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1. 기억에서 사망 하였습니다
작전은 성공했다. 그 누구도 건우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병원 시스템은 윤섭이 삽입한 루프 코드 덕분에 여전히 건우의 심정지 이후 데이터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고,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마지막 문장은
‘복구 불가.’
수진은 사전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책은 침묵했다. 이상할 정도로, 무기력하게. 그녀가 책장을 넘겨도, 창문 아래에 펼쳐 두어도, 사전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진짜로, 건우란 존재가 세계에서 지워진 것처럼.
“됐어...”
수진은 조용히 중얼였다.
“됐다고...”
그날 밤, 폐창고의 문을 나선 건우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윤섭이 만들어준 가짜 이름으로 지방의 작은 모텔방 하나를 얻었다. 허름하고 습기가 찬 방. 낮은 천장과 금이 간 벽지, 한기가 올라오는 매트리스 위에 앉아 그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사전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감시자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해방감을 느꼈지만, 곧 그 자유는 고립으로 변했다.
밤이 되면 방 안이 너무 조용했다. 건우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손가락으로 천천히 써내려갔다.
“나... 건우다.”
그와 수진의 연락은 하루에 한 번, 암호화된 메신저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전은 여전히 무반응. 현재 5일차.]
[윤섭, 사전의 패턴과 유사 사례 조사 중.]
건우는 단 한 줄만을 보냈다.
[접근 준비 중.]
그 무렵, 윤섭은 사전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해외 기록을 뒤지고 있었다.
영국, 독일, 체코 등지의 고문헌 아카이브, 오컬트 관련 문서,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의 깊은 뒷페이지까지... 수진이 촬영해 전달한 사전의 페이지 레이아웃, 텍스트 형식, 코드와 인쇄 방식 등도 기준 삼아 비교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놀라운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1993년 체코 프라하의 한 지방도시 도서관에서 회수된 ‘이름 없는 노트’.
사용자는 ‘카롤 그레멘’이라는 언론인이었다.
윤섭은 메일을 통해 해당 문서 관리자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며칠 뒤 온라인 화상회의가 성사되었다. 화면 속, 나이가 지긋한 한 외국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 노트를 기억하는군요. 예, 저도 직접 다뤄봤습니다.”
그레멘은 당시 ‘노트’를 단순한 일기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페이지 하단에 특정 문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문장을 ‘은유’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따라 행동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그 모든 행동은 기사로 대성공을 안겨줬습니다. 인터뷰, 폭로, 독점 취재... 전 유럽 언론에서 가장 빠른 손이 되었죠.”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가, 이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그녀를 잃어야 한다.’
그레멘은 아내와의 여행을 미뤘고, 그 주에 아내는 폭우로 인해 실종되었다.
“전 그때 직감했어요. 이건...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가로 얻은 지식이었죠.”
그리고 그 노트는, 어느 날 그레멘이 직접 배를 타고 나가 깊은 바다에 가라앉혔다고 했다.
“아무도 꺼내지 못하도록.”
윤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사전의 스캔본이 유독 무거워 보였다.
“그게 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뤄선 안 되는 종류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아직... 저는 그 노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윤섭은 그날 밤, 수진과 건우에게 그 내용을 전달했다.
“건우. 넌 지금 사전 바깥에 있어. 그러니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는 거야.”
화창한 오후였다. 수진은 병원 사무실의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 열흘째.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듯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환자 관리 프로그램에서 경고창이 떴다.
[환자 기록 없음: 박건우 / 환자번호: 1246783 / 상태: 불명]
“...뭐지?”
수진은 눈을 찌푸리며 키보드를 다시 눌렀다. 환자 이력 검색, 진료 기록, 영상 검사, 모두 ‘데이터 없음’으로 표시되었다. 단순 오류인가 싶어 병원 전산팀에 연락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 이름으로 된 환자 정보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요. 최근 서버 점검 때도 건드린 적 없는데 이상하네요.”
말을 마친 직원의 목소리는 어딘가 불편하게 흔들렸다.
수진은 말없이 전화를 끊고, 의무기록실로 향했다. 철제 서랍을 열고 건우의 차트가 있었던 구역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마치 애초에 채워진 적 없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책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건... 삭제가 아니라, 말소야.”
한편 윤섭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건우 관련 로그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외장하드에 저장해두었던 영상 통화 파일, 건우와 나눈 암호화된 텍스트 파일, 사전 사진들까지 모두 철저히 백업해뒀다고 생각했는데, 파일 대부분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백업 프로그램을 열고 복구를 시도했지만, 파일명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전부 0kb로 초기화되어 있었다.
윤섭은 전날의 CCTV 영상을 확인하려다 손을 멈췄다. 병원 외부와 연결된 백업 서버에 접속이 되지 않았다. 관리자 권한 로그인을 시도하자, ‘서버 응답 없음’이라는 문장이 반복되었다.
한기 섞인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그는 오래된 사전의 스캔본을 다시 열어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PDF 파일이 아닌, 이미지 파일 하나가 덮어씌워져 있었다. 검은 배경에 흰 글씨가 떠 있었다.
“기록은 살아있지 않아. 기록자는 죽었을 뿐이다.”
윤섭은 손끝이 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도 접속할 수 없었던 그의 단독 서버였다. 그런데,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손을 댄 것이다.
“...이제는, 정보마저 사라지게 만드나.”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책상 서랍에서 자물쇠가 걸린 작은 노트를 꺼냈다. 종이에 직접 쓴 것만이 마지막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수진은 병원 내 회의실에서 동료 의사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
“근데... 예전에 우리 병원에 ‘박건우’라는 환자 있었어? 응급실 수술 기록에도 없어. 그냥 내가 착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 이름이 익숙해서.”
수진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장 개인 사물함으로 가 노트북을 꺼냈다. 거기에는 건우와 나눴던 메신저 로그 일부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열자마자, 창은 깨진 문자와 이상한 코드로 채워져 있었다.
[#%$&@...]
[네가 기억하는 모든 것은 곧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손가락이 떨리는 채로 메신저 창을 닫았다.
모니터는 꺼졌지만, 눈앞엔 여전히 그 문장이 맴돌았다.
가슴 속, 차갑게 얼어붙은 기억 하나가 바스라지는 듯했다.
건우는 살아 있었지만, 세상은 그를 다시 한 번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번엔 ‘존재조차 없던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 책이 있었다.
수진은 다시 사전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쳤다.
페이지는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한 장, 또 한 장 넘어갔다.
그중 한 면. 마치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먹으로 새겨지지도 않은 글씨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망각은 최고의 복수다.]
[이제, 너도 잊어야 한다.]
수진은 사전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나는, 기억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