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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May 24. 2024

준비된 대기인력 1, 2, 3...

하늘나라 상급 시스템

남편이 목사안수 받을 때 함께 나가서 기도받고 했지만 길이 나의 사명이라는 사명감은 솔직히 거의 없었다. 남편의 길에 그냥 부부니까 같이 서 있는다 정도였달까.

누구여도 그렇지 않을까? 배우자의 일이 곧 나의 일이요 하며 당사자 본인만큼의 무게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 서로 가사분담을 안 하네, 회식은 왜 이리 잦냐 하며 싸우는 게 아닐까? 이건 의 일, 저건 의 일 하고 구분하게 되는 것이 보편적 인간의 심리이니 말이다.


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에, 진짜 아주아주 어릴 때부터 가끔 교회에서 "나는 사모가 되는 게 꿈이야" 이런 소릴 하는 소녀들을 보면 정신 나갔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니 누가 배우자의 직업을 자기 꿈으로 정한담? 너 자신은 아무 꿈이 없니?


나는 나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요



그런데 인생은 앞일을 알 수가 없는 초콜릿 상자와 같다고 했던가. 공대를 다니는 내가 어쩌그만 신학생 오빠를 만났고, 이 오빠를 엄청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그냥 아는 사이일 때도 오빠랑 있으면 시간이 오데만데로 다 날아가곤 했었는데, 연애를 하니 이건 뭐 날마다 타임워프(시간여행)였다. 그러다 문득 오빠랑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촉이 오자마자! 재빨리 고백했다. 우리는 안될 것 같다고. 아무래도 다른 분을 만나시는  나을 것 같다고. 나야 결혼 생각이 딱히 없으니 시간 좀 버려도 오빠랑 연애해 봐서 좋았지만, 오빠는 괜히 저한테 시간 버리지 말고 빨리 갈 길 가시라고 말이다.

나의 진정성 있는 거절에 오빠는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자기가 그런 아내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하는 아내상을 얘기해 주었는데, 오빠의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 나네? 내가 생각하는 남편의 조건에도 이 오빠가 딱일 것 같은데? 아 그럼 해야지, 결혼.


그래서 발을 디뎠는데, 우리 오빠가 원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아도 담임목사님과 교회는 내가 결혼 전 걱정했던 그런 점들을 내게서 꺼내가고 싶어 했고 요구했다. 나의 하늘인 우리 오빠가 교회에서는 제일 낮은 서열이었다. 마음은 애틋했지만 마음일 뿐이었다.

고령의 사람에게 온다는 대상포진이 아직 20대인 내게 오던 날은, 추운 날씨에 젖먹이 아이를 안고 하루 종일 심방을 돌아치고 금요저녁 철야예배까지 갔다 온 날이었다. 아기집이 자리를 잡느라고 온몸이 나른하고 아랫배가 콕콕 쑤시고 아픈데도 연이어지는 심방에 미소를 팔아야 했다. 죄송하지만 심방 대상자가 누구인지 아무 관심도 가지 않았다.


성경학교에 교사가 모자라면 대타로 달려 나가고, 노방전도에 인원이 부족하면 임신하여 부른 배를 부여잡고 차출되었다. 예배 반주자가 펑크가 나면 예배 시작 직전에 허겁지겁 들어가 어떻게든 반주를 해내야 했다. 못 나오면 못 나온다고 미리 말을 해주면 입이 못쓰게 되니?

그런 불성실한 애는 잘라야 되는데, 교회에서는 자르질 못한다는 것도 큰 문제다. 제 기분 따라 들락날락, 그 사이 공백은 부목 사모가 다 때우는 시스템. 내 시간은 전혀 눈곱만큼도 배려를 받지 못하는 것이 분통 터졌다.

나는 반주를 해도 피아노 전공자가 아니므로 성가대 반주자처럼 페이는 받지 못하고, 부목 사모니까 아무 때나 부르면 나와서 반주하는 건 또 당연했다. 모든 일이 다 그랬다. 남편이 스테인리스 냄비 세트라면 나는 그거 사면 겉에 덤으로 붙여주는 행사용 사은품 행주나 고무장갑 같았다.


목사의 아내로 사는 것, 내 진짜 이름을 잃고 'O목사님 사모님'으로 불리는 것_ 겉보기에만 그럴듯하지 실제는 스페어 부품 1, 2, 3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게나 귀한 우리들은 아이를 낳고 100일도 되지 않았는데 한겨울 바람이 쌩쌩 부는 교회 마당에 나와 이른 아침부터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무겁게 젖은 배추를 건지고 또 건져야 했다. 장갑을 속에 두 개씩 껴도 손이 시렸다. 김장 과정에서 한 거라곤 종물텀벙만 쳤는데 김치 만드는 거 배우니까 좋지? 요즘 사람들이 어디서 이런 걸 배우겠어. 라는 생색을 들었다. 말을 하면 누가 들을까 봐 아기 낳은 우리들끼리 서로 바라보며 눈빛으로 울었던 그해의 김장을 잊을 수가 없다.


친정엄마의 항암날에 외동인 내가 모시고 가야 하는데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드리기는커녕 유방암 수술하고 두 달도 되지 않은 엄마 아픈 가슴 위에 내 아이를 안겨 겨드랑이 림프절을 잘라 아픈 팔에 분유와 기저귀 가방을 들려 시외버스를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야 했다. (봐줄 사람이 정말 없어서 그런 건데) 사모가 아이를 들쳐 업고 김장에 나오면 권사님들이 일 시키기가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너른 교회 마당에 어질러진 이놈의 배춧잎이 다 정리가 되어야 내가 시골에서 서울아산병원으로 출발할 수 있기에 스팔트 마당에 착 달라붙어 쓸어지지 않는 배춧잎들을 맨손으로 미친 여자처럼 주웠다. 그리고 200여 킬로미터를 혼자 정신없이 운전해서 올라가 항암을 마친 엄마를 태우고 다시 시골 우리 집으로 모시고 내려왔다. 사람이 너무 에너지를 쓰고 힘 들고 있을 때는 아픈 줄도 힘이 든 줄도 모른다. 그 교회를 떠나 드디어 우아하게 폼 나게 서서 김치 속을 조금 비비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진짜로 수육 먹고 가면 되는 교회를 가니 그제서야 김장 때만 다가오면 마음이 그렇게 시리고 우울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교회는 분기별로 대청소 날이 있다. 전 성도들이 구역을 배정하여 온 교회를 깨끗이 쓸고 닦는 날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모실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성역의 공간이었다. 거기는 그냥 부목사 사모들이 매주 수요예배가 끝나면 단히 청소를 하고 집에 가라고 하셔서 리들은 등에 아기를 업고 커튼 털고 화장실에 락스 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방석을 주우며 함께 먼지를 마셨다.


아이줄줄이 데리고 철야예배니 부흥회 집회니 예배 출석률 백 프로 찍는 것만도 힘들어 죽겠는데, 때로 사정이 생겨 봉사를 거절하면 하늘에서 쌓일 상급이 없어진다며 화를 내셨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 상급인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하세요. 나렇게 챙겨주시는 고마우신 분들 많아 눈물이 난다.

계속 바뀔 사람의 손을 빌지 않고선 돌아가지 않는 시스템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내 마음 그릇의 얕디 얕은 바닥을 본다.

나는 사모가 되기 전부터 이미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학생 때, 청년 때, 열심히 했고 그러다 문득 슬럼프가 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소그룹에서 지친 마음을 나누었을 때, 우리들 다 힘들어져서 잠수를 타도 다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너는 열방도 갔다 왔잖아 라는 말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 나라고 뭐 특별한 슈퍼맨이 아닌데 말이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옳다구나 하며 더 큰 짐을 지워주고 그것을 감당해 내지 못하면 책망하는 곳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이미 교회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선교단체도 질려버렸고 교회도 지겨워,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를 집에서만 찾아서 듣고 실제 교회생활은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

내가 사모로 살게 된 것은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30년 후쯤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그것도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 하루 이번 한 주간을 열심히 살아 낼 뿐이다.


나도 청년 때는 내 비전이 있었다. 마흔이 된 지금, 나는 내 부르심을 모른다.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나는 모른다. 짐작컨대 모름지기 비전이란 살면서 점점 더 구체적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어찌 된 게 살수록 오히려 더 모르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도 같다.

다만 브런치 안에서 이렇게 작가가 되어 글을 쓰면서 나도 언젠가는 진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어 보곤 한다.





#부르심

#꿈꾸는 아내




#오늘 행복하게 살자

#부족해도 괜찮아







괜찮아, 툭툭 털고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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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sidebyddun/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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