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는 구르고

-아연이라는 원소

by 시인 이문숙

나는 봄에 돋는 싹을 바라보았으며, 화강암에서 운모가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에서


회화나무 한의원 지나, 던애드워드 페인트 가게 지나, 대화동 먹자골목 미락손만두집 지나, 아버지가 잡고 딸이 파는 선운사 장어 지나.


골목 맞은편에서 야쿠르트 복장을 한 아줌마가 스르륵 수레를 밀고온다. 가까이서 보니 전동차다. 나는 묻는다. 골목을 샅샅이 돌아왔을 그 단호한 바퀴에게.


다시 골목을 꺾어 걸어간다. 거기 새 모양의 로고를 한 동네책방이 있다. 그런데 낮 2시가 되어가는데 유리창 너머는 텅비었다. 어쩌나, 사람이 많지 않으면.


그러나 들어가 보니 강의는 2시가 아니라 7시 반. 나는 이렇게 오락가락이다. 나는 설국에 나오는 무용한 헛수고 게이샤 '고마코'도 아니건만. 나는 헛수고와 허탕을 일삼는다.


방수 잘되는 오리 날개 위 무용한 물방울처럼, 프리모 레비의 칠면조 재배법처럼. 깃털 하나를 땅에 심어놓고 칠면조가 속꽉찬 푸성귀로 자라길 희망한다.

주기율표로 따지면, 아연.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酸)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주기율표에서


아연의 예민성. 마트를 나오다 환자용 전동차를 위해 나도 모르게 자꾸만 닫히려는 육중한 유리문을 붙잡고 선다. 이 순간 문에 대고 있는 왼발이 얼마나 힘이 센지.


분수대 앞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를 또 만난다. 현금을 세고 일수놀이로 재미를 보기도 한다는 그들. 주기율표로 따지면, 이들은 어떤 원소일까. 화강암이 아닌 보도블록에서 운모 같은 빛이 튀어오른다.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주기율표에서


우려스러운 아연의 배타성. 야쿠르트 아줌마가 지나가는 할머니 두 분을 불러세운다. 그러더니 그들이 들고가던 맥심커피 상자를 낚아챈다. 그렇게 들고가가다가는 ‘손아구' 아프다고 얼른 비닐봉다리에 넣어준다. 아연의 선하고 순연한 미덕.


공원 분수가 폐장된 수영장 같다. 늘 보이던 감전주의 경고문도 보이지 않는다. 깃털 바랜 비둘기도 보이지 않는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주기율표 ‘아연’에서


나는 오늘의 완강한 도덕적 바퀴를 멈추고 나를 파행하고 기각한다. 일축하고 지연한다. 나의 오늘을 그 아연에게 임의제출한다. 은닉한다. 불순물이 필요한 아연. 불순물 같은 산이 있을 때, 경직되지 않고 활발한 아연. 긁어내고 부식시켜 태어나는 예술적 판화들.


책방 강의에는 가지 못한다. 그림책 가겐 줄 알았는데, '퇴사하겠습니다' 같은 어른 책도 전시된 서가. 시집은 뵈지않는 뒤칸에 ‘아연’처럼 꽂혀 있다. 어렵고 난해한 시의 아연.


만일 몇년 뒤 시집책방을 한다면? 양지마을 주점 '계루' 옆에. 계수나무 누각 옆에. 베란다에 쌓여있는 헌시집박스 열고 총채로 활활 먼지 털고. 땅색에 가까운 색을 내기 위해 훈데르트 바서의 붓 아래 송두리째 부서지던 흰개미집처럼, 그렇게 책방을 한다면.


책방 이름은 야생화 수 잘 놓는 친구 은희와 한다면 '시와 수' 혹은 '시와 바랭이풀'일 것이고 영어책 좋아하는 에이프릴과 한다면 '사월 소낙비와 오월 넝쿨장미'일 게다. 폴과 한다면 '시와 4시 반', 칼퇴근과 저녁생활 보장일 것이다.


매해 소풍갔던 선죽교의 선명한 붉은 자국을 그리워하던 지금은 먼곳 계신 부모님과 차린다면 '시밭' 혹은 '시와 얼갈이배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주기율표 ‘아연’에서


아연의 배타적이고 고집 센 성질. 억세기만 한 ‘손아구’, 손아귀 힘 같은 것. 아마도 시집책방은 아연을 넘어, 산에 부식되더라도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 나는 메스꺼울 정도로 도덕주의적인 첫째 것을 버리고, 내 맘에 드는 둘째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주기율표 ‘아연’에서


시의 척박한 흙 속에서 얼갈이 배추라도 키워내려면. 달팽이, 배추흰나방, 박테리아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 또한 그처럼


땅에서 무언가 키워내려면,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주기율표 ‘아연’에서


그렇듯이 오늘의 주기율표에서 아연은 소환된다. 봄의 싹이 오듯. 화강암에서 운모가 반짝이듯. 새로 정비한 보도블록에서 유릿가루가 튀듯.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저/이현경|

돌베개|


#프리모레비 #주기율표 #아연 # 변화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야생 장미,White Roses ,1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