잃지 않은 부부는 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설령 모든 아이가 살아남았더라도 구루병이나 결핵, 그리고 각종 감염으로 인한 청력 및 시력 상실이나 심장병 등의 평생 후유증이 남을만한 상흔을 안고가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동부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0퍼센트 가량이 5세 이전에 사망했는데, 텍사스를 비롯한 서부지역에서는 벌써 첫 돌을 맞기 전에 20퍼센트의 아이가 세상을 떠났으며, 4세가 되기 전에는 다시, 살아남은 아이들의 25퍼센트 가량이 추가로 사망했다. 개척지 묘지 자리의 절반 가량은 5세 이전의 영유아가 차지했다.
5세 이후까지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인생은 쉽지 않았다. 중세시대의 어린아이들이 늑대나 식인종한테 잡아먹힐까 전전긍긍했다면, 개척민들의 아이들은 늘상 어른들로부터 나쁜 인디언들을 주의하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헨젤과 그레텔 동화처럼, 어린아이들은 늘상 납치에 대비하여 어른들이 그 흔적을 쉽게 추적할 수 있도록 눈에 띄는 색의 천 조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어린아이들은 우호적인 부족 출신의 인디언들을 훨씬 더 자주 마주쳤고, 인디언 아이들과 개척민 아이들은 자주 섞여 어울려 놀았다.
서부의 어린이들은 강하게 자랐다. 서부의 어떤 어린이들은 동부의 빡빡한 도시생활에 비해서 훨씬 더 자율적인 삶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 자유로운 생활의 이면에는 동부의 도시생활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과 고통이 도사리고 있었다. 많은 서부의 아이들이 낮은 인구밀도로 인한 고독, 굶주림, 강제 노동, 그리고 가정 폭력과 학대에 노출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어린아이들은 할 수 있는 한, 그러니까 네다섯 살이 넘자마자 곧바로 어른들을 도와야했다. 시냇가에서 물을 긷고, 불이 꺼지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멀리서 누가(보통은 인디언이나 침입자) 오지나 않는지 감시하거나, 가축이 농작물을 뜯어먹지 않게 막고, 우유를 짜고, 짜낸 우유로 버터 만드는 일 등을 척척 해냈다.
서부에서 죽음은 늘상 가까이 있었다. 개척지의 농부들은 말라리아같은 전염병에 걸리면 픽픽 쓰러졌고, 마실 수 있는 물은 오염된 것이 다반사여서 각종 수인성 질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목숨을 위협할만한 끔찍한 외상도 언제고 발생할 수 있었다. 마차에 치이거나 수레가 전복되는 교통 사고, 개천에 빠지는 익사 사고, 짐승의 발길질에 채이거나 뱀에게 물리는 사고, 그리고 창고에서 떨어지는 무언가에 맞거나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등의 사고들이 시시각각 짧고 고통스러운 개척민의 삶을 위협했다. 일례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또한 아홉 살 때 말발굽에 머리를 채여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르렀던 전적이 있으며 말라리아에 걸린 적이 있다.
개척민들은 서부에 올 때 말라리아에 감염된 모기들을 함께 데리고 왔다. 그리고 서부 곳곳의 못과 대초원의 고인물에서 그 모기들의 유충이 번성했다. 개척민들이 난생 처음 맞닥뜨린 서부의 세균들도 끔찍한 설사병을 초래했다. 개척민들의 도구가 열악했기에 우물은 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개척민들의 대변으로 오염되었으며, 만성적인 영양결핍과 말라리아로 인한 빈혈 등에 취약해진 개척민들로 하여금 이질과 장티푸스로 생을 끝마치도록 일조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크게 베이거나 총탄에 맞는 등의 사고가 벌어지면, 사실상 서부에서 그 사람은 곧장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된 의사를 보기 힘든 서부에서 약간의 의학적 지식이 있는 동료라도 곁에 있는 그런 지극히 운이 좋은 경우에야, 감염으로 썩어들어가는 환부를 잘라내 영구적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술에는 보통 위스키, 모르핀, 그리고 수레바퀴에서 녹여낸 뜨거운 역청 등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