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움이 아닌 죄책감을 남기는 말

by Siena

배려와 억울함 사이



살다 보면 말이라는 게, 마음속 그대로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심리적인 경계가 취약한 사람이다.
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의 피곤함, 귀찮음, 감정의 결을 먼저 눈치챈다.
그래서 나는 "거절"하는 게 무섭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거절"을 못하는 나는

"거절 당하는 것"도 쉽지 않다.

마치 거절을 당하는 경험은

거절을 못하는 내가 더 초라하게 보인다.


“나는 이렇게나 배려하고 사는데, 왜 나를 배려해주지 않지?”




하루는 남편에게 결혼식장에 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대중교통으로는 1시간 30분, 차로는 30분 거리였다.


남편은 살짝 난처한 얼굴을 지었다.
주말에 쉬고 싶었겠지.
조금 귀찮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순간, 서운함이 올라왔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귀찮다고 하니까 좀 서운해.
대중교통 타면 1시간 넘게 걸리거든.
귀찮아도 좀 태워다주면 고맙겠어.”


그 말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내 감정도 전달되고, 내 부탁도 정당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됐어. 생각해보니 너무 멀기도 하고,
여보도 주말에 쉬어야 하는데 그냥 축의금만 하지 뭐.”


“친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 그냥 데려다줄게.”


“아니야. 여보가 피곤한 것 같아서

오히려 내 마음이 불편해. 그냥 안 가는 게 좋겠어.”


그리고는 하루 종일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는 서운했고,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남편은 그런 나의 눈치를 하루 종일 살펴야 했다.




나는 도대체 뭘 원했던 걸까?



그 상황에서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단순히 차를 타고 데려다주는 행위가 아니었다.
내 부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주길 바랐고,
내 상황을 조금 더 배려해주길 바랐다.


나는 대부분 상대의 부탁을 나의 감정보다 우선한다.
문제는, 그것이 상대가 요구하거나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반대의 상황에서도

상대가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게 거절당했다고 느끼면,
상대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불러일으켜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순간, 이 관계에서 나만 배려하는 것 같아

초라해 보이는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일종의 무기 같은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할까?”


“왜 내 마음을 설명하는 대신,

상대를 미안하게 만들려고 하지?”


어릴 적 엄마는 내가 무언가 잘못했을 때,
감정을 소리치거나 분출하는 대신
자기 허벅지를 때리며

스스로를 벌주는 방식으로 나를 가르쳤다.


엄마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고,

화를 폭발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아픔을 보여줌으로써 내 죄책감을 자극했다.

사실 그 방식은 효과적이었다.


나는 빨리 뉘우쳤고, 바른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상대를 미안하게 만드는 것.
그게 사람을 움직이는 법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상대를 미안하게 만드는 "죄책감"이라는 무기



이러한 건강하지 못한 의사소통을 심리학에서는

수동-공격성(passive-aggressive) 의사소통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양보와 희생을 가장하지만,

속으로는 불만과 서운함이 깔려 있는 방식.

직접적으로 “서운하다, 힘들다”라고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상대가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도록 메시지를 던진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고마움”보다 “죄책감”을 먼저 느끼게 된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나의 희생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희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억울함이 쌓이고,
그 억울함은 결국 “상대를 미안하게 만드는 무기”로 바뀐다.


수동-공격성 의사소통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상대방을 미안하게 만들어 원하는 걸 얻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게 긍정적이고 동기부여의 에너지를 주기도 한다.

마치 내가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바른생활,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진거와 같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관계의 질을 해친다.
상대는 죄책감을 느끼며 부담을 가지게 되고,
결국 회피하거나 거리를 두려 한다.


또한 나는 죄책감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싸웠는데,
상대가 이 무기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억울함과 서운함이 반복되고,
더 큰 죄책감의 무기를 꺼내 들게 된다.




솔직함을 배우는 연습



이러한 태도는

“거절당할까 두려운 마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같은 아주 흔한 인간적인 심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방식은 결국 나와 상대방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의사소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희생”을 무기로 쓰는 대신

내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적정한 “거절”을 배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내가 가진 보상심리,
거절당했을 때 느끼는 억울함을 먼저 줄여가는 과정.
그것이 이 악순환을 끊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렵다.
하지만 조금씩 연습하려 한다.

미안하게 만들기보다, 내 마음을 설명하는 쪽을 택하기.
희생으로 상대를 붙잡는 대신,
솔직함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건강한 방법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나를 덜 초라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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