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카페 탐구생활 1
카페를 좋아한다. 카페의 음악을, 카페의 커피와 다양한 차들을, 소소히 부려보는 여유를, 함께 차를 마시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카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한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라도 카페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밖은 뭔가 특별함이 있다. 마치 카메라 렌즈로 들여다보는 세상처럼.
제주의 카페를 좋아한다. 밖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집이나 높고 낮은 소박한 오름의 형상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잔을 좋아한다. 창밖으로 파란 물결과 검은 돌이 펼쳐진 제주 바다가 보이기라도 하면 내가 멀리 떠나온 것이 실감 난다. 공간의 변화가 주는 힘은 큰 것 같다. 아무튼 제주 카페에는 제주만의 독특한 창밖 프레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느긋한 고양이가 오랜 낮잠을 자는 곳이기도 하고, 오래된 LP의 따뜻한 음색이 커다란 스피커로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고, 뭔가 상큼함이 감도는 스페셜티를 맛보는 곳이기도 하고, 잔뜩 흐린 날의 구름마저 달콤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들은 아마도 내가 제주 카페를 더욱 좋아하게 하는 장치들이지 싶다.
그런 이유들로 제주에 가면 매일 식당에 가듯, 관광지 한 두 군데를 가듯 매일 카페 한 두 군데를 꼭 탐구한다. 그렇게 제주 카페탐구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의 탐구는 과학적이라든지 객관적인 것과는 거리는 멀다.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나와 카페와의 인연 등을 탐구하는 아주 사적인 탐구생활임을 미리 명명해 둔다.
아일랜드 조르바는 제주에 갈 때마다 들리는 곳이 되었다. 이는 제주 북동쪽 구좌읍 평대리 바닷가의 작은 집을 카페로 개조해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주는 곳이다. 원래는 월정리에 터를 잡았다고 했던가. 아무튼 나의 첫 탐구는 평대리였으므로 평대리의 아일랜드 조르바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첫 탐구의 시작은 2015년 제주 한달살기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우연히 한달살기 할 집을 구한 곳이 평대리 작은 해변가였는데 지내면서 보니 그곳은 사부작사부작 산책 다니기 좋은 마을이었다. 동네 산책을 다니다 보면 이곳이 카페인지, 식당인지, 그냥 평범한 가정집인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수수한 가게들이 많았다.
아일랜드 조르바도 그런 곳 중 하나였는데 가게 앞의 작은 간판을 찾아 읽은 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그 시절 한창 인기 있었던 <수요 미식회>라는 프로그램에 이 카페가 나온 이후로 사람들이 꾸준하게 찾아온다고 했다. 나는 그곳의 커피가 궁금해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초1이었던 딸과 함께 방문해 보았다. 그날은 태풍 예보가 있었던 날이라 잔뜩 하늘은 흐려있었고 몇몇 파도들은 방파제를 넘어 차도로 쏟아지곤 했다. 그런 날은 집에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그곳에 가고 싶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들렀던 것도 같다. 아무튼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향긋한 커피 향기 너머로 바로 오픈형 주방이 보이고 주방 건너로 작은 방이 두 군데 나누어져 있었다. 방 하나에는 좌식 테이블이, 다른 하나의 방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우리는 책상이 있던 방에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책상엔 낮은 책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내가 좋아하던 어느 시인의 시집이 꽂혀있었다. 나는 시집을 꺼내 들고서 코코아가 나오길 기다리며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는 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차가 나왔고 조용한 사장님이 내려주신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다정한 시집을 뒤적이며 나는 한없는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밖은 낮이었지만 잔뜩 흐린 구름으로 저녁같이 어둑어둑했고 센 바람에 나무들이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없이 고요했다. 밖의 상황과 완전히 분리된 채 커피와 딸의 그림과 시집의 낱말들만의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그때의 고즈넉하던 평대리 시골집의 카페 공간을 잊지 못하고 평대리에 갈 때마다 그곳을 찾아가고 있다. 어릴 때 할머니집에 온 것 같이 작은 방에서 꼬마였던 나의 딸과 함께 마셨던 따뜻하고 쌉쌀하던 그 커피의 맛이 이따금씩 생각났으므로.
그러다 코로나로 일상이 마비되었던 몇 해를 거르고 오랜만에 아일랜드 조르바에 갔더니 옛 시골집 카페가 달라졌더라.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오래된 가수의 노래가 카페를 채우고, 노랗고 세련된 소파와 윤기 나는 원목 테이블과 좀 더 심플하고 세련된 오픈 주방으로의 변신. 그립고 기대하던 것이 바뀌면 대게는 아쉽고 서운한 감정이 밀려드는데 이날은 뭐랄까. 바뀌어도 괜찮다고, 더욱 잘 어울리는 옷을 입은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다. 뭐 그런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보름살기, 여전히 머무는 숙소는 평대리다. 평대리에서 평대리로 나의 10년간 제주 사랑은 그렇게 이어지고, 그 중심엔 이 카페 아일랜드 조르바가 있어왔다. 나는 아일랜드 조르바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 되어 공간과 음악을 담으며 오래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한 여름에 따듯한 커피를 앞에 두고 그 옛날 사색에 잠겼던 날처럼 오롯이 공간을 누리면서. 이래 봬도 꾸준히 이곳을 찾는 단골인데 사장님은 아마 나를 모르시는듯했다. 사실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않는 그런 단골손님이 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다. 나는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이곳을 조용히 방문할 수 있는 명분 하나를 챙겨두고 카페를 나섰다.
오늘 카페 두 군데를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카페 탐구 생활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해야 할 듯싶습니다. 다음 카페 탐구 생활은 고양이가 있던 카페입니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는 못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만나는 고양이를 무척 좋아한답니다.
아무튼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행복한 밤 보내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