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길을 걸었다
어느 가을날, 연구실 문을 잠그고 홀로 건물 밖을 나섰다. 촘촘히 붙어 있는 연구실들,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사람 있음'을 알릴 뿐 어느 것 하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고요한 복도를 흐르는 정적을 깨기 싫어 조용히 걸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그 상쾌함이 정말 맑은 공기 탓인지 숨죽이고 걷다가 숨통이 트여서인지, 아니면 그저 일터를 벗어난 해방감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공원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를 한번 움츠렸지만 이내 그 공기를 잡아 큰 숨으로 들이마신다. 역시, 상쾌하다.
퇴근 버스는 진작에 떠났다. 옆방의 동료도 퇴근 버스와 함께 떠났다. 덩달아 해마저 떠났다. 많은 것이 떠난 자리에 나는 밤과 함께 서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서 정문을 나서니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떠나보낸다. 오늘은 왠지 걷고 싶은 날이다.
삼청동 끝자락에서 광화문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거슬러 걸었다. 눈 뜬 장님처럼 걷다가 그 사람들을 볼 때면 그제서야 여기가 삼청동이구나 생각했다. 각자의 좋은 사람들과 함께 데이트를 즐기러 오는 곳. 입사하기 전에는 나도 그랬다. 이제는 그저 출근길 아니면 퇴근길이 되어 무딘 감성으로 걷다가 문득문득 눈을 뜨곤 했다. 그럴때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본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길이 이렇게 예쁘구나, 하늘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바람이 이렇게 좋구나. 그리고 이 좋은 걸 나는 자꾸 잊고 있었구나.
그렇게 종종 걷기를 좋아했다. 30분쯤 되는 거리를 아주 천천히 걸었다. 일부러 퇴근버스를 보내기도 했다.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울적해서, 혹은 그냥 걷고 싶어서. 걸으면서 묵혀둔 생각을 꺼내보고, 새로운 생각이 피어나고, 때론 감상에 푹 빠지는 게 좋았다. 혼자만을 위해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서 그만한 위로가 없었다.
'오늘 하루 수고했어.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위로받은 마음은 다시 눈을 뜨게 했다. 무뎌졌던 감성도 살아난다. 기분 좋은 마음에 보이는 것들도 전부 예뻐 보인다. 놀러 온 많은 사람들 틈에서 홀로 퇴근을 하고 있는 기분도 씁쓸하지가 않다. 오늘 하루가 이렇게 잘 마무리되는 기분이다.
회사가 삼청동에 있던 시절, 그 해 가을 퇴근길을 참 많이도 걸었다. 그 해가 바뀌고 봄이 오던 때 회사는 광화문과 더 가까운 곳으로 이전을 했다. 이번에는 덕수궁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삼청동 시절처럼 혼자 걷는 일이 적어졌다. 지금도 나는 삼청동을 자주 걷는데, 걷다보면 그때 그시절의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이번에는 그시절 퇴근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발걸음이 된다.
언젠가 삼청동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무렵 조용필의 새 앨범이 나와 찾아 보던 중에 제목에 이끌려 노래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문득 삼청동을 걷던 그 퇴근길이 생각났다. 걷고 싶어서 걸었던 날들, 걸으며 숨을 고를 수 있었던 삼청동길. 그 길을 걸으며 생각을 다지고 정리하면서 수없이 나를 토닥이던 위로처럼 그 노래가 나에게 속삭였다. 행복이 살에 닿은 듯이 선명한 그런 날이 있다고. 고단한 나의 걸음에게, 불안한 나의 마음에게 사랑한다고, 괜찮을 거라고.
이런 날이 있지
물 흐르듯 살다가
행복이 살에 닿은 듯이 선명한 밤
...
고단한 나의 걸음이
언제나 돌아오던 고요함으로
사랑한다 말해주던
오 나의 사람아
...
불안한 나의 마음이 언제나 쉬게 했던
모든 것이 다 괜찮을거야 말해주던
오 나의 사람아
- 조용필 '걷고 싶다' 中
* 메인과 글에 담긴 사진은 삼청동을 걷던 중에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