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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Aug 25. 2021

전기장판이 고추건조기라구요?

20201.8.25 기사 73

가을장마라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처서'가 데려왔는지 아침저녁으로 선들거리는 바람 때문에 일교차가 크다. 울부짖던 매미의 사랑도 묻혀버리고 이제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주인장이다. 늦은 밤 귀가하던 우리 부부는 오늘도 고추 얘기로 하루를 마감했다.


올해 텃밭에 심은 고추모는 70여 모, 칠팔월 태풍이 없어서 고추 농사는 풍년이다. 사실 지난번 하지 때 감자 풍년에 이어, 오이, 가지, 옥수수 모두 방울토마토, 모두 넘치게 수확해서 주변 지인들과 많이도 나눴다. 살림의 귀재들이 장아찌 담는 지혜를 알려줘서 올해는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 전, 고추를 두 번째 수확했다. 첫 번째 고추를 엄마에게 드렸더니, 고추를 말린다고 아파트 베란다와 동네 놀이터를 왔다갔다 하셨다. 그나마도 안 좋은 무릎에 동이 났다고 하시니 다음번에는 내가 직접 말려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올해 텃밭의 작물들 풍년은 오로지 남편 덕분이다. 말로는 쉬엄쉬엄 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시시때때로 밭에 가서 심어놓은 작물들을 살피고 보살폈다. 그래서 그런지, 심어 놓은 모든 작물들의 열매는 엄청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우리 부부는 농사꾼이다.


"이번 고추는 내가 직접 말려볼게요. 엄마도 힘들고, 맨날 일거리만 엄마한테 갖다 주는 꼴이니 염치도 없고. 우리 학원 옥상을 이럴 때 써봐야겠어요. 10년이 넘었는데, 난 옥상 한번 올라간 적이 없네. 인터넷으로 보니까, 어떤 사람도 옥상에서 고추를 말렸다고 자랑하더라고요."


수확한 고추는 10kg짜리 상자로 3개 나왔는데, 청양고추도 한 상자나 되었다. 어느새 남편은 모기장을 사 와서 옥상에 널 때 쓰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당일 아파트 쓰레기 재활용 부스에 버려진 채반이 2개 있었다. 고추를 직접 말리려는 나의 의지를 예쁘게 본 신의 선물이리라.


옥상에 올라가니, 생전 처음 본 세상이 있는 듯했다. 하늘도 가깝고, 푸른 베일을 쓴 뭉게구름도 코앞에 있는 것 같았다. 옥상을 한 바퀴 돌며, 아파트로 둘러싸인 이웃들의 모습도 즐겼다. '태양초 만들기 작전!' 발바닥이 뜨거울 만큼 달궈진 옥상 바닥 위에 모기장을 깔고 고추를 널었다. 앙증맞은 채반에는 청양고추를 따로 담아서 보기 좋게 해를 맞이했다.


역시나 고추 말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시간 단위로 오르락내리락, 행여나 소나기가 와서 젖을까, 바람이 불어 날아갈까. 젊은 나도 이런 마음인데, 친정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른 동에 사는 엄마도 일기예보를 전해주며, 몸 따로 마음 따로 걱정을 했다.


태양 밑에 고추를 펼친 지 나흘째부터 하늘이 꾸물꾸물했다. 비바람 일구는 태풍소식에 가을장마 뉴스는 할 일 많은 나의 일상에 안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도 이제 물기가 가시기 시작한 고추를 보노라면, 조금만 더 말리면 되겠지 싶어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학원 수업이 다 끝나면 고추를 학원 실내로 가져와서, 습기 차지 말라고, 밤새 에어컨과 선풍기를 동원했다.


고추 말리기 작전 열흘째, 뜬금없이 남편이 말했다.


"당신 고추 잘 말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네. 과일 건조기는 너무 작으니, 이 방법을 써보세. 아침에 장판 위에서 말린 양말을 보다가 생각났는데, 어떤가. 학원에 있는 전기장판 위에 말려보세. 물기가 이제 없으니, 몇 시간만 따뜻하게 하면 완전히 마를 것 같은데."


전기장판이 건조기라고? 정말 그럴싸한 애기였다. 연 삼일 비가 와서 옥상에 고추를 널 수도 없었다. 모기장으로 싸서 바람이 통하도록 해 놓았다. 과일 건조기로 조금씩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왕에 내가 기른 고추를 고춧가루까지 만들려고 마음먹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꼬득꼬득하게 말려서 고운가루를 만들어야지 싶었다.


비 소식이 계속 있어서 저녁 퇴근을 앞두고 전기장판을 꺼냈다. 고추를 넓게 펴고, 장판의 전원을 켰다. 고추를 널면서 갑자기 우리들이 하는 일이 맞는 일인가 싶어서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퇴근하면서도 '참 별일을 다하네.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다 말라 있을거네'라고 말했다.


새벽에 눈을 뜨니 4시 반. 어디선가 고추향이 날아왔다. 순간 학원에 널어놓은 장판위 고추가 생각났다. 불현듯, 무슨 일이 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몰려왔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학원으로 가는 도중에도 신기하게 고추향이 따라왔다. 한 겨울이면 전기장판 과열 사고가 얼마나 많던가. 10여 분 떨어져 있는 학원까지, 가슴이 요동쳤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학원의 현관문을 여는 손이 떨렸다. 로비에 있는 고추들은 잠잠했다. 장판 위를 만져보니 따뜻한 온기, 다행히 남편이 장판의 다이얼 숫자를 낮게 설정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 고추의 건조 상태가 어제 밤과 달랐다. 시장에서 파는 고추 색깔로 반짝거렸다.


새벽부터 긴장 모드로 하루를 연 내게 안도감이 몰려왔다. 지금 준비하는 시화집의 마무리 원고도 쓰고, 함께 해준 고등학생들의 봉사활동 시간도 입력했다. 일을 하다 고추를 바라보니 새삼스럽게 고추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오늘까지 꼭 끝내야 할 일을 상기시켜주었나.


지금도 비가 온다. 학생들이 오기 전에 말린 고추를 다시 모기장으로 싸서 통풍이 잘되는 곳에 걸었다. 학원에 고추 내음이 퍼져 있지만, 내 맘을 아시는지라 선생님들도 개의치 않는다. 아침의 사건을 직원들에게 전하니, 내 정성 한번 대단하다고 치켜세우고 물어보았다.


"원장님, 그럼 이 고추는 태양초예요? 아니에요? 어쨌든 전기장판이라도 기계가 말린 건데요?"


정말 맞는 말이네. 끝까지 건조기에 안 하고 태양열만 받겠다고 했는데, 이 고추는 태양초일까 아닐까? 내일은 열흘이상 수확하지 못한 고추를 따러 가야겠다. 이제는 고추 말리기 노하우를 알았으니 진짜 태양초 고춧가루를 만들어 봐야겠다. 엄마에게 꼭 자랑해야지. 고추가 내 삶에 이런 재미를 줄 줄이야!


오마이뉴스 http://omn.kr/1uyxg


#태양초고추

#전기장판건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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