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컬러바는 없다]엄마 직업은 가짜야?

대체 가능하다지만 없으면 대책없는 이들에 대하여

by 애미라이터

어느 날,

다섯 살 딸아이가 내 눈을 빤히 보며 물었다.


엄마!
엄마 직업은 가짜야?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19년 동안 남의 말을 다듬고,

방송 시간에 쫓겨 내 글이 아닌 남의 글을 써온 시간들.


방송이 끝나는 순간 공기처럼 사라지는 문장들을 붙잡고

그게 내 일이라 믿으며 살아온 날들.


가끔은 내가 만드는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딸의 서툰 발음이 가슴에 날카롭게 박혔다.


아니, 엄마는 작가야. 작가.
따라 해봐. 작.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래된 박스 더미 속에서

17년 전 일기장을 꺼냈다.


80리터 배낭을 메고 인도 사막을 구르던 날들,

방송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트북을 두드리던 시간들.


누군가의 요구가 아닌,

컨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가짜’가 아닌

진짜 내가 써 내려간 날것의 문장들.


그 문장들은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보다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방송국에는 ‘컬러바’라는 것이 있다.

화면에 아무것도 내보낼 수 없을 때

잠깐 시간을 벌기 위해 띄우는

무지갯빛의 정지 화면.


하지만 생방송에서 컬러바를 띄우는 건 '방송사고' 다.


아이템이 없어도,

사고가 나도,

어떤 식으로든 다음 화면을 이어가야 한다.


내 인생도 그랬다.


스물두 살에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고

마흔이 된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삶에 컬러바를 띄워본 적이 없다.


멈출 수 없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했고,

준비되지 않았어도

다음 문장을 써야 했다.


M 본부에서 시작해

K 본부, S 본부, E 본부,

그리고 종편과 지자체 유튜브 영상까지.


처음에는 열정과 허세였고,

그다음에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로

이 바닥에 눌러앉았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히트작 하나 없고,

상 한 번 받아본 적도 없지만

방송국 밑바닥에서

나름의 내공으로 19년을 버텨온 작가.


이 글은

19년 차 방송작가가 목격한

어질어질하고,

아찔하고,

때로는 노답이었던

방송국의 얼굴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오직 나만 아는 이야기들.


마흔 살이 된 기념으로

(라고 쓰고, 마흔이 되도록 내 콘텐츠 하나 없다는 게 억울해서)

방송과 함께 휘발되어 사라진 문장 말고

내가 붙잡고 싶은 이야기들을 써보려 한다.


언젠가 딸에게 다시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아윤아.

엄마는 이제 진짜 ‘엄마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어.

그리고 말이야. 인생에는 컬러바가 없단다.”



멈출 수 없어서
계속 다음 장면을 살아내야 하는
그런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