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실재하는가

운명론(결정론)과 영원주의, 양자역학과 자유의지

by 전시현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불운한 일이 생기거나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주지 않을 때 내가 나에게 건네는 암시이다. 억울한 감정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다시 머리를 식히고 하던 일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운명이란 건 있을까?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내리는 수많은 선택들은 현실을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해진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즉, 시간은 마치 결말이 정해져 있는 영화 필름과도 같이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은 그 필름을 단순히 재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의식(자유의지)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의 의식에 대한 개념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과도 같다.


인간의 삶이 미리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따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고 창조해나가는 것인지는 인류 역사상 오랜 시간 논쟁이 되어온 질문이었다. 고대 철학자들은 우주에 내재한 로고스(logos)라는 합리적 질서와 필연성을 논했고, 근대 과학은 엄밀한 결정론에 기반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시간과 인과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1. 운명론, 결정론 - 이미 정해진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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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은 인간의 삶과 우주의 사건들이 일정한 법칙이나 원인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고대 스토아 학파는 세계의 이성이자 법칙인 로고스(logos)가 자연과 인간을 필연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었다. 우주에는 우연이나 무질서가 없고, 모든 사건은 로고스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자유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운명 자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였다.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원인 없이는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인과율의 관점에서 자연 전체가 거대한 필연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생각, 감정, 선택조차도 자연의 인과적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이유는 인간이 욕망을 의식하기만 할 뿐 욕망을 결정하는 원인들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란 무지에서 오는 환상이라고 말하였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18~19세기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라플라스는 1814년 '확률론에 대한 철학적 시론'에서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라 불리는 가상의 존재를 상정하여 한 사유실험을 제안했다.



“만일 어떤 지성이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고 자연 법칙을 모두 알고 있다면, 그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 법칙은 시간에 대칭적이고 불변하므로 정보만 있다면 과거처럼 미래 역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우주가 완벽히 인과법칙에 의해 결정된 기계와도 같으며 '현재'가 유일한 미래를 결정짓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당 사고실험에서의 악마는 가상의 존재이지만 미래의 예측가능성을 상징한다. '원인이 같으면 결과도 같다'라는 믿음을 극단적으로 표현하였고, 이로 인해 19세기까지 운명과 인과는 지배적인 정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운명을 대하는 자세는 얼마 가지 않아 과학적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과 함께 바뀌게 된다.



2. 영원주의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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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은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블록 우주 개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민코프스키가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하며 '공간과 시간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4차원 실재로 통합된다'고 선언하였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운동하는 두 관찰자는 동일한 두 사건에 대해 어느 것이 먼저 발생했는지 순서를 다르게 볼 수 있으므로, 시간은 절대적 흐름이라기보다 공간과 얽혀 있는 일종의 구조라는 것이었다.


상대론적 시공간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입장이 바로 영원주의(Eternalism)이다. 영원주의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이 동등한 실재성을 갖고 한꺼번에 존재하며, 우리의 의식은 이 거대한 4차원 시공간 블록 안에서 마치 영화 필름처럼 한 순간씩을 지나가며 '흐름'을 느낄 뿐이다. '현재'를 인식하는 경험이 의식의 주관적 흐름에 불과하고, 물리적인 실재 자체에는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선(2차원)을 따라 움직이는 점(1차원)이 전체 선의 실재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인슈타인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에서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별은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다'라고 적었다.


다만 영원주의가 고정된 시공간 블록 개념을 제시하더라도, 이 자체가 반드시 '결정된 미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특수상대론의 블록우주가 성립하더라도 그것은 시간 구조의 영원성을 뜻할 뿐 물리 법칙의 결정성과는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자적 불확정성이 존재하는 세계라면 그 여러 미래 경로들 모두가 블록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주의가 시간의 흐름과 열린 미래라는 관념을 뒤흔든 만큼 '운명은 존재한다'는 직관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3. 양자역학 - 불확정성의 세계



19세기 말, 고전역학이 미시 현상(흑체복사, 광전효과, 수소 선 스펙트럼 등)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전역학에서는 정확히 동일한 초기 조건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낳아야 했고, 운동 방정식을 통해 정확한 미래 상태 예측이 가능해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20세기 초 등장한 양자역학에 따르면 동일한 초기 조건이더라도 여러 가지 확률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개별 사건의 결과를 100% 확정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음을 증명하여(측정 기기의 한계가 아닌 자연 법칙 자체에 의해) 불확정성 원리를 제시하였고, 이로 인해 모든 사건은 확정적 결과가 아닌 확률적 파동함수로만 기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시세계와 달리 미시세계에서는 우연과 확률이 실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결정론처럼 전통적인 관념에 커다란 변화를 안겨 주었다. 라플라스의 악마조차도 양자 우주에서는 전지전능한 예측을 할 수 없었으며,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에도 자연은 무작위성을 허용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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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은 다음의 상황을 가정한다. 한 마리 고양이가 든 상자 안에 방사성 원소와 연동된 독약 장치가 설치된다. 1시간 내에 그 방사성 원소가 붕괴할 확률이 50%라고 하면, 양자역학의 중첩 원리에 따라 1시간 후 방사성 원소는 붕괴한 상태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의 확률 중첩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이때 고양이 역시 죽은 상태(방사성 원소가 붕괴한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방사성 원소가 붕괴하지 않은 상태)의 중첩 상태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양자 중첩 상태인 셈이다. 우리가 뚜껑을 열고 관측하는 순간, 중첩은 한 가지 현실로 붕괴하고 우리는 고양이가 생존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게 된다.



즉 아무도 보지 않은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확률만 존재하며 관찰자가 사건의 결과를 관측하는 순간 현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비상식적인 코펜하겐 해석은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지금에 이르러 현대 물리학에서는 실험적으로 철저히 검증된 정론이다. 현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역시 '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 미시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수학적으로 다룰 수는 있더라도 직관적인 이해는 어려운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4. 자유의지는 없다? - 뇌에게 조종당하는 인간



철저한 결정론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환상이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 역시 자연 법칙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일 뿐 애초에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론을 위배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허상이 아니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현대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자유의지라고 말하며, 인과가 정해져 있고 설령 필연적이었다 해도 내가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와 동기가 결국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행동하면 자유롭다는 것이다.


1980년 실행된 리벳 실험은 인간의 자유의지 존재에 관해 세계에 큰 충격을 준 실험이다. 리벳은 피험자들에게 자의적으로 손목을 움직이기로 결심한 순간(시간)을 보고하게 하며, 뇌의 운동준비 신호인 준비전위를 뇌파로 측정하였다. 놀랍게도, 피험자가 의식적으로 손목을 움직이고자 결심한 시점보다도 0.5초 이전에 뇌에서는 이미 움직임을 준비하는 신호가 포착되었다. 다시 말해 무의식적 뇌 활동이 의식적인 결정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리벳은 이 발견을 두고 우리의 의식적 의지가 행동을 시작한다기보다도, 무의식이 시작한 행동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정도의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고 해석하였다.


이후 많은 사람들은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주장할 때 이 실험 결과를 연결지었다. 우리가 행동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닌, 뇌가 이미 결정을 내린 후에 '내가 행동했다'라고 느낄 뿐이라는 것이다. 현대 뇌과학은 나아가 인간의 의식 자체가 후속적으로 구성된 산물일 가능성까지 제기하며, 인간이 순전히 환상 위에 책임성을 구축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양자역학과 뇌과학을 접목하여 자유의지의 물리적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로저 펜로즈와 스튜어트 해머로프는 뇌세포의 미세 소관에서 양자적인 미시 뇌 활동이 일어나며, 이것이 의식과 자유의지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양자 뇌(Orch-OR) 이론을 제안하였다. 이 가설에 따르면 우리 뇌 속에서 양자 상태의 계산/중첩이 진행되다가 어떠한 임계점이 이르면 객관적 붕괴가 일어나 하나의 의식적 결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의 붕괴는 단순한 무작위가 아닌 중추신경계의 거시적 활동과 연계되어 조율된 과정이며, 양자중첩의 비연산적 요소가 의식적 판단에 개입함으로써뇌를 예측 불가능한 장치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뇌가 고전적인 기계라면 같은 입력이 있을 때 같은 출력(의사결정)이 나올 테지만, 미시 세계의 양자 요인이 개입하여 창의적 자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유의지가 아닌 단순히 뇌의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면, 범죄 행위를 처벌해야 하는가? 인간이 자신의 유전적 기질, 성장 환경, 뇌신경 구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전적으로 죄를 물을 수 있을까? 도덕적 책임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했을 경우에 묻게 되지만, 이미 모든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는 원인에 따라 정해진 결과를 따른 것뿐이기에 그 존재에 대해서 내리는 도덕적 심판의 기준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보스와 슐러의 연구에서는 행동이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 아닌 뇌의 기계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글을 읽은 집단이 부정적인 행위를 더 쉽게 저지르는 결과가 있었다. 일부 철학자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우리의 죄의식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는가'의 여부에 의존하지 않도록 책임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운명이 실재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도 두 대립은 항상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나, 모두가 각자의 신념 안에서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운명이 있다 한들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으며, 운명이 없다 해도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와 목적에 따라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운명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은 스스로를 숙명론이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며, 나아가 삶의 지혜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운명을 논하는 것도, 당신이 이 글을 읽은 것도 직접 선택한 행동이 아니라 운명대로의 흐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