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운명에 대하여

인생은 아름다워, 데몰리션

by 조융한삶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감정이 메말랐냐는 말을 들었다. 억울하진 않았지만 조금 쓸쓸했다. 감정이란 강요될 수 없으며, 거짓 눈물은 진실을 더욱 추악하게 만든다.



-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화자는 자신의 출신을 감추지도, 포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내뱉는다.



-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듯, 나 역시 가족애라는 집단적 의례를 반기지 않는다. 사회는 나를 냉혈한으로 규정하겠지만, 강요된 관심보다 정직한 무관심이 더 진실하다.


영화 <데몰리션>에서 주인공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사회는 그의 무감각을 비정상으로 여기지만,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감정까지 표준화된 세상. 부모를 사랑해야 하고, 고향을 그리워해야 하며, 가족사진을 보며 미소 지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당연함'은 특정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일 뿐이다.



-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가치들은 대부분 문명이 만들어낸 인위적 구조물이다.


가족이라는 관계도, 효라는 신념도, 부모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다는 믿음도 모두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생성된 의미 체계다. 이생에서의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다.


강요된 신념의 족쇄에서 벗어나 고유한 감정의 지형을 탐험하고 싶다. 그러려면 서정주가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고 선언했듯,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적 규범을 거부해야 한다.



-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미워할 필요가 없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에 휘둘리지 않고,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우연에 매이지 않은, 자발적 선택에 기반한 연대가 더 의미 있으니까.


내 감정의 사막에도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최근 스승님의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심 어린 유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가족에게 느끼지 못하는 애정을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감정의 결핍이 아니라 감정의 재배치.


서정주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고백했듯, 나 역시 사회가 정해준 길이 아닌 내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해왔을 테니까.



-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 없다고 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고 해서, 효심이라는 전통적 덕목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우리는 각자의 감정 지형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모든 존재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잠시 머무르는 의식의 파동이다. 가족이라는 형태도, 효라는 가치도, 사랑이라는 감정도 모두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그 현상들에 매여 자신을 규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제 내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결코 틀리지 않았으니까.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울지 않았던 날, 나는 극장 밖에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었다. 내 방식의 아름다움. 서정주가 "병든 수캐마냥 헐덕거리며" 살아왔다고 고백했듯, 나 역시 내 방식으로 헐떡이며 살아갈 뿐이다.



월요일 연재
이전 05화예술가라는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