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7 개인 SNS에 올린 글
1.
최근 시카고에 눈이 내렸다. 오늘은 다시금 날이 따뜻해졌다만, 보레아스(Borea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북풍(北風)의 신)의 총애를 받는 이곳은 내년 4월까지는 언제든 눈이 내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오만을 경고하는 어느 라틴어 문장을 비틀어 인용하자면, Memento ningere(눈이 옴을 기억하라).
2.
첫눈은 한 해의 노을과 같다. 그것은 아름답고, 고요하나, 이내 사라진다. 첫눈을 보는 감정을 가장 적확하게 서술하는 표현은 무엇일까, 멜랑콜리(Melancholy)가 그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가벼운 우울이고 차분함이다. 그것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자유낙하하는 얼음 결정만큼이나 무기력하다. 순결하게 쌓이지만 지저분하게 녹아내린다. 사람들에게 짓밟혀 검은 진창이 된 첫눈은 참으로 멜랑콜리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멜랑콜리의 어원이 검은 흑담즙을 뜻하는 말이므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울한 기질이 흑담즙의 과도한 분비에 기반한다고 믿었다.)
3.
항상 눈이 내릴 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껏 쓰인 적 없고, 앞으로도 쓰일 일 없는 어느 표현에 대한 연민이다.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는 일물일어설(Le mot juste)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작가의 생각과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언어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뜻으로, 훌륭한 글을 직조하기 위해선 단어를 섬세하게 선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물일어설을 들은 수학자들은 아마 이와 같은 질문을 떠올릴 것이다. 각 상황을 묘사하는 단 하나의 적절한 표현이 존재한다면, 각 표현이 묘사하는 단 하나의 적절한 상황, 이른바 la situation juste가 존재할까.
나는 감히 그런 위대하고 거룩한 세상과 언어의 일대일 대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호모 로퀜스들의 인위적이고 불완전한 법칙으로 만들어진 일부 언어적 사생아에게 예비된 세상의 짝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비단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사전의 한 페이지에 갇혀, 이처럼 외치고 있진 않을까.
'제가 청했습니까, 창조주여, 잉크로 나를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암흑에서 끌어올려 달라고?'
한국어로 '눈이 내리다'에서 주어는 '눈'이고 동사는 '내리다'이다. 반면 영어로 it snows에서 동사는 'snows'는 주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비인칭 동사(impersonal verb)이며, 일반적으로 3인칭 단수의 형태로 쓰인다. 이때 주어 it은 dummy pronoun이라고 한다. 라틴어로 '눈이 내리다'는 ningit인데, 이 역시 ningere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다. 흥미로운 점은 라틴어 문법을 이용해 ningere의 주어를 '나' 혹은 '너'로 설정할 수 있다. 예컨대 ningere에 1인칭 주어형 어미 -o를 붙여 ningo, 2인칭 주어형 어미 -is를 붙여 ningis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들 각각은 '나는 눈이 내리다' 혹은 '너는 눈이 내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 쓰일 일이 전혀 없다. 라틴어의 후예 중 하나인 스페인어 역시 이와 같은 단어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스페인어로 눈이 내리다 nevar의 1인칭 어미변환은 nievo이다.) 아쉽게도 필자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제대로 공부하진 못했지만 이와 같은 단어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4.
나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것들은 결국 이야기가 된다고 믿는다.
모든 이야기는 회자되며, 그들의 생명력을 시험받는다. 사랑받지 못한 이야기들은 이내 사그라져 망각되나, 사랑받는 이야기들은 활자로 기록되어 더 오래, 더 길게 살아남는다. 그래서일까, ningo와 같이 쓰일 일 없는 단어에 대한 나의 연민은, 기억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연민만큼이나 각별하다. 아마 내가 살면서 ningo라는 말을 할 일은 없겠지만, 이 자리를 통해 나는 그 언어적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여기 너를 기억하는 내가 있다고. 나 또한 기억되기를 소망하며, 잊힌 것들을 찾아 간직하는 처량한 이가 존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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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필로마테스입니다. 최근에 글이 뜸했던지라, 죄송한 마음으로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작년 말 지도교수와 상의 끝에 올해 여름, 6월에 졸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덕분에 작년 가을서부터 취업을 알아보랴, 박사 논문 쓰랴 많이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4월 중순쯤에 디펜스를 치를 예정이라, 올 늦봄부터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써 내려갈 시간이 어느 정도 생기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아무쪼록 6년간 지난했던 박사 과정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미흡한 데다가 자주 방문하지 못했던 브런치임에도 간간히 와주셔서 글에 라이킷을 눌러주시고 구독을 눌러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제 디펜스를 잘 마무리한 뒤 더 다양한 이야기들로 여러분들께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