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사람이 만들지 않는 것과 사람이 만든 것이 있다고 한다. 바로 '자연과 문명'이다. 자연이라는 드넓은 터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인 문명을 만들었다. 호퍼가 많이 그린 '숲과 집'은 각각 자연과 문명'이 집약된 곳을 상징한다.
호퍼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집 한쪽 벽에 드리운 햇빛을 그리는 것이었다.” 자연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햇빛이 인간이 만든 집(벽)을 만나 음영을 만들 때 미학적인 경험이 찾아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상에 깃든 이런 순간을 표현하는 것이 호퍼의 예술이 아닐까.
호퍼의 <계단> (1949)
인간의 여정, 집안에서 문밖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은 호퍼가 57세에 그린 <계단>이다. 생가 계단에서 본 풍경을 그렸는데, 실제 집 앞에는 강이 멀리 보였고 숲은 상상이다. 집안에서 문밖으로, 문명에서 자연으로, 그렇게 인간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을 호퍼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본 건 아닐까.
호퍼가 사랑했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1922년 <눈 오는 저녁 숲 가에 멈춰 서서>라는 시에서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라고 했다. <계단> 속의 숲은 프로스트의 숲보다 훨씬 어둡고 깊어서, 아름답다기보다는 어떤 심연을 느끼게 한다. 미지의 불가해한 상상과 모험을 떠올리게 한다. 멀리엔 밝은 하늘이 열려 있고 빛은 집 안의 벽까지 드리우면서 유혹하듯 손짓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호기로운 인간의 여정을 시작해야만 한다. 호퍼는 이러한 인간의 숙명, 존재의 본질을 간파함으로써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문명은 사람들의 이야기
문명의 상징인 집, 집이 모인 도시엔 사람이 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호퍼의 작품에는 대개 소수의 사람만이 등장한다. 작품 속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쓸쓸해 보이거나 무표정한 얼굴이다. 더러 뭔가를 응시하거나 골똘히 생각에 빠진 모습이다. 그들은 보는 사람의 흥미와 궁금증을 일으킨다.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호퍼가 보여주는 독특한 서사의 힘일 것이다.
호퍼의 그림에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오늘 우리도 각자의 소소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하나씩 쌓이다 보면 거칠고 광활한 자연 속에서 문명의 역사는 계속 어어질 것이다. 모든 이야기에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