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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Jul 13. 2020

장자크 상페의 드로잉, 풍경, 신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글을 시작하겠다. 『꼬마 니콜라』(Le Petit Nicolas)의 장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 (1932~)는 일러스트 작가일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출판된 책 표지를 넘겨보자. 때론 답을 얼버무리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일러스트 작가로 명시돼 있다. 이러한 규정은 단정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부당해 보이진 않는다. 실제로 장자크 상페는 오랜 기간 『뉴욕커』(The New Yorker) 표지를 담당했고 주요 작품 역시 일러스트 모음집이 다수다. 게다가 그의 연재만화 경력도 1955~1956년 약 2년에 그칠 정도로 일천하다. 다시 물음을 바꿔, 장자크 상페는 만화 작가인가? 이번에는 만화와 일러스트를 양축으로 고정한 후 그 사이에 위치한 ‘그림 이야기(picture story)’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다. 만화와 일러스트 사이에는 『꼬마 니콜라』(Le Petit Nicolas)(1956~1965), 『좀머씨 이야기』(Die geschichte von herrn Sommer)(1991)와 같은 일련의 삽화가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텍스트를 시각 이미지로 전환한 삽화는 일러스트의 축으로 더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삽화의 정의를 보다 세밀하게 내려보자. 삽화는 연속된 이야기 시간에서 특정한 순간을 분할하고, 그처럼 선택된 시공간의 격자 안에 인물이나 사건, 행위 같은 서사의 구성요소를 재조립하는 행위다.

 이 정의는 물론 삽화에 관한 정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화의 정의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장자크 상페 본인이 글, 그림 모두를 도맡을 때는 그의 작품은 때론 만화의 축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가령 『얼굴 빨개지는 아이』(Marcellin Caillou)(1969),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Raoul Taburin)(1995) 같은 작품들은 비록 전통적 칸으로 구획되진 않았지만 글과 그림이 결합되고 그림과 그림이 이어진 분명한 만화다. 이처럼 장자크 상페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리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장자크 상페는 삽화가이며 만화가이고 일러스트 작가다. 그리고 장자크 상페의 작품을 검토할 때도 제한된 일러스트의 영역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리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더 넓게 펼쳐진 시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드로잉, 영화, 풍경화 같은 인접한 다른 예술들을 장자크 상페의 작품과 맞대어보자. 그러면 장자크 상페의 작품 세계를 이전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랑스식 드로잉

 장자크 상페의 작품이 만화 또는 일러스트 무엇으로 불리든 그의 작품의 본질적인 속성은 다름 아닌 드로잉이다. 데생의 일인자라는 평가는 다소 과장됐지만 그의 드로잉은 분명 매력적이다. 구체적으로 『꼬마 니콜라』(Le Petit Nicolas)의 드로잉을 따라가 보자. 상페의 선은 느긋하고 여유롭다. 그리고 유려하게 흐르는 선은 설사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삶은 결국 기쁨으로 충만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이 선의 낙천성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달리 말해 표현적인 관점에서 상페의 드로잉에 영향을 미친 작가나 작품은 과연 무엇일까. 장자크 상페는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유년시절 잡지, 신문의 그림을 보고 연습을 한 걸로 보아 프랑스 풍자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분석명제처럼 아무런 지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 만화가가 프랑스 만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엄밀하진 않더라도 장자크 상페의 드로잉을 소급하여 임의적인 하나의 계보도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먼저 계보도의 첫 번째 실마리는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의 저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쟁은 장자크 상페보다 한 세대 앞선 영화감독 장 르느와르(Jean Renoir)의 진술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나는 세탁부라든가 혹은 과일 행상의 몸짓이 종종 비할 바 없는 조형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내 아버지의 그림을 통하여 어떤 프랑스적 몸짓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라고. 여기서 우리는 조심스레 상페의 만화와 르느와르의 영화가 프랑스적 몸짓이라 불리는 무언가를 공유한다 추론해볼 수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장 르느와르의 영화 곳곳에서는 『꼬마 니콜라』(Le Petit Nicolas)의 드로잉 흔적들이 발견된다.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에서는 나이를 잊은 어른 그러니까 어른이 된 니콜라가 학교/등교 계열체를 감옥/행군 계열체로 대체하며 왁자지껄한 희극적 무대를 연출한다. 더군다나 이 모든 광경을 구경하는 아니 참여하는 카메라는 어떠한가. 카메라의 동선은 일종의 드로잉의 선으로 변모하여 광학적으로 투사된 표면을 자유로이 유영한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는 어쩌면 드로잉의 계보에 영상 매체인 영화를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치 않을지 모른다. 그러면 장 르느와르에서 다시금 한 세대를 거슬러 회화의 영역으로 이동해보자. 바쟁에 이어 이번에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계보도에 대한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미술가들이 직접 만들거나 다른 미술가에게서 빌려온 다양한 자국들의 역사들이 있으며 이른바 프랑스 자국이 있다”고 말한 후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를 경유한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 (1837~1953)를 언급 한다. 이때의 라울 뒤피는 누구인가. 동시대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 “뒤피는 즐거움 그 자체다”라고 평할 만큼, 라울 뒤피는 전 생애에 걸쳐 기쁨으로 가득한 그림들을 그려온 화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페에 앞서 투명한 색채, 자유분방한 동선, 낙천적인 감정을 아우르는 프랑스 자국을 선취한다. 물론 장자크 상페가 라울 뒤피를 의식했을지언정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인위적인 소급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라울 뒤피, 장 느르와르, 장자크 상페로 이어지는 계보도를 통해 우리는 ‘프랑스식 드로잉’이라는 형식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장자크 상페의 작품을 전체적 시각으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좌) 장자크 상페, (우) 라울 뒤피



인상주의 풍경화의 세계

 프랑스식 드로잉으로 그려진 장자프 상페의 세계는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프랑스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건 이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세계는 어딘가 이상하다.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지만 그 안에서 여자 아이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어른들의 세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몇몇 여성들이 서사에 참여하긴 하지만 그 누구도 온전히 주체적인 모습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이렇게 여성이 배제된 장자크 상폐의 세계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작가의 여성관이 반영된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을 텐데, 이에 관련하여 그는 “여성은 남자들에겐 거대한 수수께끼이며 예나 지금이나 여성성은 나를 눈부시게 만드는 수수께끼”라고 답한다. 

 이렇듯 장자크 상페는 실제가 아닌 상상의 여성을 재현하는 작가이며 그가 창조한 세계는 다름 아닌 미소지니(misogyny)의 세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당혹스럽게도 여성이 소외된 이 세계는 여전히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도대체 장자크 상페의 보편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앞서 논의한 프랑스 드로잉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여기에 더해 그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인상주의 풍경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크 상페는 인상주의 작가들이 그러했듯 파리의 풍경에 매혹됐다. 강과 나무, 차도와 광장 그리고 스쳐 가는 사람들. 장자크 상페는 이 모든 도시의 풍경을 흩날리는 선으로 포착한다.   비록 흩날리는 윤곽선은 흰 여백 속에 용해되어버리지만 그럼에도 대도시 파리의 인상은 어렴풋한 암시만으로 충분히 포착 가능하다. 보들레르(Baudelaire)가 말한 스쳐 가는 것, 사라져 가는 것, 우연적인 것이라는 현대성의 감각을, 장자크 상페는 색채의 조각이 아닌 선의 실루엣으로 재현한 것이다. 인상주의의 영향은 또 이뿐만이 아니다. 흐릿한 윤곽선과 함께 높은 시점의 구도 역시 장자크 상페의 주제와 정서를 강화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장자크 상페는 모네(Monet)와 피사로(Pissarro)와 같이 부감의 시선으로 대도시 파리를 내려다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과 풍경이 얼마간의 생략이 불가피한 원경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흰 평면의 공간에서 세계는 한없이 크고 넓은 반면 인간은 한없이 작고 왜소하다. 그들 각자는 무언가에 몰두하지만 심지어 그것이 그들 삶의 결정적 순간이라 할지라도 이 거대한 세계 앞에 모든 것은 덧없기만 하다. 실제로 그림 속 그들의 존재는 단지 사라져 가는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좌)  클로드 모네, (우) 카미유 피사로


 이러한 이유로 멀리 바라본다는 풍경화적 감각은 장자크 상페의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적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는 여기와 여기 너머라는 거리를 설정한다. 하지만 장자크 상페의 작품에서 거리는 공간 그 이상을 의미한다. 지금과 지금 너머라는 시간적 거리를 함께 설정하며 그래서 장자크 상페의 풍경은 현재에서 멀어진 어떤 거리 과거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물론 장자크 상페의 풍경이 과거의 정서를 자아내는 것은 단순한 원근법적 구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풍경화의 원근법으로 조직된 세계 내에는 또한 과거의 낡은 것들로 가득하다. 20세기에 19세기의 독창적인 구식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국 화가 라우리(Lowry)의 도시 풍경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상페의 도시 풍경 역시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1950, 60년대의 어딘가에 고정돼 있다. 50년대 자동차가 여전히 도로 위를 굴러다니고, 컴퓨터가 마지못해 그려질 때조차도 그것은 기억에서 희미해진 70년대 컴퓨터다. 이에 관하여 장자크 상페는 과거에 고착된 자신의 성향을 순순히 인정한다. 그는 현대 세상이 흥미롭지 않으며 심지어 그려내기에도 힘들다고 토로한다. 다만 이때 작가의 진술을 단순히 시대의 뒤처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감정으로 가령 『꼬마 니콜라』(Le Petit Nicolas)만 해도 첫 책이 나올 때부터 이미 과거의 이야기였다. 남자아이들이 입던 짧은 바지는 사라진 지 오래고, 교실의 책상 역시 더 이상 뚜껑 달린 책상을 사용하던 때가 아니었다. 


 즉 장자크 상폐의 작품은 시간을 초월한 이야기이며 노스탤지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같은 장자크 상폐의 세계는 아름답다. 하지만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 세계는 또한 어딘가 이상하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배제해서만은 아니다. 일례로 장자크 상페는 “인간은 위로가 불가능하나 즐거운 동물”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은밀히 또 다른 무언가를 배제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 세계에는 무한한 기쁨이 넘치면서 동시에 어찌할 수 없는 우울이 배어 있다. 하지만 이때의 우울은 어찌하였든 견뎌낼 만한 감정이다. 오후 일과가 끝날 무렵 서글프고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더라도 부재한 부장의 빈 사무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힘을 내는 『사치와 평온과 쾌락』(Luxe, Calme & Volupte)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상페의 관조적 풍경에는 이처럼 가난, 교육, 주거 문제와 같은 계급적 갈등이 탈색돼 있다. 대신 도시 중산층 계급의 삶을 풍경에 삽입하여 그들의 삶을 한없이 안온하고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역사를 은폐하는 기제가 이데올로기라 한다면 장자크 상페의 풍경은 분명 하나의 신화다. 그 신화의 풍경화는 우리를 노스탤지어적 이상향으로 데려가며 또한 그만큼 지금 현실과의 거리와 멀어지게 한다. 결국 장자크 상페의 작품은 인상주의의 외양만을 공유한 게 아니었다. 인상주의가 종국에 직면한 한계도 고스란히 답습한다. 삶의 찬미는 분명 진실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이지만 이 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현실의 파리 대신 이상향의 파리를 연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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