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몇 분, 무명배우가 주인공이었던 시간
"안녕하세요! 지난번 리스트업 되셨던 건 픽스되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일정 가능하실까요~?"
언제나 반가운 캐디(캐스팅 디렉터) 또는
에이전시 팀장님부터의 연락이다.
전남 땅끝마을까지 가야 하는 촬영인 데다
페이는 지난번 영화 촬영보다 적지만
촬영이 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안녕하세요! 네 일정 가능합니다!"
열심히 현업에 종사하고 있던 나는
50분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카톡에 바로 답장을 한다.
대사가 없는 이미지 단역이었던 지난번 영화 촬영과 달리 대사가 나름 몇 줄 있고
싱글샷도 있는 진짜 단역이다.
촬영 워크숍이나 스터디에서 찍는 영상 말고
진짜 직업 배우로서
페이를 받고 카메라 앞에서 대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카톡으로 pdf 파일의 대본을 받았다.
내 대사만 나온 발췌본이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대학생인 주인공들이 함께 듣는 교양 수업의 교수이다.
수업의 타이틀은 <건축의 이해>
오, 이 나이에 건축학 교수라니. 제법 멋지잖아?
뭐든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어야 하는 나는,
삼십 대 후반에 건축학 교양 교수가 되기 위해서
어떤 루트를 밟아온 사람일지
그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주변에 교수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AI에게 물어볼까?
이번에 작은 역할을 하나 맡았는데, 그 인물의 배경이 필요해. 삼십 대 후반 여자인데, 대학교에서 건축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가르쳐. 그 사람의 백그라운드는 어땠을까? 학창 시절부터 대학시절, 그리고 그 나이에 교수가 되기까지. 교수 임용은 몇 살 때 됐을까? 파트타임일까? 정교수는 아니겠지?
챗GPT는 아주 구체적으로
초중고 시절, 대학 시절, 대학원과 실무, 그리고 교수 임용 과정까지
이 인물에 대한 서사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교양 수업이니만큼 접근이 쉬웠으면 좋겠는데
중간고사와 기말과제는 어떤 걸 내주면 좋을지,
첫 수업 내용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긴 대답을 정독하고 정독했다.
이후 출근길 차에서, 침대에 누워서 쉴 때도,
문득 생각이 나면 갑자기 혼자서 강의를 시작했다.
대사는 단 세네 줄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온전히 그가 되어야만 했다.
워낙 먼 거리이다 보니 촬영 전날 밤에
신사역에 모여 다른 단역 배우들과 함께 미니밴을 타고
촬영지 근처 숙소로 이동했다.
다음날 내 콜 타임은 점심시간 즈음이었다.
이제 늦어도 아침 8시면 눈이 떠지는 데다,
낯선 잠자리에서 미적댈 이유도 없어서
아침 식사와 모닝커피를 위해 일찍 일어나서 숙소를 나섰다.
숙소 앞에는 거북이가 있는 호수공원이 있었다.
아침 운동을 나온 어르신들과 공원 한 바퀴를 돌며
대사와 강의 내용을 중얼중얼 댔다.
(어르신들이 날 이상하게 본 건 기분 탓일 거야)
드디어 콜 타임.
촬영지에 도착해서
의상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리고 대사가 필요한 씬부터 후다닥 촬영을 마쳤다.
(스피드가 생명인 촬영 현장이었다)
조감독님이 "이번에는 이어서 강의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아마 연출팀?)로부터 건네받은 종이 세장.
"이거 참고하셔서 읽어주시면 돼요~"
강의에서 나눠줄 법한 유인물이었다.
내가 강의를 열심히 준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사실
대본에 있는 이 지문 때문이었다.
교양 강의가 진행 중이다. 주인공은 ~~
진행 중인 강의는 당연히 배경이고,
내 목소리 역시 주인공의 목소리 아래에 볼륨 1 정도로 잔잔히 깔릴 것이다.
준비해 준 유인물을 보고 읽으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쉽게 갈까? 순간 고민했지만, 준비한 강의를 하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배우들이 진짜 내 학생들 같았으니까.
"레디, 액션"
유인물을 살짝 읽는 척하다가,
학생들을 보고 얘기했다.
"우리 강의 타이틀이 뭔지 아는 학생? 있어요?"
고맙게도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대본을 열심히 봤나 보다.
"건축의 이해요!"
" 와, 맞아요. 건축의 이해. 여러분은 이제 건축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거예요.
건축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려워 보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 시간에 도면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들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전공 수업이 아니니까요. 대신 우리 주변의 건축물에 대해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여러분이 오는 길에 지나친 버스 정류장, 집 앞 공원에 있던 화장실, 운동하는 체육관 모두 건축물이라는 사실.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서 몰랐던 것들에 대해 한 번씩 생각해 보도록 해요. 그래서 중간고사 과제는..."
몇 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 씬에서 필요한 만큼은 이미 충분히 얘기했다.
하지만 "컷 사인"이 나오지 않는다.
모두 흥미롭게 나의 강의를 듣고 있다.
학생 역할로 책상에 앉아있던 배우뿐만 아니라,
교실 뒤편에 빽빽하게 서 있는 카메라, 음향, 조명, 연출 스태프 모두가 강의를 정말 듣고 있었다.
"컷"
무전기를 통해 옆 방에 있던 감독님의 사인이 들린다.
'오, 끝났구나'
짝짝짝짝!!!
'??????'
현장에 있던 이들의 박수갈채와 함께 웅성웅성대는 소리.
"와, 진짜 강의 듣는 줄 알았어.", "순간 대학교로 돌아간 줄"
정신을 차려보니 강단에 서서 박수를 받고 있었다.
현실의 나로 돌아온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하하하..' 하며 대기실로 돌아왔다.
나의 촬영분은 이제 끝.
지금 뭐가 지나갔나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나 지금 연기하고 박수받은 거지?
의상을 갈아입고 귀가를 준비하며 마주치는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연기 진짜 잘하시던데요."
"크 감명받았습니다."
라고 말해줄 때마다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아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말했다.
지금은 다니고 있지 않지만
연기 학원에서
힘 빼고 연기하면 "독립 영화 연기하면 안 된다"
힘줘서 연기하면 "얼굴 표정이 과하다. 힘 좀 빼라."
같은 피드백만 받아봤던 나로서는
막상 현장에 와서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몇 개월이 지나고,
촬영했던 드라마도 공개가 되었다.
내 강의는 대본대로 주인공 대사의 배경처럼 쓰였다.
당연히 박수 한번 받은 걸로
무명 배우 인생에 뭔가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애매한 나이와 경력에
평범하지 않은 이미지인지라
오디션 지원 기회조차 많지 않은 요즘이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나 스스로를
배우라고 불러도 되는가? 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럴 때마다 이 날의 기억을 떠올려야겠다.
충분히 나는 쓰임이 있는 배우이고,
언젠가 그 쓰임이 더 커지고 빛을 발할 것이라고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말이다.
오늘도 나는 배우로서의 여정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