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뭐라고 이 말 하나 듣자고 나는 나의 소리도 듣지 않았었나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길 중에서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는 길을 걸어오며 생각했다. 오늘도 잘 보냈구나. 오늘도 잘 살아남았구나. 어느 순간부터 삶이란 살아남아야 하는 일종의 전쟁터 같아만 졌다. 일에서 살아남고, 사람에게서 살아남고. 그리고 나는 외면하고 있던 또 다른 나의 적, 나로부터 살아남는 것.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남았다.
일터에서의 나는 인정받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너 없으면 안 돼.” “너 없으면 여기가 돌아가질 않아.”
이 말을 듣는 것이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만 같아서, 동료가, 상사가 그렇게 말이라도 해주면 지쳐 무너질 것 같은 몸뚱이를 다시 잡아 들 수 있었다. (그런 것만 같았다.)
진한 갈색의 커피 한 잔을 서로의 손에 들고 있었다. 일터에서 손에 든 종이컵 한 잔의 믹스커피는 중립을 의미한다. 자동차의 중립 기어. N. 지금은 일할 수 없다. 지금만은 일하지 않는다. 어차피 몇 분이잖냐. 조금만 숨 좀 돌리자. 정전협정을 한 어떤 나라와 어떤 나라들 처럼, 종이컵 한 잔 속의 커피는 맛이 없어질 마지막까지 버티다 마셔야 한다. 이 잔을 다 마시고 나면 다시 일어서야 하니까, 다시 일터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하니까.
한 잔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담당 과장이 이런저런 보고서를 잔뜩 들고서 들어섰다. 그는 나와 팀장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우리의 손에 쥐어진 커피잔을 보고서는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문을 열면서 가슴께까지 올라왔던 서류뭉치는 다시 그의 둔치 까지 내려가 주변 아무데나 놓아졌다.
“어? 그러고 보니 연월차를 한번도 안 썼죠?”
과장은 사무실에서 기록을 정리해서 분기보고 자료를 만들다 특이한 점을 봤다고 했다. 분기 동안 한번도 일을 쉬지 않은 사람. 신기해서 자료 기간을 늘려서 확인해 보니 일하는 동안 연월차를 한번도 쓰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일이 그렇게 좋으냐.
“딱히...” 딱히 일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 했을 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낮이었다면 산책을 나온 사람들, 공을 던지고 차며 노는 아이들. 여기저기 마트며, 식당이며, 용건을 보러 돌아다닐 사람들. 해가 떠 있는 동안 가득 돌아다닐 그 모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시간. 나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달보다 밝아 달을 가리는 가로등으로 밝디 밝았다. 집으로 오는 길 동안 과장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뭐가 그리 좋다고 일만 하고 이렇게 지냈던가. 나는 일이 그렇게 좋은가.
그렇게 생각이 생각에 물고 물리다 행복이라는 어떤 단어에 도달했을 즈음, 나는 우리 집 건물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첫 버튼을 누르는 순간 켜진 현관의 조명등 불빛에, 주차장 한 켠에 세워져 있던 누군가의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넘어져 있는 자전거. 평소에는 주차장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세워져 있던 누군가의 그 까만 자전거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저렇게 넘어져 있다.
분명 저 자전거도 어디 애매하게 먼 곳에 다녀오려고 할 때엔 귀중한 교통수단으로 대접 받았을 텐데. 이 자전거가 없었으면 한참을 걸을 뻔 했어. 요즘은 날씨도 더운데 걸어서 이 먼 길을 걸었으면 얼마나 더웠겠어. 자전거를 타고 와서 바람이 너무 시원했어. 그랬어, 그랬어. 그렇게 좋은 말, 칭찬 많이 들으며 지냈겠지. 그러다 자전거 주인이 어느 즈음, 아주 먼 곳만 다니거나, 아주 가까운 곳만 다니다 보면 저렇게 넘어진 채로 하루가 지나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내버려둬지는 것이겠지.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 전, 집에 오는 길에 떠올려 버렸던 행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다가 넘어진 자전거를 떠올리곤 가슴 속 깊숙이에서 무언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되겠다. 내일은 좀 쉬어야 겠다.”
내일부터 애써 쉬어야겠다. 잘 쉬고, 잘 먹고, 잘 놀아야 겠다. 나를 위한 시간을 애써 내어봐야겠다. 이젠, 좀 재밌게 지내봐야겠다. 일만하고 쉬지도 않는 게 나라면, 놀고 쉬는 것도 지시를 내려봐야겠다.
"내일은, 좀 놀아보세요. 피곤하다고 아무것도 못한 채 죽은 듯이 숨만 쉬지 말구요."
잘 행복해 보세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