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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비 Jun 09. 2022

논리적인 사람이 항상 이기는 건 아니야

이성과 논리보다는 관계를 지향하는 커리어

어디 부끄러워서 또는 편견 어린 시선을 받을까 봐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진 않지만 나는 서울대학교를 나왔다. 영국 사람들은 어차피 이야기해봤자 별로 관심도 없는 이 학교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한국 미디어에서 서울대생을 그리는 관점이 참으로 흥미롭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폐인처럼 몰아보기가 취미인 나는 한국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심금을 울린 몇 되지 않는 K-드라마가 있었으니, '응답하라 1988'에서 시작해 '미생' 그리고 최근에 방영한 '오징어 게임' 이렇게 세 가지를 주로 꼽을 수 있겠다.


출처: 넷플릭스 응답하라 1988, 미생, 오징어게임 캡처


응답하라 1988의 장녀 '성보라', 미생의 '장백기'부터 오징어 게임의 '상우'까지. 뭔가 차가운 인상을 가졌으면서 소싯적 공부 좀 하게 생긴 이 캐릭터들은 모두 서울대생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다.ㅎㅎ 응답하라 1988이 처음 나왔던 시절 서울대생이자 무려 장녀이기도 했던 나는 '헉.. 서울대생이 저렇게 재수가 없는 캐릭터로 나온다고...? 혹시 나도..?'라며 소스라치게 놀라 나의 과거 행실을 빠르게 반추해보곤 했다. 응팔의 보라와 미생의 장백기는 스토리 후반으로 갈수록 나름 인간적인 면이 부각되는 전개였던 것으로 기억하나 오징어 게임의 상우는 정말 이렇게까지 사람이 악하다고..? 싶을 정도로 끝까지 이기적이고 지것만 챙기는 나쁜 놈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서울대생이 저렇게 생겼고 이기적이고 재수 없게 행동하냐는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어찌 됐든 저런 캐릭터들은 다 창작과 상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서울대생의 모습은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활발하며 재미있고 착한 그런 류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캐릭터들은 결국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한 번쯤 '제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놈'을 주변에서 보거나 경험한 기억에서부터 창조된 캐릭터들이 아닌가 싶다. 서울대는 그저 도구일 뿐.

똑똑하고 잘났지만 재수 없는 놈!


우리 주변에 한 명쯤 있지 않은가? 맞는 말만 하고 조목조목 따지는 거 하나하나 틀리는 게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내 주변 또는 내가 경험했던 서울대생이 그랬었나? 하고 생각해본다면 내가 경험한 아주 '주관적인' 서울대생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시키지 않아도 지가 알아서 지 갈길 찾아가고 자기 인생 개척하고 있음 (예시) 갑자기 연락이 끊기면 어떤 시험, 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 또는 오랜만에 연락하면 알아서 취직하고 알아서 이미 직업 변경하고 알아서 저 자신에게 맞는 인생 잘 찾아가고 있음 그래서 연락이 갑자기 끊겨도 서로 별로 걱정이 안 됨 또는 그려려니 함.)

자신이 원하는 것이 확실해지면 어떻게서든 그걸 얻어내려고 하는 끈기와 인내가 강함  

시시콜콜한 연락을 굳이 안 하고 사회적 관계보다는 자신의 성취나 업적이 삶의 우선순위인 경우가 많음 (사회에서 업적과 성취를 이루면 인간관계는 자동적으로 따라온 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


이걸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대쪽 같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서울대생이 아니더라도 대쪽 같은 사람 어디든 있고 서울대생 중에도 우유부단하거나 관계지향적인 사람이 있다는 거 안다. 다만 나의 주관적 경험에서 나온 대체적인 경향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나도 생각해보니 대쪽 같은 면이 있다. 이게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고 자기 인생 확실히 개척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아간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대쪽 같아서 부러질 수 도 있는 즉,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그걸 위해 열심히 달려 나갈 줄은 알아도,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융통성과 야들야들함이 좀 부족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위해 대학 졸업장만 떼고 영국 런던에 홀로 정착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마크 주커버그처럼 대학교 중퇴하고 비즈니스 시작할 대범함은 없던 나는, 어차피 회사생활에서 조직원으로 살아남으려면 필요한 그 스킬, '야들야들함'이 부족했다. 나는 주리를 틀어도 줄곧 옳고 그른 정답만을 말하는 원리원칙 주의자였다. 문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기가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2022년을 살고 있는 회사원이라는 것을.


"아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사건의 발단은 아주 작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내 매니저 (상사) 에게 나도 모르게 야단을 치고 만 것이다. 한국과 영국 도합 3-4년간의 직장생활에서 나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없다. 내 성격이 누군가에게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영국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누가 나를 이 정도로 기분 나쁘게 할 일이 없었다.


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나의 매니저가, 내가 2달 동안 겨우 고생해 작업한 파일을, 그것도 나 말고 다른 3명의 동료들이 달라붙어 힘겹게 완성한 파일을 사본 복사도 없이 수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콜을 걸었다. "지금 뭐 하고 계신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대답했다. "응~ 이 파일이 좀 이상해 보여서 고치고 있었어." 이상해 보인다고..? 나는 하나하나 따박따박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이 파일을 내가 왜 이렇게 만들어놨는지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고 저런 논리가 있음을 설명했으며 매니저가 하고 있는 작업이 도대체 어떤 이득과 어떤 논리,이유가 있는지 설명하길 요구했다. 나의 잔소리에 별 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 매니저는 급히 알았다며 파일에 손을 뗐다. 그리고 그녀는 콜을 끝내고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스트레스 받았나 보네. 미안 :) "  


내 파일을, 그것도 다른 동료 3명과 두 달을 공들여 완성한 파일을, 댓글을 달거나 복사본 없이 그냥 자기가 보기에 '이상해 보여서' 고쳤다고? 게다가 콜이 끝난 후 "미안~"이라는 가벼운 메시지 한통. 나는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단 한 번도 남이 내 파일을 와서 갑자기 수정을 하는 이런 사태를 겪어보지 못했다. 너무 화가 났다. 아무리 내가 회사일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브런치에 글을 쓰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일을 대충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정말 열정적으로 고심해서 내 노력과 땀이 들어간 파일인데 이렇게 함부로 남의 파일을 망치다니...




화를 가라앉히고 나는 다음날 매니저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만난 그녀는 갑자기 어제와 달리 태도를 싹 바꿔서 나에게 갑자기 다다다 공격을 시작했다. 내가 어제 목소리를 올린 것이 굉장히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행동이었으며, 자신은 어찌 됐든 나의 상사이고 그에 합당한 존중이 없다고 느꼈다고. 다음 브런치 글 주제에도 다루겠지만 여기 서양권애들은 사생활에서나 특히 직장생활에서 목소리를 올리고 소리를 치는 것을 언어폭력과 동급으로 생각할 정도로 예민하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 직장인들은 다 잡혀가야 될 것 같은데. 게다가 나는 소리를 질렀다기 보다는 놀라서 야단을 치듯 세게 말한 것뿐인데. 자기가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어쩌겠는가.


우선 나는 내가 차갑게 몰아붙인 말투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내가 왜 놀랄 수밖에 없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1. 남의 파일에 들어가는 건 우리 사이에 합의되지 않은 일이었고 2. 내 파일에 손대기 전에 왜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미리 나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는지 3.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싶었으면 사본을 만들거나 댓글 기능을 사용하면 되는데 혹시 그것을 사용해볼 생각은 없는지 등등..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도와주려고 했을 뿐, 잘못한 것이 없다며 우기기 시작했다. 나는 대충 예상이 갔다. 어제 내가 쏘아붙일 때는 놀라서 '미안~' 했으나 일 끝나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얘기했겠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밑의 사람이 윗사람에게 야단을 칠 수 있냐며 내가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 트집을 잡았겠지. 그리고 윗사람으로서의 권위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조언을 줬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는 이 참에 내 코를 바짝 눌러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오늘 온 것이다. 이것은.. 논리와 이성의 싸움이 아닌 그냥 그녀의 파워게임이었다.


상사와의 파워게임에서 내가 어떻게 이기겠는가? 우선 사과를 했다. 이렇게 방어적으로 돌변해 끝까지 잘못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데 어쩌겠는가. 다시 한번 사과를 하고 앞으로 이런 일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내가 (^^) 해결책도 제시하고 미팅을 끝냈다. 그러나..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억울해 뒤질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건 말하는 방식 그거 하나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매니저가 잘못한 것들이었는데 매니저는 끝까지 사과도 안 했고 나의 말을 들어주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이 얘기를 씩씩거리며 회사에서 내가 친하게 지내는 다른 팀 디자이너 J에게 말하기 시작하자 J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네가 화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생각해. 정말로 그럴 수 있는 일이야. 나는 디자인하면서 그런 일 한 번도 안 겪어봤고 나는 마이크로 매니징(사사건건 간섭하려 드는 행동)을 진짜 싫어해서 아무리 상사라도 내 파일을 직접 고치고 가르치려 드는 건 정말 나도 참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 매니저가 네가 침착하게 사과도 했고 왜 화났는지 이유도 설명했는데도 사과도 안 하고 권력 내세운 건 정말 별로다."


"그렇지? 내 말이 맞지?!" 흥분해서 맞장구치는 내게 그는 바로 이어 붙였다.


"근데 말이야.. 내가 여태까지 일하면서 느끼는 건데 좋은 매니저 만나는 건 정말 드물고 힘든 일이야. 그리고 너만 사과하고 끝나서 너 마음은 정말 서운하겠지만... 그런데 항상 논리적인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더라고."


"무슨 말이야. 나는 항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최후의 승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우리 회의는 왜 하고 서로 토론은 왜 하는데?"


"너 우리 팀에 B 알지? B는 회의 때 항상 대부분 맞는 말만 해. 굉장히 논리적이고 지적하는 부분도 대체로 옳아. 그런데.. 그 사람이 말을 하는 방식이 때로는 너무 공격적이고 직설적이라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경청했지만 이제는 B의 말을 잘 안 들어. 겉으로는 웃으면서 Okay 하지만 결국 지적한 대로 잘 안 해. 그리고 어떤 미팅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빼놓고 하기 시작했고. 맞는 말만 하긴 하는데 너무 논쟁적이고 회의만 길어지니까."


헉, 맞는 말 대잔치인데도 그 사람 빼고 미팅을 하기 시작한다고? 나는 두려움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J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너 매니저는 사실 속으로 네가 맞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자기가 상사고 지금 온 지 얼마 안됐고 그러니까 자기 권위가 좀 저하되는 느낌일 수도 있을 거고. 그러니까 지금 너 기를 잡으려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 죽어도 자기 밑 사람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 거고. 근데 그런 사람들 은근히 많아. 그럴 때는 잘못을 끝까지 따지고 들기보다는 그 사람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해. 결국 너의 회사생활이 편하고 그 사람을 너의 편으로 만들려면, 그 사람에게 져주는 척하면서 네가 이기는 법을 알아야 해. 네가 그 사람과 논쟁에서 이기고 드는 것이 항상 장기적으로 너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 사람이 너에게 이득이 되게 잘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해, 어쨌든 너의 직속 상사니까."


내가 B처럼 사사건건 논쟁을 하고 따지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대화는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줬다. 나는 관계보다는 원리 원칙을 따지는 경향이 분명히 있었다. 회사가 이성과 논리 위주로 돌아간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결국 회사도 사람들이 모여서 사람들끼리 일하고 사람이 결정 내리기 때문에 회사에서의 모든 결정은 항상 합당하고 공정하지도, 논리적이고 정확하지도 않다. 공정하고 논리적인 의사결정 문화를 가진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베스트지만, 그런 환경이 아닌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논리와 이성, 원칙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능력과 기술, 사람을 이해하고 관계를 잘 다루는 방법도 필요함을 나는 깨달았다.




어찌 됐든, 이 일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내게 필요했던 스킬이 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내 매니저가 했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엔 더 좋은 매니저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이직을 마음먹든 마음먹지 않든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나는 내일도 그 매니저를 보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회사는 내가 억울하다고 내 하소연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곳은 아니었다. 물론 영국 회사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해서 시작한 커리어였지만, 실제로 영국 회사가 좀 더 평등하고 직원들 개인의 다양성과 목소리를 존중해주는 면은 있지만. 결국 어느 나라를 가나 회사는 사람이 모인 단체라는 것을 마음 한구석으로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J는 나를 위로하며 언제든지 이런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래도 이럴 때 내가 항상 힘든 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와 친구들 (그것도 아주 현명한) 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J의 조언을 얻어 '져주면서 이기는 법' '매니저를 매니저 모르게 매니징 하는 법' '태도나 말하는 방식만 바꿔서 사람들의 yes를 받아내는 법' 등등을 연구하고 차츰 실행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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