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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Sep 12. 2020

극동의 모더니스트, 타카노 후미코


  타카노 후미코의 <친구>를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보다 좋은 작품을 그려낼 수 있을까. 연극무대의 우아한 몸짓 그러니까 칸으로 분절되고 이어지며 새로운 운동을 발생시키는 그 순간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각 칸의 장면들은 정말 그 순간일 수밖에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다른 장면을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이 경이감은 작품 말미 갑작스레 당혹감으로 변한다. <친구>는 초기작으로 심지어 작가가 처음으로 100페이지를 넘긴 작품이었다. 물론 초기 작품이 후기 작품보다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게다가 후기 작품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초기 작품을 선호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타카노 후미코의 40년이라는 긴 경력을 고려하면 앞선 생각은 다소 단정적이다. 특히 초기작 <친구>와 후기작 <도미토리 토모킨스>의 거대한 간극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친구>가 색 바랜 흑백 사진을 연상시킨다면, <도미토리 토모킨스>는 기하학적 방식으로 이미지를 해체한 현대 회화를 연상시킨다. 단절이라고 해야 할 만큼 결정적 변화다. 이 변화는 급진적 전회일까 아니면 사진의 평면 이미지에 내재된 잠재태의 뒤늦은 발현일까. 우린 이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타카노 후미코의 세계에 들어서는 열쇠이며 무엇보다 오랜 기간 펜을 잡고 그림을 그려온 노작가에 대한 예의다.

 


타카노 후미코에 대한 어떤 가정

 타카노 후미코는 과거의 한 시기에 매혹돼 있다. 다수의 작품은 동시대를 그리지만 때론 과거의 어느 지점을 황홀히 바라본다. 가령 <봄 부두에서 태어난 새는>에서는 다이쇼 시대에 인쇄된 엽서로부터 <노란책-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에서는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다가 시대를 1930년대 이후로 확장한다면 느와르 장르의 변주인 <데이비스의 계획>, <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도 이 시대적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요컨대 타카노 후미코의 시대극은 공교롭게도 모두 20세기 초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노란책>의 초반부 버스장면을 보자. 주인공 ‘미치코’의 친구는 버스를 내리기 위해 그녀의 등을 세차게 때린다. 이때 등을 때리는 손의 운동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던 새로운 형식으로 재현된다. 등을 때린 순간과 때린 이후의 모습을 하나의 칸 안에 동시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 잔상효과는 무언가에 대한 징후다. 후기작에 속할 <노란 책>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서만은 아니다. 뛰어난 칸 연출 능력을 가진 작가가 굳이 운동 이미지를 중첩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징후일까. 우선 <노란책>의 잔상효과는 미래주의 작품과 마르셀 뒤상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연상시킨다. 그러면서 분해된 운동 이미지는 자연스레 앞서 언급한 20세기 초 더 정확히는 입체주의, 미래주의, 아방가르드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사실이 나로 하여금 타카노 후미코에 대한 어떤 가정을 하게 만들었다. <노란책>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타카노 후미코는 사실 극동의 모더니스트가 아닐까?      


(좌) 노란책, (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바라보기라는 주제

 타카노 후미코의 대화집 <나를 해체하는 방법>은 작가의 모더니스트 성향을 암시하지만 한편으로 그 논의를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가적 질문을  덧붙여 보겠다. 작가가 2차원 얼굴을 불편하게 느끼는 건 2차원 평면에 3차원 세계를 재현하는 회화의 근본적인 한계를 직시해서가 아닐까. 작가가 반복적으로 해체라는 용어를 언급한건, 비록 작가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할지라도 그것은 어쩌면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작가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욕망이 아닐까. 끝으로 위의 두 질문을 따라가다 결국 당도하게 될 지점은 모더니즘 보다 구체적으로는 입체주의의 세계가 아닐까. 실제로 타카노 후미코의 연속된 칸들은 엄격한 직사각형 형태를 고수한다. 이는 작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기오 모토’의 화려한 칸 연출을 철저히 배제한 것으로 그의 작품에는 어떠한 칸의 진입과 기울임도 허용치 않는다. 또한 칸 표면에 머무는 인물들은 세잔을 계승한 피카소의 회화처럼 구와 원뿔, 원기둥 형태로 구축되고 그래서 그들의 움직임은 때때로 분절인형처럼 흐느적거린다.

  물론 이 같은 이미지를 기하학적 이라고 할지언정 입체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입체주의는 사물 주변을 돌아다니며 연속적인 여러 모습들을 포착하고, 그 모습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혼합해 시간 속에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타카노 후미코는 모더니즘 기획을 실행하기 위해 영화의 카메라 시점을 채택한다. 누군가에겐 이러한 영화와 입체주의의 관계가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와 입체주의는 모더니즘의 산물로서 실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영화의 편집 방식은 입체주의의 해체/조립 방식과 유사하며 이에 따라 두 양식 모두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가 공유한 기본 체험 즉 유동적인 시공간을 제공한다.  


 이제 우리는 타카노 후미코의 카메라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타나코 후미코는 몽타주를 통해 기호를 실험하던 초기 데즈카 오사무의 여러 시도들을 한층 더 밀고 간다. 줌인, 광각, 클로즈업, 부감 등 다채로운 시점들을 리듬감 있게 칸으로 펼쳐내며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완전한 운동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카메라로 담은 이 세계는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칸과 칸은 분명 매끄럽게 지속을 유지하는데도. 가령 부감과 클로즈업을 오가는 큰 낙차는 이상하리만큼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원근법을 정상적으로 적용했다면 인물과 배경의 거리는 이보다는 멀어져야 했다. 게다가 <버스로 네 시에>처럼 인물과 공간이 각기 다른 시점으로 거듭 배열될 때, 후미코 특유의 카메라 눈은 서사를 지지하는 것을 넘어선 어떤 과잉을 표출한다. 이 과잉은 일종의 충동으로서 세계가 설사 파편화되더라도 가능한 시점을 기어코 모두 재현하려 한다.


<버스로 네 시에>

  

 

 이렇게 타나코 후미코의 세계는 격자 모양 칸으로 분해된 기하하적 세계로 수렴된다. 그리고 모더니즘 궤적의 어느 변곡점에 <오쿠무라씨의 가지>가 위치해 있다. <오쿠무라씨의 가지>는 1968년 6월 6일에 가지를 먹었는지를 알아내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주제는 중요치 않다. 그것은 표층 주제일 뿐이고 심층 주제는 제한이 없는 눈을 통해 세계를 감각적으로 탐구하는 것 즉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눈은 마치 베르토포의 몽타주 영화에 스며든 ‘키노아이’ 같다. 키노 아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인간의 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상들을 모으고 기록하며 인간의 눈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지각하는 기계의 눈 즉 영화 카메라의 눈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해해선 안 된다. <오무쿠라씨의 가지>에서 키노아이가 실현된 건 복수의 시점을 단순히 반복해서가 아니다. 하필이면 주전자와 간장병 같은 물질들이 SF적 도약으로 카메라를 들고 세계를 기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메라의 눈이 비로소 비유가 아닌 현실로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베르토프식 범신론-인간이 아닌 물질 자체에 속하는 눈 그래서 무한한 시점의 자유를 가진 눈-을 만화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입체주의의 시공간 형식, 동시성

 입체주의 시공간을 규정하는 개념은 동시성이다. 동시성은 일반적으로 어떤 두 사건이 동시에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바를 말한다. 그것은 복수적 시점에서 이미 예고된 것으로, 각기 다른 시공간을 동시에 재현하는 행위가 곧 동시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입체주의의 시공간 형식은 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인 베르그송 철학과 결합될 때,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는 의식의 본질 즉 지속을 드러내는 개념으로까지 확장 된다. 동시성을 이처럼 부연하는 건 사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동시성과 복수 시점을 통해 서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오무쿠라씨의 가지>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 ‘도쿠다’는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해 비디오 영상을 거듭해 줌인 한다. 이 때 흥미로운 점은 줌인의 운동이 카메라의 광학적 존재를 초월한다는 점이다. 거리를 조절하는 줌 렌즈는 마치 제한이 없다는 듯 작동한다. 줌인의 운동은 이미지의 표면을 확대하기보다 이미지의 내부로 깊숙이 파고든다. 그리고 작품 에필로그에 이르러선, 무한 증식된 이미지는 입체적으로 재구성돼 또 다른 현실의 세계로 완연히 떠오른다. <오무쿠라씨의 가지>의 카메라가 가시적 세계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시적 세계를 뚫어 실재의 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우린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거와 현재, 카메라 안과 카메라 밖의 경계를 더 이상 명확히 인식할 수 없다. 대신 시지각의 한계를 넘어선 동시성이라는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작품 말미 주인공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독백을 남긴다. “결혼하기 전에 사모님과 데이트를 하는 도중, 어린 아들이 자전거에 치여서 구급차로 실려 갔을 때, 1968년년 6월 6일 점심에 무얼 드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가지라고 대답하겠죠. 즐겁고 기뻐서 밥이 필요 없을 때도, 슬프고 안타까워서 식욕을 잃었을 때도 전부 6월 6일의 연속인걸요.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저 가지의 그 이후 이야기인 걸요.“ 그의 독백은 깊은 여운과 함께 과거가 현재 속으로 들어와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후기작 <노란책> 역시 <오무쿠라씨의 가지>에 이어 모더니즘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다만 <노란책>은 동시성을 체험하기 위해 <오무쿠라씨의 가지>의 기계-카메라 대신 <버스로 네 시에>는 프루스트식 의식-연상을 도입한다. <버스로 네 시에>의 기억은 시간의 실을 따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에피소드처럼 갑자기 과거가 환기되면서 현재와 공존하는 것이다. <버스로 네 시에>에선 어떠한 특별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주인공 ‘마키코’가 버스를 타고 내릴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사는 여전히 지속되는데, 이때 서사를 움직이는 것은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내면의 독백이다. 나사를 보며 나사 돌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다 이어 연속된 의식은 회전하는 드라이버와 고장난 지퍼로 차례차례 연장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란책>은 전작에서 보다  나아가, 작가에 따르면 해체된 자아가 원래대로 붙일 수 없을 만큼 의식의 흐름을 밀고 간다. <노란책>의 기억 즉 잠재태적 과거는 이전보다 복합적인 양상을 가진다. <노란책>은 소녀 ‘미치코’가 <티보 가의 사람들>라는 책과 교감하는 이야기다. <노란책>의 기억은 일차적으로 독서라는 경험이지만 한편으로 <티보 가의 사람들>이라는 소설 자체가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타카노 후미코는 소설 텍스트와 내면의 독백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꿈과 환상을 통해서 동시성을 수행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현실 세계의 주인공에게 말을 건네고 혹은 반대로 주인공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과거 세계의 일부가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소설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다른 영역에 일방적으로 삽입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침투 한다는 점이다. 버스 안에서 연상을 통해 소설 속 집회에 참여하는 장면이 어떠한 단절 없이 집에서 꿈을 깨는 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건 그래서다. 이것이 모더니즘 형식이 건넬 수 있는 서사이며, <노란책>은 이를 통해 유년기와 이별을 고하는 그 특별한 순간을 노스텔지한 색채로 물들인다.   


<도미토리 토모킨스>



글을 끝내며: 해체하는 방법

  <노란책>은 타카노 후미코의 모더니즘 기획을 완수한다. 입체주의 형식이 도출할 수 있는 일련의 서사와 함께. 그렇다면 타카노 후미코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 질문을 답하기 전 타카노 후미코와 동일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아트 슈피겔만을 잠깐만 언급하자. 그는 언더그라운드 만화 작품집인 <Breakdowns>를 통해 입체주의 형식을 탐구했다. 칸을 시공간의 조각으로 해석하고 특히 <에이스 홀, 난쟁이 탐정>에서는 피카소의 작품과 느와르 장르를 전경화 한다. 다만 차이라면 타나코 후미코는 아트 슈피겔만과 달리 이 모든 것을 은밀히 진행시켜 나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화가의 만화가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카노 후미코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최신작 <도미토리 토모킨스>에서 타카노 후미코는 모더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작품의 변화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차라리 모더니즘의 귀결처럼 보인다. 제임스 조이스가 프루스트를 계승해 줄거리를 포기하고 주인공 인물을 제거하는 과정처럼 그리고 모더니즘은 평면성 자체를 지향하는 운동이라는 미술 평론가 그린버그의 비전처럼 말이다. 모더니스트 타카노 후미코는 그렇게 예정된 모더니즘의 길을 따른다. 그리고 타카노 후미코의 세계는 마침내 패턴으로 이뤄진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전면화(全面化)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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