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이 머무는 순간들

by Liar

8장.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이 머무는 순간들


분명 아무 일 없던 하루였다.

눈에 띄는 장면도, 특별한 대화도 없이 흘러간 날.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자꾸만 같은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어떤 페이지를 덮지 못하고 계속 머물러 있는 것처럼.

햇살은 있었지만 이상하게 기운은 들뜨지 않았다.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조금 느리게 움직이는 기분.

이어폰에선 음악이 흘렀지만, 가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마음속에 작은 무게가 걸려 있던 그런 날이었다.


그날 오후,

카페에 들르기 전 골목 어귀 작은 슈퍼 앞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회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

안쪽으로 보이는 목이 살짝 늘어난 티셔츠 끝자락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닥엔 페트병 몇 개가 굴러 있었고,

작은 잡지 자판대 너머로 먼지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고요한 사람이었고,

마치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숨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왼손엔 작은 캔 음료를 쥔 채 뚜껑을 따기 위해 몇 번이나 손끝을 맴돌고 있었다.

별것 아닌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는 어딘가 서툰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마치, 그 하루가 너무 고단해서 캔 음료 하나에도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를 스쳐 지나왔지만 그 모습이 이상하게 내 마음에 남았다.

차마, 그 자리에서 오래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버렸다.


며칠 전엔 퇴근길 차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옆차로 버스 창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무릎 위에 얹힌 손엔 핸드폰이 있었고, 손은 멈춘 채 그대로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고, 움직임도 거의 없었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눈에 보이지 않게 퍼지고 있었다.

숨을 참듯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사실 어떤 울음보다도 더 조용하고, 더 아팠다.

나는 그 순간,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마음 한편이 길게 묶이는 기분을 느꼈다.

묶이고, 잠기고, 천천히 젖는 감정.

이상하다.

나는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그들과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들의 마음 한 귀퉁이를

어렴풋이 읽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마음에 걸렸다.


종종 그런 장면을 만난다.

표정 없는 얼굴인데

표정이 다 읽히는 사람, 말 한 마디 없는데 속이 다 들리는 사람.

우리가 기억하는 건 늘 특별한 말보다,

이렇게 스쳐간 얼굴 하나,

조용히 흔들리던 손끝 하나,

불 꺼지기 전 창밖에서 맴돌던 그 기척들이다.


무심히 지나친 장면이었는데, 하루의 끝에서 가장 또렷하게 떠오른 건 그 순간뿐이었다.

그 사람을 떠올릴 때면 나도 모르게 숨이 깊어지고, 마음이 조용해진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쉽게 잊지 못한다.

단지 마주쳤을 뿐인데 내 마음이 그 사람 곁에 잠시 앉아 있었던 것 같아서.

말하자면, 그건 관찰이 아니라 감정의 투명한 공명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마음속에 하나의 장면을 담아두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닐 그 순간이 내게는 어쩐지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 적는다.

그냥 지나쳤지만 내 마음은 거기 잠시 머물러 있었기에.

그건 어쩌면, 삶의 가장 조용한 방식의 연결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이, 다 괜찮은 척 지나쳐야만 했던 나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지 못했지만, 대신 이렇게 조용히 그 순간들을 꺼내 적는다.

그건 그들을 위한 기록이자, 나 자신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 같기도 하다.

화,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