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한 자리에 오래 머문다는 것, 그 때문에 얻게 되는 것들이 무언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서울로 이주하여 지낸 2년에 가까운 시간을 제외하고 나는 한 동네 한 건물에서 25년 넘게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갑자기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사랑이라 하기도 우스운 것들로 엉엉 울기도 했다.
총 3세대가 사는 다세대 주택, 3층에 살던 나는 1층에 살던 또래와 적잖은 추억을 나눴고 그 아이가 떠나갈 무렵에는 도보 5분 거리의 초등학교에 입학해 지금까지도 이어진 인연들을 얻었다.1층에서부터 우리집이 위치한 3층까지 자란 키큰 나무는 큰방 창문을 열면 크고 풍성한 이파리를 아주 손쉽게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는데 태풍이 몰아치는 한여름 밤을 제외하고는 늘 만족스런 풍경과 소리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여름의 막바지에서 가을이 오는 무렵. 정오가 지난 대낮에 큰방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맨 방바닥에서 얇은 이불을 덮은 채 눕곤 했는데 그때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가 작은 파도소리처럼 들려 그 어떤 디저트보다 달콤한 낮잠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본래 우리집 앞에는 1층 짜리 낡은 양옥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붉은 갈색 벽돌의 의류 공장 같은 것이, 그 옆에 건물 1층에는 막걸리와 담배를 팔던 노부부가 운영한 식당과 슈퍼의 중간 격인 가게가 있었다. 주류나 담배 심부름을 7살인 내가 하러 가도 전혀 어색함이 없던 시절. 나는 종종 그 가게에 가 아빠의 담배와 소주를 구매하곤 했다. 할머니가 그것들을 담아주던 봉지의 색과 질감들은 때마다 달랐으나 그곳의 냄새는 늘 같았다.
그 가게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할머니가 어딘가로 떠나갔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여러 사람들이 지나간 그 건물, 그 라인은 재개발이 결정됐다. 건물속 사람들은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그 구역에 살던 초등학교 친구도 여럿 이사를 떠났다.
"여기는 내성적이었던 ㅇㅇ의 집, 여기는 나랑 같이 미술학원을 다녔던 ㅇㅇ의 집, 여기는 엄마가 엄청 무서워서 맨날 집에 일찍 들어갔던 ㅇㅇ의 집." 낮에도 사람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동네 고양이가 더 많이 살던 그곳을 거닐며, 그들이 놓고 간 집 대문에 그려진 라커 자국을 향해 종종 이렇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곳의 얼굴은 확 바뀌어버려, 비까지 내리는 날에는 좀비나 저승사자가 지나다녀도 어색하지 않은 오싹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 뒤, 그 구역의 집터들은 시끄러운 굉음과 입자가 거친 먼지들을 매일 같이 내뿜더니 어느새, 잘 정돈된 평지가 되었고 이내 큰 아파트가 들어섰다.
고층 아파트였다. 최대 3층짜리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던, 건너에는 누가 살고 그 앞에는 누가 살고 그 윗층에는 누가 사는지 짐작 가능 했던 동네. 햇볕이 언제쯤 가장 예쁘게 떨어지고, 낮잠 자던 그 시간에도 햇볕이 나뭇잎에 기분 좋게 부딪히던 그 곳에 커다란 빌딩이 세 채나 들어왔다. 이후 바람의 크기도 방향도 이전과는 다르게 새찼고, 햇볕도 예전만큼 들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높은 계단을 힘차게 올라가 옥상에 가보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근처 공원에서 쏘아대던 폭죽이 보였다. 그 화려한 폭죽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은 당시만해도 간절했던) 소원을 빌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파트에 가려져 폭죽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야속한 소리 만이 형체 없이 하늘 가득 터진다.
사라지는 것들과 변화하는 것들이 얼마나 쓸쓸하고 아쉬움 투성인지 나는 너무도 잘안다. 꼬꼬마 시절에 나의 인사를 받아주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세월이 지나 보이지 않으시고, 과거 무서운 인상으로 동네 꼬마들을 혼내던 아저씨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골목 어귀 낡은 의자에 앉아 볕을 즐기고 계신다. 어느 날인가 매일 같이 나오던 아저씨가 보이지 않으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기록물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유달리 나무가 많았던, 낡고 오래된 '나의 동네'. 그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집. 그리고 그 시간만큼 나이를 먹어가는 나와 나의 엄마.
시간이 흐르고,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결국엔 사라져가는 것을 보는 일.
꿈같은 낮잠을 선물해줬던 우리집 앞 커다란 나무의 가지를 치는 일에도 나는 마음 한 켠이 저릿한데 하물며 집이, 그 풍경이 사라진다니. 숨이 턱 막힌다. 온 세월을 함께하며 벽지에 그려진 낙서와 문턱의 생채기에도 사연이 담겨 있는 그 공간.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라지지 말아라.
사라지지 말아라.
사라지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