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도 초여름 그 어딘가의 일요일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토요일이 지나고... 봄이 오나, 봄이 가고 여름이 오나 싶은 생각이 가득가득 들 정도로 따스한 낮과 서늘한 아침저녁이 이어지다가 강풍이 불고 굵은 빗방울이 하루 종일 후두두둑 -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나도 날씨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토요일에는 일을 하고 들어와 간단히 식사를 하고 씻자마자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축 처지더니 이른 저녁부터 잠들어버렸다. 꿈도 안 꾸고! 중간에 몇 번 깨 시계를 본 기억은 있으나 시간이 기억나진 않고.. 일요일 오전이 한참 지나고 잠에서 깼다.
어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살은 반짝이고 강풍이던 바람은 살랑살랑. 정말 예쁜 초여름의 날씨가 창밖에 펼쳐졌다.
우리 집은 2층인데 밖으로 무성한 나무들이 한가득 보인다. 그래서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눈을 흐리게 뜨고 있으면 그냥 초록 액자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른 아침엔 나뭇잎에 반사된 빛들이 반짝 반짝이고 오후에는 햇빛이 한 번 걸러 잔잔하게 들어오는데 그 포근함이 참 좋다.
낮 12시가 갓 넘었을 때 소파에 앉아 베란다를 내다보다 문득.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내 취향의 잎사귀들... 오랜만에 나의 식물 친구들에게 관심을 좀 줬다. 미안 얘들아. 주인이 술 먹느라 바빴다..
겨울 동안 식물 등도 켜주고 했지만 자연광은 역시 따라갈 수가 없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큰 신엽을 내주고 있던 나의 프라이덱은 작년 가을까진 짙은 초록빛을 띠며 건강했지만 지금은 회복 중인 느낌이 강하다. 듬성듬성 연둣빛을 띄고.. 무엇보다 분갈이가 필요해 보인다. 그런 와중에도 자구에서 깨어난 작은 베이비 프라이덱이 신엽을 또 내고 있다. 참 기특해.
물 샤워를 꼼꼼하게 시켜주고 잎 한 장 한 장 세심히 보았다. 앞면, 뒷면에 별다른 특이점은 없는지. 아직 완전하게 파릇! 한 건 아니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어 보여 참으로 고마웠다.
이전에 데려왔던 블랙 벨벳 알로카시아는 생각보다 잘 커주고 있다. 탐스럽고 매끈한 벨벳 질감이 샤워하고 나오니 더욱 돋보인다. 햇빛 가득 광합성하라고 아점을 호딱 해치우고 애들을 화장실에서 샤워기로 물도 흠뻑 주고 잎도 깨끗하게 닦아준 보람이 있다.
식물이 이런 질감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볼 때마다 신기하고 놀랍다. 실제로도 저런 벨벳 질감과 자카드 오간자 실크 레이스를 참 좋아하는데 아주 내 취향. 잎도 꽤나 두툼한데 그래서 그런가 단 두 장뿐이지만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화분을 타고 내려오는 후마타 고사리의 뿌리들이 정말 귀엽다. 겨울 동안 잠깐 주춤하더니 요즘 폭풍 성장하고 있는 고사리. 저렇게 새로운 잎이 나올 때 돌돌 말려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신기한 점은 저렇게 뿌리들이 바깥으로 나와 있고 그 노출된 뿌리에서 저렇게 새 순이 꼬부랑꼬부랑 자라난다는 것이다. 마치 기지개를 켜듯 움츠러있다 활짝 펴내는 잎을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다. 뿌리는 또 어떻고! 새로 자라나는 뿌리는 연둣빛인데 그 모습이 병아리처럼 귀엽다. 빼꼼 -
근데 너 또한 분갈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면 그건 좀.. 난 힘들다..
2021. 12월에 데려왔던 노바.
얘는 참 온도 습도에 민감한 친구 같다. 조금 추워지기 시작하면 그걸 또 어찌 알고 귀신같이 잎을 다 떨군다. 그래서 얘가 잎을 다 떨구면 아 곧 겨울이구먼 싶다. 그러고 한동안은 죽었나 싶게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있다가 봄이 오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조그마한 싹을 틔운다. 그러고 여름 동안은 저렇게 혼자 왕 잎을 보여주고...
그 양분을 배분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어. 주식도 분산 투자를 하라고 하잖아? 물론 그렇게 문어발로 물릴 수도 있겠다만 지금 과하게 집중된 것 같아. 똑 떨어질까 봐 어찌나 불안한지. 내 마음을 아니?
귀여운 노성탄씨와 한 컷
식물을 보고 있으면 기특한 순간이 참 많은 것 같다. 내가 무관심한 시점이 있음에도 신엽을 올리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나를 다시 한번 잡아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열심히 하다 보면 그게 쌓이고 쌓여 무언갈 이루어내는 그런 느낌으로. 앞으로 무더운 여름이 오면 그때 잠시 식물도 앓겠지만 또 한 해를 무사히 함께 보내기 위해 주인이 노력해 볼게!
식물은 내 취향이 아니고 키우고 싶지 않다고, 의사표현도 못하는 식물을 키워 뭣하냐고 그랬었는데. 벌써 식집사가 된 지도 3년이 넘어가다니 사람 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꼬리물기 생각의 교훈 : 단언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