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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민 Jun 28. 2023

나의 '우영우'를 기억하며

드라마의 열풍마저 지나간 자리에 서서 내 영우를 떠올립니다.

메타버스 수업 중 네이버와의 협업이었는지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홍보하는 메타버스 공간이 마련되어있었다.

화면이 보이지 않은 채 시그널 음악만 들어어도 아이들은

'어, 우영우다!'하고 알은체를 했다.

그 가운데 나는 홀로

어느해의 우리반 '우영우'를 생각한다.


영리하지만 예민했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사춘기에 접어들어

모든면에서 정말정말 손이 많이 가던 자폐스펙트럼의 우리 '우영우'.


소규모학교에 14명 남짓이던 아이들은

1학년때부터 6년을 단일학급으로 졸업까지 마쳤었더랬다.

어느 선생님 말씀이, 저학년일때는 모두가 같아보였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반 '우영우'는 그 자리에 머물고 다른 아이들은 훌쩍 자라버렸다 하셨다.


나는 아이들의 6학년 1년을 함께 하였고,

통합학급 3년차, 자폐스펙트럼학생을 처음 맡은 해였다.


나는 여느해처럼

우리반 '우영우'가 없는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영우에 대해 나보다 너희가 더 잘 알 것이리 믿는다고,

선생님은 모두를 차별없고 공정하게 대하겠다고.

영우가 정말 할 수 없는 부분만 돕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자고.

혹시라도 영우의 과격한 행동으로 피해를 입는다면, 절대 참지말되

너희가 나서서 영우를 가르치려들지 말고 나에게 상황을 알려달라고.

너희는 모두가 동등한 친구이지 영우를 함부로 도우려 들거나, 가르치려 드는건 영우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설명을 했었다.


통합학급은 어느 한쪽의 특헤를 위한 제도도,

어느 한쪽의 희생에 기대는 제도도 아니니까.

누구라도 가질수 있는 부족함을 서로 보완하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사는 방법을 체득하게 하는게

내 통합학급 지도방향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 모든 걱정들이 너무나도 기우였음을 나는 머지않아 깨달았다.

매 순간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나에게 여전히 존재하던 편견을, 그 해 아이들이 적나라하게 뭍으로 끌어내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우리반 '우영우'는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놀아줄 대상도 아니었고, 돌봐야할 대상도 아니었다.

쉬는시간에 서로 끌어안고 장난치는 모습, 대화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있으면

그 어떠한 편견이나 시혜적인 태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냥, 이 아이들은 우리반 '우영우'도 6년째 같은 반인 친구 그 자체였다.


내일이면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영우에게 장난스레

'영우야, 비행기 탈때 신발 벗고 타야되는거 알지?'하는 녀석에게 영우는 능글맞게

'아 당연하지, 나 여권 챙겼어!'하고 농담을 되받아치면 모두가 깔깔깔 웃고는 했다.

그럼 꼭 한 술 더 뜨는 놈이 있기 마련이라, '신발주머니도 챙겼어?'라 말을 보탰고

영우는 아주 태연하게 '아 적당히해~ 나 비행기 타봤어~'라고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럼 아이들은 그자리에 멈춰 더 선을 넘지 않고 모두가 한바탕 웃을 뿐이었다.

나의 부족한 글재주로 다 표현못할 아무렇지 않음이었다.

그 농의 대상이 영우가 아닌 누구였더라도 이상할게 없는 풍경.

정말 순수하기 그지없던 말장난들.


장구치기 수행평가를 칠때였나,

너무 부끄러워 장구도 제대로 치지 못하고 노래도 속삭이듯 부르며

얼굴이 빨개져 들어간 여학생에게 마치 배틀하러 나온 랩퍼마냥

'00야, 잘 봐! 이게 바로 장구의 달인이다!'하고는 뻔뻔하게 장구를 마구 치며 민요를 불러대는 영우를 보며

다들 눈물이 쏙 빠지게 웃으면서도,

그 누구 하나 영우를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우습게 만들지 않았다.

정말 너무 웃겨서 웃는거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폭소였다.


가끔은 예민한 영우가 교실에서 말 그대로 '패악'을 부릴 때도 있었다.

난동은 최소 30분 이상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그런 영우를 말리느라 나도 옆 한번 돌아볼 틈이 없었다.

어째저째 수습아닌 수습으로 영우를 급하게 특수학급에 맡기고 혼비백산 교실에 올라올 때 마다

아이들은 미동도 없이 각자 책을 꺼내 읽다가 나를 보고는 웃으며 다시 교과서를 펼쳤다.

혹여 그런 일로 학부모들에게 사과 아닌 사과의 말을 건네면 열에 아홉의 학부모가

'괜찮다, 익숙하다. 영우는 그럴수 있다. 우리 애들이 배우는게 있을거다.'고 되려 나를 다독이셨다.


우리반 '우영우'는 그 누구의 보살핌도 필요치 않았고,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워나갔다.

나는 특수학생을 통합하여 맡은 통합학급을, 전혀 특수하지도 특별하지도 않게 운영하게 되었고

일 년을 꽉 채워 참으로 많이도 얻어맞고 또 얻어맞았다.

나의 편견에 한 방, 나의 기우에 한 방, 나의 색안경에 한 방.


졸업을 시키고 다음 해 스승의 날 언젠가, 한 아이에게 전화를 받았다.

워낙 몇 되지 않는 열 넷 아이들이다보니 서로 다 연락을 해 날 보러 오겠단 연락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아이들 인원수에 맞춰 열 세 명분의 음료와 과자를 준비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오던 당일, 나의 간식을 받으며 아이들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제는 졸업했으니 괜찮죠?라며 자기들끼리 용돈을 모아 박카스도 한 박스를 챙겨왔다.

여전히 참 예쁜 아이들 중 하나가 말했다.


"선생님! 영우 간식은 저 주세요! 같은 동네 살아서 전해줄 수 있어요!"

아차.

나는 당연히 영우를 인원에 넣지 않았다.

영우는 서로 연락한다는 망에 포함되지 못할거라 당연히 판단했었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부반장이었던 학생이 그랬다,

"영우도 전화해봤는데 오늘 언어치료센터 가는 날이라서 못온댔어요."

아이들은 원래부터 그랬었던듯, 누구와도 그런 것처럼, 영우랑 통화를 했다 말했다.

영우와 전화로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 나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영우와 직접 전화한 적 없고, 문자한 적 없다. 늘 어머니께 연락드렸을 뿐이었다.

그 사이 아이들의 대화 주제는 영우로 자연스레 바뀌었다.

영우가 또 울면서 교실을 뛰쳐나가서 그 반 애들이 당황했다더라,

애들이 영우를 잘 몰라서 뭐라하는건 아닐까,

영우랑 같은 학교를 아무도 안가서 큰일이다. (영우는 특수학급 시설이 가장 잘 구축되어있는 중학교로 혼자만 진학했다.)

나는 아이들의 말 속에 속절 없이 허우적대며, 여전히 선입견에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이들만 못한 선생님, 영우를 여전히 '자폐스팩트럼을 가진' 영우라 선을 그어놓은 어른.


그러고 3일 뒤였던가,

발신자 명에 영우의 이름이 떴다.

영우의 담임을 맡고 졸업까지 시킨 후 첫 영우의 전화.

나는 낼 수 있는 한 가장 밝고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영우야!"

"아 선생님~"

"아이고 반가워라~ 우리 영우 잘 지내?"

"아 네 뭐 그럭저럭."

"영우 스승의날에 못봐서 선생님이 너무 아쉬웠어."

"아, 그날은 언어치료 가는 날이었어요."

"그랬다며~ 00한테 들었어. 학교생활은 할만해?"

"아, 뭐, 네."

"선생님한테는 왜 전화한거야?"

"아..."

생각보다 길게 뜸을 들이지만, 나는 끝까지 기다렸다.

"...선생님 목소리 듣고싶었어요. 이제 안 아파요 선생님?"

영우와 아이들을 맡았던 해에, 나는 항암치료로 3분의 1을 자리 비웠더랬지.

그걸 기억해낸 모양이다.

"선생님 이제 안아프지! 선생님 아직도 아플까봐 전화한거야?"

"아, 그건 아니고요, 알겠어요 선생님!"

뚝.

정말 맥락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길지 않은 통화에 너무 맥락없이 끊어진 전화라 비교적 아주 생생하게 살려낸 기억이다.


나는 영우가 왜 전화한지 알고있었다.

그날 오전, 특수반 선생님께 중학교에서 전화가 왔다고 전해들었다.

학교 선생님과 트러블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 목소리가 듣고싶었다.'던 영우의 말은 진심이었으리라.


그 후에도 종종

퇴근길에 운전하다 지나가며

학교 교복을 입고 어머니와 부지런히 어디론가 걸어가는 영우를 스쳐기곤 했다.

너무 반가워 창을 내리고 아는체를 할까 고민하다 늘 마음을 접었다.

영우 곁에 서 걷는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 지쳐보이고, 영우를 차도 근처까지 불러내기 위험했기 때문이다.


글로써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지금, 그 동네와는 많이 멀게 전입을 와

우연히 마주치기도 많이 힘들어져버린 지금 이 순간.

오늘 문득 마주친 '우영우'라는 세 글자에

사무치게 내 영우와 아이들이 그리워지고,

부쩍 늘어난 교직 회의감에 영우가 덧대어져 생각이 깊어진다.


나는 그때보다 더 나은 교사인가.

나는 성장하였는가. 도망치고싶지만, 여전히 버티고 선 이유는 무엇인가.


또,

나의 영우는 여전히 이러한 세상과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을까.

앞으로 영우를 안아줄 세상이 그때의 우리 6학년 1반과 같을 수 있을까.

나의 영우가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언젠가는 올 것인가.

이제는 드라마의 열풍마저 식어버린 '우영우'와 자폐스팩트럼에 대한 관심이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까.


영우가 찡그리거나 오열하지 않는 그 어느 날이 왔을까, 오고있을까, 어쩌면 영영 오지않을까.

영우야, 내 그리운 우영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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