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진 Sep 12. 2018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9월의 이야기 여덟

느닷없던 여름이 갔다. 해가 없어지면 춥다. 뉴스 16개 꼭지가 ‘폭염’으로 채워질 땐 언제고 이렇게 갑자기. 조금 있으면 코가 시리고, 거리에 엄청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질 것 같다. 세상에. 끔찍하다. 몸이 추웠던 탓인지 맘이 끔찍했던 탓인지, 어제는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누워서 여행을 떠났다. 동영상을 타고 타고 돌아다니는 유투브 여행. 그러면서 콩쥐를 생각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생각나는 콩쥐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던 콩쥐 말이다. 계절이 바뀌면 시간이 흘렀단 게 온 몸으로 느껴지니까. 특히 찬바람이 불 때면 ‘1년이 또 지나가구나’ 싶으니까. 그동안 열심히 물을 부은 것 같은 독을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얼만큼 찼을까 싶은 마음으로. 그런데 아뿔싸. 독이 텅 빈 것 같을 때면 어김없이 콩쥐가 생각나는 거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해보겠다고 독에 물을 붓고, 또 부었는데 텅 비어있는 걸 발견했을 때, 알고 보니 밑 빠진 독이었단 걸 깨달았을 때, 그제서야 콩쥐는 망연자실하지 않았을까. 처음엔 콩쥐도 의욕이 넘쳤겠지. 밑 빠진 독인 줄 상상이나 했겠어? 뭐 이런 생각들.      


콩쥐를 생각하는 동안 핸드폰엔 온갖 영상이 흘러나왔다. 토론의 고수들이 나와 학생들과 토론을 벌이는 <토론대첩>부터 픽사의 14번째 작품인 <몬스터대학교>까지. “저는 딱히, 여러분들 세대가 특별히 힘들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인자한 미소의 진중권. “내가 이 사회의 피해자로 보여요? 아니 16살 춘향이 나이도 아니고, 20살이나 돼서 커리어에 대한 확실한 계획도 없으면서 아이를 안 낳겠다는 게, 그거 너무 무모한 이야기 아니에요?” 빈틈 하나 없는 전여옥. “난 노력하면 될 줄 알았어. 보여주고 싶었거든 내가 특별하단 걸” 잔뜩 풀이 죽은 마이크 와조스키! 알고 보니 외눈박이 마이크는 몬스터대학교에서 퇴학당했단다. 너무 안 무서운 외모라서 겁주기 학과에서 쫓겨나 ‘우편업무’로 꿈을 바꿨다. 

흘러나오는 영상 소리가 희미해지고 콩쥐 생각도 흐릿해져갈 쯤..



열심히 독에다 물을 붓는다. 마치 콩쥐처럼. 한 바가지 퍼와서. 푸- 붓고. 또 한 바가지 힘겹게 이고 와서 파- 붓고. 아니 이상하게 왜 물이 안차는 거지? 아, 이것도 밑이 빠진 독인가? 이상하다 싶으면서 물을 붓는데 자꾸 와서 한 마디씩 거든다.


처음엔 안경을 쓴 교수가 와서는 되게 인자한 목소리로 “좀 힘든가요? 다들 그렇게 힘들 테니 참아 봐요.” 아, 네 그렇군요.


다음엔 괜히 눈꼬리가 사나워 보이는 여성이 와서는 “아니 밑 빠진 게 뭐 문젠가요? 독 자체엔 문제가 없어요! 원래 그런 거죠 뭐 어쩌겠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에 물을 가득 채우는 사람도 있을 걸요? 열심히 좀 해봐요!” 아 그런가요? 콩쥐한테는 두꺼비가 나타나던데. 두꺼비는 없는 건가.


다음엔 눈이 하나뿐인 초록색 괴물이 나타나서 “정 안 되면 독을 바꿔보지 그래? 알고 보니 그 독은 너한테 잘 안 맞을 수도 있어. 인생이 노력으로만 되는 건 아니라구.” 윽, 여태까지 붓던 물은 뭐지? 나한테만 밑 빠진 독인건가?      



그렇게 독에 물만 붓다 꿈에서 깼다. 결국 물을 계속 부어야하는지, 밑 빠진 독인건지, 구멍을 막아줄 두꺼비는 없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실랑이만 하며 물을 부었다. 이게 다 계절이 바뀐 탓인가. 아무튼 간에 달라지는 건 조금씩 추워지는 온도뿐이다. 독이고 자시고 간에 밤이 되면 추우니까. 긴팔에, 겉옷까지 챙겨서. 독서실로 향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강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