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웠던 제주 백패킹 1일 차
새벽에 일어나기는 오래간만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캄캄한 새벽에 사부작거리기. 알람 소리에 뒤척이며 일어나 채비를 하고,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니 차가운 새벽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그 안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설렘을 느끼며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모든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집을 나서는 것에서부터.
겨울 제주도 백패킹. 백패킹을 시작하면서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제주도로 차를 가져가서 오토캠핑은 몇 번 해보았지만 최소한의 짐만 준비해서 배낭을 메고 가본 적은 처음이라 여행 전부터 설레었다. 2박 3일이란 시간 동안 어디를 걸을지, 무엇을 느끼고 담을지 머릿속에서 계획만 세우기 여러 번. 그러다 지난여름에는 한라산을 올랐으니 이번엔 둘레길과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는 테마를 잡고 간단히 박지만 정해두고 출발했다.
차가운 새벽 겨울 공기를 맡으며 익숙하고 그리웠던 설렘을 장착하고 6시 5분 제주로 가는 첫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여행객들로 북적였고 한 시간 후 도착한 제주의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햇살은 따뜻했다.
첫 코스로 고사리 해장국을 든든하게 먹고 어승생악으로 향했다. 한라산국립공원 어리목본소로 가면 윗세오름으로 가는 어리목탐방코스와 어승생악 탐방로 두 개의 코스로 나뉘는데 우리는 이번에 가볍게 어승생악을 오르기로 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윗세오름을 찍고 남벽까지 보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살짝 있었지만 윗세오름은 다음 여정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어승생악은 편도 1.3km 정도로 30분 정도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어 부담 없이 한라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무리 짧은 코스라도 눈이 쌓인 겨울에는 아이젠이 필수다. 우리는 아이젠을 착용하고 천천히 등산로를 올랐다.
어승생악 정상 부근에는 전망대가 있어서 한라산과 제주 시내를 조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맑은 날씨 덕분에 웅장한 한라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고 맞은편으로는 제주시 너머의 푸른 바다와 낮은 오름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제주에서는 멋진 자연 전망대들이 많은데 이곳 어승생악 또한 무척 아름다웠다. 한없이 풍경에 취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한정적인 여행자에게는 언제나 다음이 있는 법. 우리는 어승생악에서 내려와서는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새별오름은 제주 서부 지역의 대표 오름으로 저녁 하늘에 샛별처럼 외롭게 서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새별오름이 가을에 억새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겨울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억새의 물결이 출렁일 줄은 몰랐다. 따뜻한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억새를 보며 오름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새별 오름 정상에서는 제주 서부 해안과 비양도, 그리도 주변의 낮은 오름들이 훤히 보였다. 이번에도 천천히 30분 정도 올랐을 뿐인데 눈부신 제주의 겨울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가볍게 올라도 너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니 제주의 오름은 그 자체로 여행자에게 선물인 듯했다.
제주에 가면 시간을 내서 항상 독립서점을 방문했었다. 이번엔 일정상 방문이 어려울까 했는데 출발 전에 차를 렌트하기로 일정을 바꾼 덕에 책방 소리소문에 들를 수 있었다. 마침 책방이 새별오름에서 가까웠기에 책방에 들러 황인찬 시인의 에세이 두 권을 사서 나왔다. 언제 들러도 책방은 나를 근사하게 맞아준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살펴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무엇이 있다. 언젠가는 내 책도 저렇게 서점에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상상도 해본다:)
다음 코스는 모슬포와 송악산이었다. 렌트한 김에 동선을 길게 잡아보았다. 겨울 제주도 방어가 그렇게 맛나다고 하니 방어의 맛은 봐야 할 듯해서 모슬포에 들러 방어회를 포장하고 휴양림 가는 길에 송악산에 들렀다. 겨울 제주의 남쪽은 차가운 것 같지만 포근한 무엇이 있었다. 겨울 저녁의 해가 금방 기울어서일까 송악산의 수풀이 더욱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송악산에서 약 한 시간을 달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휴양림에 도착하고 짐을 풀고 나니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겨울밤이 시작되었다. 서둘러 오늘의 집을 짓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저녁 준비라고는 모슬포에서 사 온 방어회와 딱새우를 꺼내 캠핑 테이블에 단정하게 차려내는 것이었다. 아! 제주 겨울밤의 방어회와 딱새우는 이렇게 고소하고 달콤하구나! 우리는 천천히 먹을거리를 나눠먹으며 첫날의 소회를 나누었다. 날씨도 좋았고 아름다운 겨울 제주도 좋았고 뭐 그런 즐거운 이야기들.
더욱 즐거웠던 것은 아직 제주 백패킹의 첫날이라는 것, 그래서 하루가 더 남았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첫날보다는 소박하게 마무리되겠지만 좀 더 여유를 부릴 날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넉넉해지는 일이었다. 또한, 저녁을 먹고 간단히 씻고 돌아와 내 한 몸 누일 공간을 선사한 텐트를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밤이 깊어도 이 깊은 숲에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