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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Aug 29. 2021

핌리코에서 망원까지 00

초보 망원러가 전하는 일 년 하고 다섯 달, 런던에서의 시간들


런던에서의 삶은 1년 5개월, 지금까지의 내 인생 30년을 통틀어서 보면 고작 5%에 지나지 않는 짤막한 기간이었다. 그마저도 마지막 두 달은 팬더믹으로 집안에서만 지냈으니 온전하게 60일을 치기도 애매했다. 경험은 어릴수록 값지고도 짙게 온다고 하던데, 스물일곱 많지는 않지만 딱히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에 떠난 런던은 예상과 상상보다 더 큰 흔적을 내게 남겼다. 쏜살같이 흘러 이제는 부러 시간을 내어 기억의 끄나풀을 붙잡고 억지로 끌어오지 않으면 저만치 흐릿해진 시간들이 되었지만, 명상하듯 눈을 감고 초곤히 하나 둘을 세면 또 당장이라도 돌아가 어색함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때의 시간들. 그 기억들은 어느 날 불현듯이 나타나서는, 별생각 없던 나의 현재를 아쉬운 것이 되게 하거나 서글픈 것이 되게 했다.


망원이라는, 구와 신이 절묘하고도 평화롭게 그리고 때로는 적당히 바쁘게 공존하는 새로운 장소에 거처를 옮긴 지금, 매일매일 새로움과 그리움을 함께 느끼며 이의 감상들과 추억들을 글로 정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글쟁이가 되고 싶어도 에세이 같은 글을 쓸만한 플랫폼이 없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브런치 같은 좋은 판이 있어 원하는 만큼 감성쟁이가 될 수 있는데, 활용하지 않는다면 낭비 아닐까. 런던 생활 초기 몇 달 간은 블로그를 깨나 열심히 올렸었긴 하지만 지금 돌이켜 읽어 보면 내리 징징거림 뿐이었던 나의 런던 일기들은 블로그라는 플랫폼엔 부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술적 감각과 필력이 뒷받침되는 몽상가가 되고 싶다는 거나한 나의 꿈과는 상반되게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사진 실력, 몽상의 수준은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잘 꾸며지거나 혹은 유용해야만 그 내용이 돋보이는 블로그라는 곳에서 내 몇 자 일기들은 그저 감성 벌레의 어쭙잖은 하소연에 가까웠던 것이다.


망원의 하늘


서른의 계절을 짤막하게나마 쓰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지금의 감정들을 글로 남겨두는 것, 그런데 실컷 암울하거나 우울해도 괜찮은 곳에서 남길 것. 브런치라고 해서 글 몇 개 올린다고 큰 호응을 얻거나 독자가 갑자기 생겨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이야, 난데없는 부동산과 이사/배관 업체, 혹은 각종 영양제를 다루는 마켓 벤더가 '서이추는 받지 않습니다' 하는 나의 통보는 본 채도 하지 않은 채 냅다 서로이웃추가를 건네며 (하물며 오늘 슬펐다는 글에) '글 너무 잘 읽었어요! 제 블로그도 오세요!' 하는 일도 없겠지. 수준이 높지 않고 별 내용도 교훈도 없는 글이지만 나름 한 바닥을 채우기 위해 못해도 두어 시간, 길면 수일을 쏟아붓는 글들이 못내 한 문장도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채 숫자 늘리기에 이용당한다는 좌절감은 적어도 여기에서는 없을 거라는 체념 같은 기대가 나를 브런치로 이끌었다.


서른의 계절을 통해 간헐적인 생각의 정리를 하고 망원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면 런던에서의 순간들이 속속들이 생각나곤 한다. 매사에 걱정과 고민, 생각이 많은 나의 런던에서의 1년 5개월은 그야말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의 어느 외딴섬 같았다. 외딴섬이지만 그렇다고 육지에서 많이 멀지 않은... 뭐랄까, 밤섬 같은.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나올 수 있고 반대로 방문객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발적 혼자가 되는, 근데 그래 놓고서는 외로워하는 뭐 그런. 규모도 작아서 작은 태풍에도 쉽게 범람하고, 큰 피해는 없지만 곧잘 세미 쑥대밭이 되었다가 또 금방 돌아오는 척하는 그런. 그래서 나의 런던 생활은 언제나 외로워하면서도 못내 그걸 수긍하며 천천하고도 자잘하게 새로운 것을 채워가던 시간이었다.


런던, 집에 돌아가던 길목


그렇다 보니 내 런던 썰은 자연히 통상적이지도 않고, 응당 런던에 갔다면 했을 법한 활동들에 대한 경험도 없고 지루하다면 지루한 편에 속한다. 약간 왓챠의 느낌이랄까, '그걸 해봤다고?' 와 '그걸 안해봤다고?' 의 연속. "그래 이맘때쯤이면 하이드파크에서 피크닉 해야 하는데", "쇼디치에 있는 그 클럽 진짜 금요일마다 갔잖아" 와 비슷한 추억들이 많이 들리는데 애석하게도 하이드파크에서 피크닉을 한 적이 없고 런던 라이프를 통틀어 클럽은 딱 두 번 간 게 다다. 틴더로 만난 남자애가 알고 보니 아시안피버였다던지 우주인 맹신론자였다던지 말이 너무 잘 통하는 이탈리안 남자친구를 만나서 여태 연락을 하고 지낸다던지 뭐 그런 것도 없고. 대신에 생긴 지 3개월 정도밖에 안됐으면서 2차 면접을 4시간 동안 보며 회사의 창립 이념과 역사를 설명하겠다는 신뢰 불가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왓포드정션에 간 경험이 있고(하물며 1차를 붙었다), 세계 각지에서 이름을 대면 모두가 알아들을 큰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도 했다. 런던 한가운데에서 일본인과 2인 플랏을 공유하며 영어보다 일본어가 늘어왔고, 하필이면 아시아에서 시작된 팬더믹이 영국으로 번져와 서서히 패닉이 되어 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니 '영국워홀 정보'를 찾으러 들어오는 수많은 유랑자들에게 내 영국 일기가 도움이 되었을 리가 있나.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나는 지금부터 생각이 날 때마다 런던에서의 일들과 망원에서의 일들을 브런치에 남겨볼까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두 장소의 공통점을 찾기도 다른 점을 비교하기도 할 테고, 어떤 날은 지나치게 감성에 젖어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지극히 겉멋만 든 수사학 흉내일 수도, 어떤 날은 런던이든 서울이든 월세 내긴 힘들다는 부류의 극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과연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 글을 읽어 준다면 글에 나타난 나의 시간들을 궁금해해주는 것보다는, 마음속에 담아둔 어떤 장소에 대해서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었건 혹은 그저 상상으로만 그 땅을 밟았건의 유무와 무관하게 한 번씩 같이 그리워해 주신다면 좋을 것 같다. 조금 더 바라는 건 그러면서 별 것 아닌 나의 한 마디가 마음을 찌르르 떨리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아주 조금이라도 어떤 현재이든 의미를 찾게 하는 것, 그 정도의 소망을 담아 시작해 보겠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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