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어디서 오는가? 라는 질문에 신은 욥이라는 인물에게 답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리워야단이 너와 약속을 맺기라도 하여, 영원히 네 종이 되겠다고 약속이라도 할 것 같으냐?”
라는 물음은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인간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악을 통제할 수 있냐고 묻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욥은 답하지 못한다. 야훼 신도 왜 그것이 불가능한지, 그리고 악이 존재하는 이유와 인간에게 발생하는 불행의 원인을 알려주지 않는다.
장애는 악인가? 라는 질문을 해본다. 질문이 너무한가? 하지만 해볼 법한 질문이지 않는가?
서울에서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가 있었고, 지금도 대중버스를 이용하는 휠체어 사용자는 보기가 어렵다. 사회는 악을 배제한다. 감옥이 그 역할을 한다. 많은 교통약자는 교통 편의에 있어서 배제됐다. 이러한 대우를 받는 것은 그들을 사회악으로 보기 때문은 아닌가? 나는 이러한 이유 말고는 딱히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장애는 뇌성마비 경증이다. 겉으로 볼 때 티가 잘 나지 않는다. 운이 좋은 경우이다.
20대 시절 장애인으로서 한 모 카페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겉으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하게 비장애인보다는 걷는 속도가 느리고 행동에 버벅댐이 있다. 이 또한 관찰력이 좋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상사는 삼 개월이 지나도 빠릿빠릿하지 않은 내가 답답했나 보다. 그래서 상사는 나에게 말했다.
“00 씨, 왜 아직도 느린 거예요?”라고.
나는 역시나 늘 수만 번 해오던 답변으로 질문에 답했다.
“00 님, 제가 뇌성마비 장애가 있어서요.”
그래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분이 지금까지 경험한 장애인의 모습은 휠체어를 타고 지적 발달 장애 등으로 의사소통이 불가한 사람들을 만나 왔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해 본다. 또 그 상사의 반응이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의 경우 보편적으로 의료 환경 내에서도 만나기 어려울 만큼 기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아왔기에 미디어를 통해 보던 장애인들의 모습과 나 이외에 장애인 직원으로 채용돼 만난 장애인 직원들과는 내 모습이 사뭇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내 장애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상사의 태도는 살면서 108번뇌는 경험한 장면이기에 108번뇌의 경험을 담은 설명을 해줬었다.
“00 님, 제 장애가 이해하기 어려우시다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00 님도 점점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실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무릎이 아파지고 계단을 내려가기 어려워질 거예요. 또 어느 날 갑자기 점점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제가 00 님보다 먼저 나이 듦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우실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상사의 눈에서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었다. 아마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미래였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대학원 면접을 보든 직장 면접을 보든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서류에 장애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음에도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애가 아니기 때문에 정말 순수한 표정으로 면접관들은 장애의 여부를 다시 묻고는 한다. 이 또한 이미 108번뇌는 들은 듯한 말인지라 태연하게 답한다.
서류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수술이 잘 된 경우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면접자들의 태도는 "당신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네요?"라는 나름의 긍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물어본 것일 수 있으나, 자세히 보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인 장애인의 모습이 있고 그 틀로 "장애인은 당연히 이러한 모습이어야 한다"라는 편견의 시선으로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입사원이 낸 좋은 아이디어를 듣고서 "이 아이디어가 네가 낸 거라고?" 감탄하며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감탄은 '잘해서 감탄한 거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대사 이면에는 "신입사원의 능력은 당연히 경험이 부족하니까 낮을 거야"라는 편견에서 오는 무시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상사에게 이런 대사를 들은 신입사원은 은근히 무시당한 듯한 기분을 뒤늦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으로 상대의 감정을 공격하는 미세 공격이라고 한다.
몸의 건강함과 양질의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음은 좋은 운을 만난 것이고 신이 내린 복이 맞다.
그렇다면 앞에 던진 질문처럼 장애는 불운이고 신의 저주일까?
글의 시작을 욥과 신의 대화로 했으니, 글의 맺음 또한 시작과 같게 하겠다.
성서에서 욥에게 악이 생기는 이유와 어째서 욥이 불행을 경험하는지 신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욥을 보고 있었고 욥과 대화한다. 나와 같은 약자의 삶에 필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내 옆에 있는 약한 존재와 끊임없이 함께하고 대화하는 태도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몸의 고통, 마음의 고통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기 삶의 모험을 지속해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동력이 되게 한다.
나는 내 옆의 고통 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그들과 함께했었나? 라며 나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질문해 본다.
당신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