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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Feb 25. 2019

백의 그림자

황정은

가게들 틈으로 난 골목, 이라기보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 정도로 보이는 어둡고 좁다란 통로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간판도 탁자도 없이 점심 배달 메뉴로 백반 한 가지를 만들어서 파는 허름한 식당이 있고, 그 맞은편에 오무사가 있었다. 천구백칠십 년대 이후로 손을 본 적이 없는 듯 낡고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전구를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가게를 밝히는 전구라고는 벽에 걸린 노랗고 푸른 알전구 다발뿐이었다.

빽빽하다.

라는 말의 이미지 사전을 만든다면 아마도 그런 광경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빽빽하다.  /102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보면 밤사이 위로부터 한 층씩 사라져서 장막이 한 단씩 내려와 있었다.

마침내 가동을 밀어내고 남은 자리엔 재빠르게 공원이 조성되었다.

오무사는 이 과정에서 다시 사라졌다.

공원 주변으로 상가가 재정비되면서 부근의 상점들과 더불어 사라졌다. 오무사 노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늘고 홀쭉한 그림자 하나가 어딘가로 이어진 채로 며칠 그 부근을 서성거리는 듯하더니 어느 날 그 마저 사라졌다. /110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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