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바뀔 수 있을까?’
첫 제자 중에 유독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녀석이 있었다. 눈은 반쯤 풀려있었고 큰 덩치는 느린 행동을 부각시켰다. 추운 날씨엔 반팔을 입고 더워지니 부츠를 신는 녀석. 다른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녀석이 풍기는 독특한 이미지를 꺼려했다. 수업시간에는 화장실에 가는 일이 잦았는데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교실로 돌아왔다. 오죽하면 '변기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는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 달 동안 녀석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수학 문제는 기똥차게 풀 땐 '혹시 천재일까?' 생각하다가도 '밥 먹고 라면 먹고 고양이 똥을 치워줬다.'는 매일 똑같은 내용의 일기장이나 친구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그 아이를 향했다. 힘껏 격려해주고 싶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자연스레 말을 걸고, 일부러 발표를 시키고, 쉬는 시간엔 하이파이브를 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한 학기가 지났을까? 녀석의 변화가 시작됐다.
수업시간에 스스로 발표를 하더니, 녀석이 하는 말에 다른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궁금증을 가지고 녀셕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넌 왜 맨날 고개를 흔들면서 걸어다니는거야?“
”오늘 더워 죽겠는데 왜 부츠를 신고 왔어?“
점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가는 녀석을 보니 흐뭇했다.
그렇게 1년, 녀석의 풀린 눈동자가 상당히 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더 이상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가지 않게 되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녀석을 한 학년 위로 떠나보냈다. 간혹 복도에서 마주치면 몰래 헤드락을 걸었다. 애정표현이었다.
스승의 날, 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져버린 몸집과 함께 녀석이 수줍은 모습으로 편지를 들고 왔다. 매일 일기에 '라면을 먹고, 고양이(생각났다. 이름은 가등이) 똥을 치웠다는 것' 밖에 못쓰던 아이가 한 장 빼곡히 편지를 써왔다. 이젠 감동을 주는 방법을 아는 녀석이 된 것이다.
교사가 된 후에 은사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교직만큼 투입 대비 효과를 보기 힘든 직업이 없어."
그 아이 덕분에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누군가의 변화를 위해 투입하고 있을 간절한 마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