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30 이정록 <모래의 집>
“방언터졌네, 우리 형님!” 시댁형제 중 막내동생이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시숙을 두고 한 말입니다. 아무리 시댁형제들과 긴 인연을 맺어도, 친정형제만 하겠습니까 마는, 아침 일찍 친정엄마와 형제들과 설날 밥을 먹고 시댁으로 향했습니다. 눈 덮인 시댁 선산의 작은 봉우리들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평온한 그림이었습니다.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께 새해 인사로 기도드리고 점심을 먹었는데요, 함께 마주한 형제들은 그렇게도 좋았던가 봅니다. 그러니 명절을 기억하는 일이 다소 번거롭더라도, 분명코 명절은 있어야 할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긴 명절 연휴를 보며 여행을 꿈꾸지요. 동시에 올 추석 연휴는 얼마동안인지, 또 다른 달의 휴일기간들이 있는지를 보면서 여행계획을 세우더군요. 나이어린 손위 동서는 올해, 저와함께 어디라도 놀러가보는 것이 소망이라네요. 모두 사는 것이 바빠서 결정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가능하도록 생각해보겠다고 했지요.
형제들이 헤어질때도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어서, 서로 안전운행하라는 당부를 하고 왔습니다. 오던 길에 시 하나를 고르는데, <의자>를 쓰신 이정록시인이 <모래의 집>이라는 시도 썼더군요. 시인은 이렇게 하찮아 보이고 당연하게 보이는 존재까지도 시적영감을 넣어 글을 쓰는 구나... 싶어서 타고난 시인의 재주가 멋져보였습니다.
혼자서 있고 싶어서, 책방으로 돌아와 늦은 밤까지, 영상도 보고 책도 보고, 짧막한 글도 쓰고요. 이제는 봄 학기인 3월까지, 꽉찬 2월을 어떻게 보내야 되는지 다시한번 계획서를 살펴보구요. 그런 중에 눈 덮인 배 나무 가지 속에서 숨어있을 꽃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식물학자 지인께서 사진으로 보내주신 꽃이 생각나더군요. 얼음옷 입은 노란 복수초였습니다. 복수초는 제 엄지 손톱보다 작은데요. 완주 대아리 저수지 옆 어느 모퉁이에 피어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보고 싶네요... 오늘의 논어구절은 君子無所爭(군자무소쟁) - 군자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 팔일편 –이구요, 이정록시인의 <모래의 집>을 낭독해보세요.
봄날의산책 모니카.
모래의 집 – 이정록
저는 빙판길 옆 모래 적재함이에요. 그대의 헛바퀴
밑에서 그대의 먼길을 배웅하지요. 삽날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제 생의 전부임을, 그 아픔의 성에를 말하지는
않겠어요. 미끄러지지 않는 삶은 쉬지도 바로 갈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뒤집히거나 굴러 떨어지진 말아요.
돌아오지 않는 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빙판길 저
아래에 쌓인 고운 모래톱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거나
억새꽃으로 피어올라 그대 차창을 흔들 거예요
삼 년 전인가, 무식하게 눈이 내리던 대설 언저리에
여기에서 죽을 뻔했다고, 이 적재함에 바퀴가 걸렸기
망정이지 큰일을 치를 뻔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옆좌
석의 연인에게 자랑하지 말아요. 그대와의 아스라했던
만남을 몸서리치며 냉이꽃을 피워올리는 집 한 채가
있어요. 단칸방 속에서 그대의 삽날 자국을 뜨개질하
고 있는 젖은 실뿌리를,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신 적 있
나요
옆좌석에 있는 그대의 연인이, 나도 저 모래의 집처
럼 어둡다고, 당신의 응달에서 당신의 바퀴 탄 내에 마
음 졸이며 살아가고 있다고, 억새의 새순 같은 하얀 눈
물을 흘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작은 가슴에서 울
려퍼지는 삽날 부딪는 소리, 그 소름 돋는 사랑을 꼭
한 번 확인해보고 싶다면 그건 순전히 그대 맘이지요.
하지만 다시는 눈보라 속 빙판길을 넘어오지 못하겠지
요. 모래의 집 속에서 단 한 번으로 부서지고야 말 서
릿발이, 겨우내 까치발을 딛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대를 향해 피워올렸던 냉이꽃, 그 많던 씨앗들은
지금 어디로 흩어져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