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음식이 아닌 마음의 양식을.
"너 그러다 병 나"
단식을 결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해 준 걱정어린 조언이다.
동의한다. 다만, 반대의 의미에서.
원래 먹던 대로 그 습관 그대로 살았으면 병이 나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무렴.
한 해가 지나며 살도 쪘고, 점점 움직이는 것이 귀찮고, 오래 걸으면 무릎이 아팠다.
이제 또래 친구들은 '나이탓'으로 쉽게 돌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나이 때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6-70대 나이에도 보란듯이 순례길을 걷는 멋진 중년분들이 좋은 예 아닌가.
단식 2일차. 이제 약간의 루틴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을 마시고는 요가로 하루를 연다.
그리고 강한 바람과 맞닥트리며 한걸음 씩 떼는 고난이도(?) 산책을 시작하고, 퍼포먼스도 했다가, 전시회장을 갔으며 줌으로 회의도 했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와 다시 스트레칭과 독서로 하루를 끝냈다.
돌이켜 보니 생각보다 하루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일'에 전념한 시간은 하루의 10%에 불과했으며 건강과 즐거움을 준 시간들이 하루의 90%를 상회했다.
하루의 시간은 평소와 똑같이 주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궁금했다.
아,
나는 먹는 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구나.
먹을 곳을 찾는 일, 먹을 거리를 생각하는 일, 사고, 먹고, 치우고, 다음 먹거리를 생각하는 일이 없어지니
내 머릿속의 수많은 방들, 그것도 어느 것 하나 빈 틈이 없이 물건들로 가득하여
문 만 열면 물건이 와다다다닥 쏟아질 것 같던 방 중 하나가
마치 주인 없는 빈 집마냥 휑 하니 비워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간 놓을 곳이 없어 어깨에, 손에, 주머니에 잔뜩 우겨뒀던 내 생각들을
이제야 빈 공간안에 차곡 차곡 정리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지만 솔직해지자. 배고픔은 사실 정말 다루기 어렵고 까다로운 녀석이다.
미움이나 사랑의 감정처럼 처럼 내 노력으로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지겨움이나 간절함 처럼
다른 것으로 상쇄될 수 있지도 않으니까(어디까지나 나의 경우).
하지만 내가 80살까지 산다고 봤을 적에, 좋던 싫던 '배고픔'은 계속 데리고 가야 할 감정이고
앞으로 또 다시 건강이 바닥을 치는 것을 방지하려면 나는 이녀석을 잘 훈련시켜야 한다.
오랜 시간을 이 녀석은 나를 조종해 왔다.
먹으면 행복해질거야,
먹으면 나아질거야.
먹으면 잊혀진다?
라고 주문을 걸면서.
나는 그런 줄 알고 기꺼이 슈크림을, 와플을, 아이스크림을, 튀김을, 떡볶이를 생각날때마다 주워담았다.
그러나
불룩해진 허벅지라던가
더부룩한 포만감이라던가는 전혀 해결방안이 아니었다.
또 다시 자신을 미워하게 되거나 할 뿐.
이제 단식 3일째다. 설명은 어렵지만 무언가 가뜬하다.
점심에 가족에게 따뜻한 버섯샐러드를 만들어주면서 향긋한 버섯 내음과 고소한 올리브의 풍미를 맡았다.
그리고 어제 따온 싱싱한 귤을 껍질 채 한 입 물었다.
새큼한 과즙과 함께 떠밀려오는 시트러스의 향기는...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다채로운 맛의 부케였다.
물론 유기농으로 키워 낸 좋은 귤인 덕분도 있지만
이렇게 맛을 다양한 레이어로, 풍성하게 느끼게 된 것도 단식의 축복이 아닐까.
(슬픈 것은, 나는 아직 단식중이기 때문에 나는 이 잠깐의 기쁨을 뒤로 하고 씹어 넘기지는 못하고
즙만 먹고 나머지는 버린 점이다. 귤아 다시한번 미안해....
원래 단식중에는 이런 일탈도 좋지 않지만 과즙으로 하는 단식도 있고... 하루에 한번의 기쁨은 허하고 싶어서 나는 귤 세 입을 베어무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고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리고 마침 방학 혹은 휴가라 집에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 보자.
물론 단식에는 많은 방해요소가 있다.
'가족들에게 밥을 해줘야 하는데 나혼자 어떻게 굶나'
'그럼 남편은 혼자 밥 먹어야 하는데'
'내가 괜히 신경질 내면 어떡하나'
'기껏 휴가에 여행왔는데 먹는 걸 못하면 뭐하러 가나'
'먹는게 유일한 낙인데'
'굶어봤자 요요 온다'
등 아마 단식의 좋은 면 보다는 나쁜 면들이 먼저 퐁퐁퐁 솟아 오를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당신을 생각하는 파트너나 반려자, 가족이라면 당신이 몸을 다시 비우고 스스로에 집중하는
이 모든 과정을 비웃거나 질타하기 보다는 응원하고 존중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 가족이 그러했듯.
그리고 사족이지만 나는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맛집만 700곳이 넘는 제주에 가서 아무 것도 사먹지 않고 물과 효소, 그리고 두 알의 귤즙만 먹고 돌아왓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맛집을 찾는 에너지를
숲길을 걷는 에너지에, 글을 쓰는 에너지에 썼기에 크게 안타까움은 없다.
여행지란 어디로 가버리지 않고 맛집이란 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내 방을 정리하지 않은 채 계속 방의 갯수만 늘려간다면 언젠가는??
그게 스트레스라는 이름이든, 홧병이라는 이름이든
무언가 일은 터질 것이다.
쌓이다 쌓이다 못해 상하고 곪아 방문 밖으로 질질질 무언가 새어나왔을 때에
그 악취에 누군가 소리칠 수도 있다.
"도망쳐!!!"
하지만 그때에는 당신도 이미 곪고 있어 뛰어나가기에는 늦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