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금

-전주

by 김민재

감당하기 어려운 그래서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오늘, 의미 없는 걱정으로 채우는 시간들이 무의미할 것 같은 오늘.


한옥마을 숙소 ‘홍란미덕’ 툇마루에 앉아 경화를 기다리며 영국의 비평가 올비아 랭의『외로운 도시』한 페이지 “지금 외롭다면 이건 당신을 위한 책이다” 이 한 문장에 매달려 있다.


봄볕이 고소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활자인지, 머릿속이 뒤엉켜 마음을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누군가 다정하게 나를 쳐다본다면 햇볕에 내놓은 버터처럼 녹아버릴 것 같은, 그러나 다정하게 쳐다봐 줄 사람 없는 뜨락 장독대 위 수수꽃다리 보라보라, 금잔화 노랑이 그렁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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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란미덕

한옥마을 ‘홍란미덕’ 예약할 때부터 궁금했던 숙소 상호. 홍란 엄마와 딸 미덕 일까? 아님 미덕 언니와 동생 홍란일까? 이름은 분명한데 조합이 안 된다. 서까래에 매달려 있는 전등과 전선처럼 엉키는 즐거운 생각들은 여행이 주는 여유.


46년 된 한옥으로 전 주인이신 어르신의 사 남매 이름 한자씩 따서 붙여진 기운이 좋은 집이란 사장 아가씨의 설명에 의문이 풀린다. 지금은 엄마와 딸이 운영하는 작고 아담한 한옥 툇마루에 앉아 햇볕과 노닐고 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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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동 예술인 마을

이른 아침 공기가 차갑다. 시린 손 비벼가며 남천교 위에 세워진 청연루에서 바라보는 전주천 변의 수양버들 연두가 물빛을 베끼고 있다. 자동차 바퀴가 바람을 가르고 내 발자국이 소리를 비켜가며 만나는 곳.

서학동 예술인 마을 모든 상점들이 아직은 입 다물고 있는데 오직 내 코를 자극하는 떡집만이 눈을 뜨고 냄새로 인사를 한다.


쭉 뻗은 길 좌우로 외관을 예쁘게 장식한 갤러리와 공방, 카페, 게스트하우스, 이발소, 쌀집, 세탁소의 옛 간판과 함께 구부러진 골목 사이로 일반 주택 어우러져 사이좋게 이야기를 꾸며가고 있다.


복사꽃 휘어지는 길 돌아 촌스러움이 녹아 나와 어제와 오늘이 함께 공존하는 그래서 일상이 의도하지 않은 추억으로 연결되는 곳. 그 길 따라 쭈욱 싸전다리까지 걷는데 출근하는 바쁜 발걸음에 신호등이 색을 입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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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시장

오전 6시에 장을 열고 9시면 파장이 되는 매곡교와 옛날 이 다릿목을 끼고 좌우로 쌀가게들이 있어 붙여진 싸전다리 사이 천변에 형성된 노천 반짝 시장.


좌판에 깔린 시골 아낙들의 이야기가 묻어나는 야채들이 말을 건다. 싱싱한 풋마늘이 열무가 쪽파가 값이 싸다며 상인보다 먼저 검정 비닐봉지가 푸드덕거린다. 그러나 동트기 전 카메라만 덜렁 들고 나온 지금 주머니는 먼지뿐.


좌판 검버섯 핀 노인의 손등에 내려앉는 햇살과 물 위에 뜬 태양이 오리와 노닐고 있는 매곡교 지나 남부시장 입구. ‘전주 3.1 운동 발상지’ 표석이 시장 상인들의 말소리가 3.1 운동 당시의 함성으로 들리듯 하여 잠시 숙연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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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고려 우왕 6년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자신의 고조부인 목조가 살았던 이 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하였다는 오목대 오르는 데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한옥마을.


하늘 향해 살짝 휘어진 팔작지붕들 닿을 듯 닿지 않는 너와 나처럼 곡선을 이루며 한옥의 멋을 자랑하고 있다. 빌딩과 한옥이 조화를 이루며 그려내는 풍경화 한 폭.


고종 황제가 친필로 썼다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 비문의 비석 앞 까치 한 마리 아장아장. 까치가 나를 관찰한다. 나는 까치를 외면하고 자만 벽화마을 가는 길목, 명자 아가씨 볼 빨갛게 웃고 있다. 시인들이 쓴 명자꽃 시어들이 꿀벌로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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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미술관

옛 백양 메리야스 공장 부지에 움직이는 다리가 되고자 했던 설립자의 뜻을 담아 소통의 통로인 교동. 2007년 4월 문을 교동 미술관은 작가와 대중이 서로 소통하며 작가들에겐 참신한 작품들이 창조되는 공간으로, 일반인들에겐 문화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어주는 공간을 모토로 도시재생 차원에서 그 시절 옛 공장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는 안내 표지판.


1층 전시실 김미소 작가의 SAME SAME의 작품을 감상하다 ‘호기심’이란 작품이 다가온다. 오목대에서 나를 관찰하던 까치 녀석이 생각나서 한참을 그 작품 앞에 있었다. 그래 호기심. 나도 까치도 서로 호기심으로 바라봤던 거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에너지의 율동,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과 그 안에서 형성되는 교집합 속에서 일상을 담아내고 싶었다.”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까치도 나도 세상의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라는 외톨이기를 자처하는 나를 질책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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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_수정됨_수정됨_20210401_104101.jpg 호기심


수정됨_20210401_103921.jpg 우리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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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제 저수지

벚꽃터널 지나 청명한 하늘이고 달린다. 꽃비 날리고 있다. ‘꽃은 거울이다.’ 함민복 시인의 표현처럼 내 모습은 반영되지 않지만 꽃을 바라보면 내가 꽃인 듯 환해지고 닫힌 마음까지 열어주는 향기와 빛깔들이 꽃들에게 있기에 ‘꽃은 거울이다’에 공감하며. 꽃이 주는 행복.


내 혈관 속에서 4월이 노래를 부르고 봄의 유혹이 공기 속을 떠다니다 도착한, BTS가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 유명해진 완주 오성제 저수지. 몇 년 전 이곳 '오스 갤러리' 카페에서 여고동창들과 함께하였던 웃음소리가 이명으로 들린다.


‘오성 다원’ 잔디마당 지나 야외 흔들의자에 앉아 경화와 둘이서 바라보는 카페 ‘라온’은 햇볕에 익어가고 나뭇가지 수줍게 아기 손 펼치고 있는 연두는 눈앞에서 아른아른.


여기, 오늘, 지금, 멍 때리기.


공지영 작가는『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산다는 건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같다고,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영영 행복은 없는 거라고.’고 한다. 우리도 오늘 자연이 주는 여유로 등짝에 한기가 오싹하도록 오성제 저수지에 산 그림자처럼 떠 있었다. 바람 알코올로 인해 행복한 봄날이 오렌지 빛으로 얼큰하게 취해간다.


우리의 허기진 저녁은 화심 순두부찌개로 마음속 깊이 붉은 물들이고 벚꽃 난사하는 아중저수지 에돌아 온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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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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