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할 때

도망치지 않길 잘했다.

by 식이타임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던 길,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집 불났어!”

“뭐? 얼마나??”

대답도 듣지 못하고 달려갔다. 집 앞엔 소방차가 줄지어 있었다. 뉴스에서나 짤막하게 보던 화재사건이 우리 집에서 일어난 것이다. 불타는 우리집은 뉴스 한 켠을 차지했다. 엄마는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아빠는 울지 못했다. 불이 꺼지고 우리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각자가 입고 있는 것들 뿐이었다.


이웃집 할아버지의 배려로 작은 셋방에서 살게 되었다. 부랴부랴 마트에서 생필품을 샀다. 일단 당장 갈아입어야 할 속옷이나 양말을 사는 게 우선이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니 다음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루하루를 꾹꾹 참아내길 며칠이 지났을까, 점점 셋방살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쉬고 계시는 아빠와 그 옆에서 과일을 깎아주시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잃은 건 아니었다.


새까맣게 탄 집이 조금씩 치워지고 한 달 뒤 리모델링이 완성됐다. ‘불 난 게 다행이네?'라는 생각까지 들만큼 새로운 집은 마음에 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10년을 더 살았다.


성인이 된 나는 우리 집에 불이 났던 이야기를 마치 자랑인 냥 늘어놓곤 한다. ‘누가 이런 경험을 해봤겠어!’ 그때는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이었으나 이겨낸 뒤엔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남았다. 어쩌면 나를 가장 단단하게 성장시켜준 순간이 아닐까.


여전히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은 날 찾아온다.

그래도 나에겐 승리의 방정식이 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치지 않는 것이다.

<우리집 담벼락, 떠나 기 전 여름 뜨거운 날 찍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어떤 결심,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