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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민 Nov 29. 2021

어느 키위의 이야기

항암과 일상의 교차점을 지나는 시점에서 정리해보는 소소한 암 투병기

"쌤! 머리가 꼭 바비인형 같아."


  얼마 전 퇴근길, 옆반 언니가 내 머리를 보며 그랬다. 어쩜 그렇게 흐트러짐 없이 예쁘냐고, 머릿결이 꼭 바비인형 같다고. 내가 암 진단을 받은 뒤 가장 당황했던 순간이었다. '아침마다 열심히 손질해요.'라고 농담처럼 상황을 넘기려 애쓰며, 찰나지만 진짜 지금이라도 휴직을 할까 고민되던 순간이었다. 우리 학교 천사로 통하는 옆반 언니가 날 맥이려는 의도일 리는 없다 굳게 믿는다. 알았다면 절대 건네지 못했을 말이다. 내 항암치료의 부작용 중 하나가 탈모라 지금 나는 주꾸미 상태이고, 이게 가발이라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학교 선생님이면 휴직도 잘 되는데 왜..."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을 처음 뵙던 날, 내 직업이 교사라서 혹시나 항암치료 중 다양한 사람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이 감염 위험을 높이는 건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 전후로도 저 답의 다양한 변주곡을 무수히도 들어왔다. 나의 고집에 걱정하던 남자 친구도, 나의 복무 책임자인 교감선생님도, 나를 무척이나 오래 보아온 절친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이토록 휴직하지 않겠다는 나에게 한 번쯤은 저런 속내를 비치곤 했다.


  휴직을 하지 않고 중간중간 병가로 버티고자 했던 이유는 정말이지 많았다. 연구부장님과 팀업 해서 따온 연구학교 프로젝트를 위해 굳이 6학년까지 자진해서 3년째 맡았는데 이대로 손 놓고 싶지 않아서, 우리 아이들 졸업까지 시켜주고 싶은데 너무 눈에 밟혀서, 항암 주사와 주사 사이 기간 3주 중 2주가 멀쩡한데 집에만 있으면 암이 아니라 마음의 병으로 죽을 것 같아서, 일단 병가로 버티다 안되면 그때 가서 휴직해도 될 것 같아서 등등.

그냥 멀쩡한 사람이 해도 버거울 일이긴 했다

  그리고 지난주, 누군가가 '너는 다른 병도 아니고 제일 무섭다는 암 환자라면서, 그냥 멀쩡한 사람이 해도 버거울 일을 벌였냐.'라고 어이없어하던 큰 행사까지 모두 마친 후. 종일 두어 번 정도 쓰러질 것 같던 위기까지 넘겨가며 겨우 집으로 와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하니, 나의 이 고집의 이유가 하나로 정리되었다.


일상 붙들기.

나는 일상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6개월 전,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일가친척 중 암이라고는 친할머니 한 분뿐이었고, 그마저도 유전성은 아니었는지 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버지의 형제들 그 누구도, 어머니의 가족들까지 아무도 암 환자가 없던지라 심지어 겨우 병원 나이 서른다섯을 열흘 앞둔 내가 암이라는 사실에 가족 모두가 감히 가늠하지 못할 큰 충격에 빠졌었다. 왜 하필 나인지, 왜 하필 내 딸이고 내 누나인지.


  젊은 환자로 분류된 나는, 암 진단 이후 정말 무서운 속도로 검사, 수술, 총 8회의 항암치료라는 과정을 달렸고 이제 다음 주면 벌써 7회 차 항암주사를 맞게 된다. 그게 수술 전이든 후든, 큰 산에 비유할 만큼 암 치료의 가장 고비는 '항암치료'라고 하는데 이제 나는 약 5주의 남은 시간 동안, 단 두 번의 주사만 맞으면 항암산을 무사히 넘게 되는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 표현해도 될지는 몰라도, 수술도 정말 무난히 잘 받고, 항암 시작 전 난소가 아주 건강하다는 즐거운 소식과 함께 24개의 난자도 무사히 동결해두었으며, 비록 나는 괴로웠을지언정 단 한 번의 응급실 신세나 구토 혹은 구내염도 없이 항암도 단 두 번만을 남기고 있다. 곧 수술 6개월 차 검진과 함께 방사선 치료만 받으면, 늦어도 내년 3월 새 학년도의 시작과 동시에 내 암 치료도 마무리될 것이다.


  생각보다 버틸만했다. 내가 무엇보다 잃을까 두려웠던 일상이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고 있었고, 머리카락 말고 나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시종일관 조금 섭섭하리만치 냉정함을 유지했던 유방외과 교수님은, 수술 후 최종 검사 결과를 알려주며 나의 암은 유전자 변이로 인한 게 아니었고 젊다 보니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전이 없이 꽤 초기에 발견되었으며 암의 성질 또한 비교적 순한 암이라 젊은 나이에 암이 걸린 것 치고는 꽤 운이 좋았다(?)는 말과 함께, '치료 잘 받으시면 완치 가능합니다. 항암 밀리지 않게 난소 빨리 동결해두세요, '라고 덧붙였다.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은 내내 나에게 구내염 발병 여부, 구토 여부, 발열 여부 세 가지부터 물으신 후 셋 다 오케이임만 확인하면 그때부터는 '아 너는 우는 소리 할 거면 빨리 나가라.'는 말을 눈으로 강하게 전달하시곤 했다. 예를 들면,

"(심각) 너무 메스꺼워서 괴로웠어요."

"(더 심각)그래서 구토했어요?"

"(매우 심각) 아니요. 근데 진짜 방 문도 못 열었, "

"(아오)아 그 정돈 다 그래요. 버텨보세요."

... 이런 식이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래서, 생각보다 버틸만했다.


  처음에는 뭔가 나만큼 심각해 보이지 않고, 나의 '머리가 다 빠지게 되나요? 살이 왜 찐 건가요? 생리가 왜 끊기지 않죠?' 따위의 질문들에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내시던 교수님들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른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서 생각보다 버틸만했다.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엄청나서 그렇지, 아무리 봐도 내가 젊은 나이에 요절할 팔자는 아닌 듯하다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적어도 그분들 앞에서 내가 우는 소릴 하기엔, 정말 촌각을 다투는 급한 분들이 너무도 많았다. '자, 이 굶어 죽는 제3세계 아동들을 보세요. 너는 행복하죠?'식의 논리 같아 불편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머리가 자라나고 있다.

약이 들어간다, 쭉! 쭉쭉, 쭉


  아직 두 번의 항암, 이 직전의 항암주사 부작용의 효과가 나올 시기까지 고려하면 머리카락이 아직도 세 번이나 빠져야 할 것이다. 총 8회의 항암 중 앞의 4회 때는 단 한 올도 머리카락이 자란 적 없었는데, 약이 바뀐 5회 차를 기점으로 머리가 눈에 띄게 자라고 있다.


  늘 내 머리로 맘 아파하던 엄마는 '야, 니 미용실 가서 커트 쳐야겠다.'라고 농담을 하셨고, 그에 맞받아 나는 '아 머리가 흘러서 밥을 못 먹겠네.'하고 머리띠를 한 채로 식탁에 앉아 엄마를 웃겼다. 아직 한 번도, 앞으로도 절대 이 머릴 보여줄 생각은 없지만 늘 내가 신나게 머리 상황을 묘사해대서 이제는 가발 없는 내 모습 상상도까지 그려대는 남자 친구에게는 좋은 말로 '나 꼭 신생아처럼 머리가 자라!'라고 표현했다. 근데 솔직히 그건 좀 많이 귀엽게 포장한 거고, 아무리 봐도 그냥 털 난 타조알이다. 치료 내내 머리로 우울해하던 내가 처음으로 신이 나 보였는지, 남자 친구는 넌지시 '나도 보고 싶다. 궁금해.'라고 말했지만 그건 또 야멸차게 거절했다. 휴,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사실 다시 다 빠져버릴 위험이 세 번이나 남아 의미 없는 머리카락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해도, 계속 기분이 좋다.



살며 아빠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내가 아주 어릴 적 할머니의 장례 때나, 남동생 입대 배웅 때 우셨다더라 전해 들었을 뿐, 그 자리에 없어서 나는 아빠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아빠가 내 암 선고를 전하는 엄마와의 통화 중 전화기 너머 꺼이꺼이 목놓아 우시던 소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후 "아빠, 저 빨리 발견해서 괜찮을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라고 애써 씩씩한 척하려는 내게 "그래, 괜찮을 거야." 하시던 아빠의 목소리에는 새까맣게 진한 울음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 후에도 입원하러 들어가는 내 손에 가방을 쥐어주시며, 첫 항암주사를 맞고 온 내 손을 잡고, 항암주사로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속이 너무 쓰리다고 식탁에 앉아 우는 나를 보시고, 침대를 구르며 살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짐승 같은 소릴 내며 괴로워하던 날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방문을 여시며, 아빠는 그때 눌러 담은 울음을 다시 쏟아내시곤 하셨다.


  엄마도 아빠도 자꾸만 당신들이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죽었다 깨나도 우린 네 마음 다 모를 거라고 그러셨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아직 당신들께 너무도 젊고 어린, 여전히 생때같은 자식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부모 마음이 어떨지 감히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자식을 낳아보면 조금은 알게 될까, 아마 영원히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겠지. 나는 잘 못하지 않았지만 불효녀였다.



  다시 다 빠져버릴지도 모르는 머리카락을 보며 실없이 자꾸 웃음이 나는 이유가 뭐냐고?


  나는 '거의'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래도 잃은 게 있다면, 머리카락과 그로 인한 약간의 자존감, 그렇게 잃은 자존감으로 인한 나의 살짝 뒤틀린 일상 정도? 아무래도 이번 암으로 죽을 것 같진 않고, 내가 무엇에 취약한지를 알았으니 살며 조심하고 좋은 생활습관을 유지하면 (비록 무교지만) 재발은 신의 영역일 듯 하니, 그저 이번 일로 내 삶에 6개월 정도 브레이크가 걸린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와중에도 평년보다 더 한 업무를 다 해내고, 연애전선도 이상무이며, 부모님도 시간이 갈수록 다시 안정되시는 중이다.


  항암 후유증으로 괴롭던 순간에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게 괜찮아지기는 하는 건가."였다. 부종으로 퉁퉁 부어버린 모습도, 머리카락도 그러했다. 항암은 잘 먹어야 버틴단 말에 과할 정도로 나를 챙겨 먹이시던 엄마에게, 나 이러다 살찌면 어떡하냐고 세상 철딱서니 없는 소릴 했을 때. 항암 교수님께서 성가셔함을 넘어서 다소 격앙된 말투로 "지금 치료가 중요한데, 다이어트할 생각이냐. 치료 중에 충분히 가능한 부작용들이고, 치료 끝나면 다 돌아오니 그런 소리 말라."시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또 주사 후 미칠 듯 괴로운 부작용 버티기 기간에 돌입하면, '그래서 진짜 이게 다 돌아오고 괜찮아지는 게 맞냐고'하는 강한 의문에 온 몸이 잠식되고 만다. 어떻게 이렇게 괴로운데,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멀쩡해질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겐 그저 남들의 말뿐,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근데, 머리카락이 자라더라.


머리카락은 곧 내게,

"다 원래대로 돌아온다."던 전설의 실체이다.


  이 짧고 볼품없고 그나마도 도로 빠져버릴 머리카락이, 정말 다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온 몸이 대기 중임을 알려주는 증거다. 진짜다, 정말 이제 끝이 보인다.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이렇게 간절한 먼 미래로 싹 바뀌었다가, 다시 내게로 마구 달려온다. 키위처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에도, 속없이 웃음이 흘러나오는 이유이다.


늘 털이 바싹 깎여 오골계 생닭같던 너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마지막 항암 일이 기가 막히게 12월의 마지막 날쯤이고, 그 마지막 주사의 부작용은 우리 아이들 졸업식날을 기점으로 끝이 난다. 천상 선생 할 팔자인가, 모든 치료 세션은 2021학년도의 종료와 함께하고, 나의 새 일상은 2022학년도의 시작과 동시에 출발할 것이다.


  언젠간 또 무감각해지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나는 나로 돌아가게 되었다. 인간의 자연적 평균 수명은 30세 중후반이라 하고, 의학의 발달로 인해 지금처럼 길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암 진단 후 종종, 어쩌면 죽었어야 할 내가 어떤 연유로든 이 이후의 삶을 운 좋게 선물 받았다 생각하곤 한다. 당연해지겠지만, 적어도 암 선고 전의 당연함과는 그 무게가 달라졌다. 왜 슈퍼마리오를 플레이하다 보면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마지막 하나 남은 목숨이라 죽기 살기로 플레이하던 중,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 어디선가 달려온 작고 귀여운 초록 버섯을 극적으로 먹고 다시 한 판의 기회를 더 얻었을 때의 그 짜릿함.


  항암과 일상의 교차점을 지나고 거울 속 털 난 타조알 혹은 키위 같은 내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난다. 정말 다 돌아올 것이다. 나는 암 생존자로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매를 좀 일찍 맞은 경향이 없지 않아 있으나, 어차피 맞을 매였다면 맞아도 큰 타격 없는 젊고 건강한 시절에 짧고 굵게 이 위기를 넘겨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이보다 더 봄이 기다려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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