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국내에서 연예인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개중 하나는 바로 공항이 아닐까? 나도 애쓴 적은 없지만 인기 아이돌부터 배우, 모델, 개그맨, 스포츠 선수까지 참 많이도 보았다.
그중에서도 한 번은 내 담당 업무였던 게이트에 해외 촬영을 주로 가는 방송 촬영팀이 탑승한 적이 있었다. 스태프 몇 명과 메인급 출연 연예인 한 명이 같이 가는 모양이었다. 편의상 해당 연예인을 A라 지칭하겠다.
웬일인지 A에게는 시스템 상 승객 서약서가 물려있었다. 체크인 카운터 직원이 A에게 서약서를 받고 시스템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유는 '여권 훼손'이었다.
여권 훼손으로 인한 승객 서약서는 보통 '이미 승객의 여권이 훼손되어 있었기에 해당 국가에 입국이 거절되어도 우리 항공사는 책임이 없습니다.'를 확인받기 위해 쓴다. 그런데 충분히 알 만한 사람이 여권 훼손이라니! 어떤 식으로 훼손되어 있는지 너무너무너무 궁금했다! 궁금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왜 그런지 궁금하니 여권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하고 나설 수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그 당시 나는 막내 직원이었다. 아쉽지만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척 했다.
"고객님, 카운터에서 서약서 하나 작성하셨죠? 저희한테 주시면 됩니다."
"아, 그거 잃어버렸어요."
"그럼 새로 한 장 작성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막내처럼 보이는 스태프 한 명이 마치 '그거 저한테 있는데…. 어떡할까요?'가 연상되는 표정으로 A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서약서는 탑승권에 스테이플러로 고정해 놓았을 텐데 서약서만 똑 떼서 잃어버린 것도 말이 안 됐다.
"싫습니다. 저는 그런 거 작성 안 할 거예요."
"고객님, 작성하셔야 비행기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
"싫다니까요? 저는 제 이름으로 그런 거 남기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애초에 왜 이게 여권 훼손이냐고요."
하며 A는 그(또는 그녀)의 여권을 보란 듯 펼쳐 보였다. 여권엔 웬 고래 도장 하나가 떡 하니 사증 페이지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손님, 이거 출입국 도장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이런 관광지 도장은 여권에 찍으시면 안 돼요. 이런 사소한 걸로도 여권 훼손이 인정될 수 있어요."
"저는 이 도장 찍고도 1년을 넘게 다른 나라를 왔다 갔다 한 사람이에요. 이게 훼손이라면 이때까지는 왜 문제없이 출입국이 가능했냔 말이에요."
"모든 출입국 심사 직원들이 관광지 도장을 여권 훼손으로 간주하진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저희가 서약서를 받고 있는 겁니다, 손님."
"글쎄, 나는 이런 거에 서명 안 할 거라니까요?"
또다. 무한 도돌이표.
이 실랑이는 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럼 나는 이 비행기 안 타겠어요."
옆에 있던 스탭들의 싸한 정적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최악의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원하시면 손님 편하신 대로 해드려야죠."
아, 우리 매니저님도 화가 날 대로 났다. 왠지 말투에서 이모티콘 '^^'가 보이는 듯했다. 이름하야 '웃으며 엿 먹이기'를 시전 중이신 거다.
"애초에 나는 이 비행기 타려고도 안 했어요! 막내가 실수로 예약을 잘못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지."
매니저님과 A는 서로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렸고 옆에 있던 우리 직원들과 방송 스탭들은 둘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는 다른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여러분들은 이거 타고 먼저 가 있으세요."
스탭들에게 말하며 A가 탑승구를 떠나려 했다.
"손님, 어디 가세요. 밖으로 나가시려면 직원 동행 하에 가셔야 해요. 혼자서는 못 가세요."
그렇게 스태프만을 태운 비행기가 기어코 게이트를 떠나버렸고, 그는 탑승구를 등지고 서 있었다. 감히 추측해 보건대 어서 이 불편한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만춘 씨, 다음 게이트 있어요?"
"아뇨, 없습니다!"
"그럼 만춘 씨가 A씨 오프로드(OFF-LOAD, 역사열) 처리 좀 해줘요."
"예? 제가요?"
오프로드는 어떠한 사유로 인해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한 자를 직원 동행 하에 보안구역이 아닌 일반구역으로 다시 데리고 나오는 절차를 말한다.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세관과 법무부 등에 들러 제출하고 확인받아야 할 서류들이 많아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연예인 A의 오프로드를 내가 맡게 되다니?
식은땀이 났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