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의 대구. 목련꽃 같은 말투를 닮고 싶어서 목련 카페 ‘어노잉’를 찾아 느닷없이 왔다. 카페 목련 다 지고 몇 송이만이 어둠 밝히고 있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일 커피 대신 마지막 목련꽃송이 뜨겁게 우려 마시면 목련의 언어를 가질 수 있을까
1899년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담쟁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청라언덕 오른다. 저물녘이면 남편의 보고픔이 수국처럼 부풀어 올라 더 진저리 쳐지는 그리움이 있다고 말하던 푸르던 날의 그 애. 지금도 둥실 떠오르는 달처럼 남편을 향한 그 마음 담쟁이넝쿨 벽을 타고 오르고 있을 그 애를 생각하며 ‘동무생각’ 노래비까지 왔다.
두께 있는 고요함 속 노래비와 수수꽃다리 사이에 있다. 서문시장 입구부터 들고 온 딸기주스와 내가 이루고자 한 맛의 간격은 어떤 깊이가 있을까. 첫사랑 그 뒤 짝사랑. 수수꽃다리 잎에서는 무슨 맛이 나는지 알려주는 사람 없어 직접 씹어봤다는 작곡가 박태준. 지금은 이파리 대신 하얗게 핀 꽃향기 청라언덕을 물들고 있다. 노래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살과 꽃향기에 취해서 휘청거리다 듬성듬성 지나는 여행자들에게 양보하고 일어선다.
동산의료원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100주년 기념 종탑과 대구 능금의 효시 3 세목 역사를 읽다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사과나무’를 모작하던 지난 시간과 만난다. c-19로 움츠렸던 나에게 다른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 느닷없이 나선 길에서 선교사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은 새로움이다.
휴관 중인 선교박물관 입구 동백꽃 피고 지고 경계가 없이 꽃 물든 마음 깔아 놓고 살포시 나온다. 진 꽃 오래 바라보는 것은 슬픈 일이라서. 그대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붉어지다 가는 계절로 남겨두는 것.
담벼락 담쟁이 줄기 밀착하고 수만 개의 잎을 이끌고 갈 날 기다리듯, 내일을 향해 가는 나는 3.1 만세 운동길 계단 타박타박 내려온다. 대구 최초 서양식 건물로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계산 성당 종탑이 주는 위엄에 미묘한 감정이 서성이게 한다.
냉담 중인 나는 또 다른 냉담을 낳고 김원일 작가의 ‘마당 깊은 집’ 스며든다.
입구에 작품 속 배경과 등장인물의 골목 담 벽화와 대문 들어서면 아담한 마당이 편안함을 준다. 전시관은 마당 깊은 집 모형, 등장인물 소개, 50년대 대구 풍경과 생활사진, 길남이네 방, 작가의 방과 기증품이 전시되어 있다.
근대화 문화골목 어슬렁어슬렁 골목이 말을 걸어온다. 어디에서 온 누군지 이름은 묻지 않겠다고 혼자 말은 오래 씹으면 질겨지니까 누구든 같이 다니라고 한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추억이 아니라 기억일 뿐이라 한다.
일본에 국권을 찾고자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서상돈의 고택 입구 외국인 친구들 전통놀이 중이다. 팽이가 잘 돌지 않는지 무한 반복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팽이채로 때려야만 돌아가는 팽이의 통증이 왠지 나를 닮은 것 같아 돌아선다.
고택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축소 복원되었다는 고택 내부에는 서상돈이 작성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청마루 뒤주 위에 서상돈 사진은 고무신 신고 막 외출할 것 같은 표정이다.
평론가 김현은 ‘현실 인식이 현실 밖이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극단적인 탈출 욕구를 낳는다면서 이상화의 시를 식민지 초기의 낭만주의적 성격의 한 상징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살았던,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고택 앞마당 엄마와 아이의 대화는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어린 꼬마에게 시인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상화 고택 옆 계산예산은 일제강점기가 연상되는 인력거에 여자 친구 태우고 남자친구는 주변을 이끌고 있다. 깔깔거림이 담장을 넘고, 관광안내소 앞 이상화 시인 모습 탁본하여 에코 백에 넣으며 모퉁이에 또 다른 그리운 것들 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