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나라장터에 입찰하다

17년 만에 '판' 갈아탄 이야기

by 애미라이터

서울에서 가장 먼 경기도로 이사 온 뒤

사실상 방송과 헤어졌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메인 작가들이

같이 일하자고 연락을 해와도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왕복 세 시간 출퇴근은 못 해. 애들도 아직 어려서…”


아쉬운 척 말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이제 진짜 그만두고 싶었다.

데드라인은 늘 턱밑까지 쫓아왔고

섭외는 될 때까지 전화를 돌려야 했고 시청률은 늘 불안했다.


17년을 했는데도 편해지지 않았다.

갈수록 더 어렵고

더 힘들었다.


‘될 대로 돼라’ , '어떻게든 되겠지' 식의 마인드는

이 바닥에서 오래 못 버틴다.


망하면 작가 '탓'

잘되면 피디 '덕'이었다.


경력은 쌓였는데 삶은 더 복잡해졌다.


연차는 높아가는데 육아는 시작됐고

책임은 커졌는데 시간은 줄었다.


나는 조용히 혼자 선언했다.

이제 방송작가는 끝이다. 방송일은 엔드다 엔드!


그리고 구직 사이트를 새로고침하기 시작했다.


사람인.

미디어잡.

잡코리아.


작가 3천 명이 모여 있는 단톡방.

경기도 남부 쪽 공고만 기다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러기를 어느 날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 지자체 유튜브 작가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나는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지금 당장 일할 수 있습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나도록.


대출 이자와 생활비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매일 버스를 한 시간 반씩 타고

강남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그 채널은

세계에서 벌어진 기이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곳이었다.

썸네일 제목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인도네시아 바다 한가운데서 어부가 건져 올린 충격적인 것의 정체
죽은 사람과 함께 사는 부족


아이템을 찾으려면

징그럽고 끔찍한 영상을 반복해서 봐야 했다.


어느 날은 영상을 찾아보다가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이건 못 해 먹겠다 싶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하던 어느 날 아침.

전화가 왔다.


031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두 달 전 메일을 보냈던 그 회사였다.


“저희는 나라장터 입찰 공고가 올라오면 제안서를 쓰고 PT를 해서 사업을 따오는 방식이에요.

SM이나 PM 가능하실까요?”


나는 잠깐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라장터.
입찰.
SM? PM?


외계어 같았다.

내가 아는 단어는 이런 것들 뿐이었으니까.


니쥬.

어림짐작.

야마.

우라까이.

입봉.


방송판 은어뿐이었다.


그래도 쫄지는 않았다.


아이템 잡고

섭외하고

구성안 쓰고

대본 쓰고

클라이언트 설득하는 일.


판만 바뀌었지

하는 일은 비슷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재택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육아하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


그게 나한테는 제일 컸다.


물론 그 세계도 만만하진 않았다.


상식적인 대본을 쓰라며 문장을 나노 단위로 고치게 하는 클라이언트도 있었고,

대표와 함께 간 미팅 자리에서 기획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바로 눈앞에서 집어던진 클라이언트도 있었다.

편집 문제가 생겼다며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화를 열 통 넘게 걸어오는 클라이언트도 있었다.



그래도 방송'판'에 비하면

지자체 유튜브는 애교였다.


그 회사에서 나는 1년 반 동안

여섯 개 프로젝트 작가로 일했고

열 개 넘는 제안서를 썼다.


그러다 어느 순간 페이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일주일.

세 달


나는 그 회사와 미련 없이 손절했다.

그리고 다시 구직을 시작했다.


이력서를 더 촘촘히 쓰고 자기소개서를 계속 고쳤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17년 방송 경력과

1년 반 입찰 프로젝트 경험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력처럼 보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직장’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내가 들어갈 ‘판’을 찾고 있었던 거였다.


방송을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나는 계속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설득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구조를 짜고

콘텐츠를 완성하는 일.


직함만 바뀌었지

나는 그대로였다.


나는 망하지 않았다.

다만 이동했을 뿐이다.


아마 그게 나의 방식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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