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매니징 + 나르시시스트 매니저로 인한 번아웃 탈출기
테크회사로 이직을 하고 나서 한동안 브런치에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일이 굉장히 바빴기 때문이었다. 여유롭고 안정적이었던 은행을 떠나 테크회사로 이직을 한 것은 내 커리어 성장에 집중하기 위한 의도적인 결정이었다. 미래에 가정을 꾸린다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가족이 생기면 자연스레 가족에게 쓸 시간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여 최대한 에너지 넘치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지금) 커리어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놓고 싶기 때문이었다.
현 회사로 정하기까지 9개월이나 걸린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매니저를 잘 고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경험들로 인해 매니저가 얼마나 회사생활 행복도에 영향을 미치는지 익히 알고 있었고, 면접을 봤을 때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아무리 타이틀이 좋아도 매니저가 나와 핏이 맞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과감히 제외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인 만큼 이 회사에서의 첫 매니저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매니저들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나와 일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퍼즐처럼 딱 맞는 매니저를 만나고 첫 5개월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내 최고의 매니저는 회사에서 주는 안식휴가를 갔다. 3개월이 넘는 안식휴가 기간 동안 내게 임시 매니저가 배정되었고, 임시매니저는 내 원래 매니저보다 부족한 점이 많아 보였으나 크게 여의치 않았다. 왜? 어차피 나는 3개월 후 최고의 매니저를 다시 만날 거니까...
매니저가 돌아오기로 한 날로부터 딱 이틀 전, 나는 내 매니저의 매니저, 즉 팀장에게 갑작스러운 1:1 미팅이 잡혔다. 내 매니저가 안식휴가 이후 회사에 돌아오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이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안식휴가 도중 회사를 그만둘 경우, 회사에서 지정한 노티스 기간을 채우지 않고 그만둘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렇게 그녀는 영영 회사에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링크드인으로 그녀와 연락을 취해 간간이 안부를 들을 수는 있었으나 회사에서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임시매니저는 갑작스럽게 나의 정식 매니저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내 매니저가 관리하던 리포트 (부하직원)이 3명이었는데 그녀가 떠남으로써 갑자기 임시매니저가 8명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팀장은 최대한 빨리 새 매니저를 뽑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간은 계속해서 길어졌다. 더 이상 임시매니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에는 회사에서의 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임시 매니저가 8명을 관리했기 때문에 일을 엉성하게 했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엉성한 사람이라서 8명을 관리할 때도 엉성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내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거의 대부분 까먹거나 흘러 넘기는 부분들이 많았다. 매니저와의 관계도 give and take 이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는 나는 바로바로 시간을 맞춰서 또는 미리, 한 번도 까먹지 않고 심지어 커뮤니케이션도 계속하면서 그의 요구를 우선시해서 들어주었다. 그러나 반대상황이 되었을 때는 그는 은근슬쩍 말을 돌리거나 불확실하게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리포트로서 가장 중요한 내 퍼포먼스 리뷰가 밀리거나 제때 써서 제출해야 되는 OKR들이 늦어지는 등의 상황들이 발생했다.
회사 재직을 한 지 1년이 돼 가는 시점, 나는 애초부터 명확하게 나는 승진에 관심이 있고 어떻게 하면 다음 레벨로 올라갈 수 있는지 지속적인 피드백을 달라고 매니저로부터 요구한 상태였는데 이러한 임시 매니저의 태도로 인해 회사에서의 나의 커리어 성장은 갈 곳을 잃은 듯해 보였다.
임시 매니저가 나를 맡은 지 8개월이 지난 즈음, 드디어 새 매니저를 뽑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새 매니저를 뽑음으로써 새 팀이 생길 거고 내가 그 팀 안으로 유일하게 혼자 들어간다는 소식도 함께. 사실 이 소식의 뒷 배경에는 내가 내 커리어 성장을 위해 밑밥(?)을 깐 측면이 어느 정도 있다. 임시 매니저의 무능함 (인지 아니면 노력부족인지)에 지쳐있던 나는 매니저 대신 매니저의 매니저인 팀장과 1:1을 자주 잡아 내 커리어 목표, 성장들을 이야기했고 내가 성장을 위한 프로젝트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안 팀장이 회사에서 내년에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게 될 팀에 나를 넣어준 것이었다. 나는 뛸 뜻이 기뻤다. 이 새 팀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고, 이걸 성공적으로 끝내기만 하면 정말 강력한 승진 케이스가 생기는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승진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할 기회는 자주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회가 내가 지난 1년간 정말 온갖 물 밑 작업을 하며 준비해 온 기회였기 때문에 나는 정말 잘하고 싶었다. 지난 매니저들의 경험을 통해 새 매니저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지도 노하우가 많이 쌓인 상태였다.
런던 오피스에서 만난 그녀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전 임시 매니저에게 한번 데인 경험이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모든 매니저와의 관계를 방어적이거나 수동적으로 시작하는 건 내 가치관도 아니며 성공적인 매니저와의 관계에 도움이 될 리도 없었다. 내가 보통 새로운 매니저를 만나면 하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매니저가 회사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을 주고, 긍정적인 관계를 위해 일 얘기부터 다다다 쏟아내기보다는 먼저 인간으로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 다음, 분위기가 좀 편안하다 싶을 때 (보통은 3-4주 차) 유저 프로파일을 쓰듯이 미니 워크샵 같은 방법으로 서로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것이다. 나중에 협업을 할 때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이 생기지 않기 위해. 예를 들면 요즘에 유행하는 MBTI 같은 정보를 알려줄 수도 있고, 아니면 남들이 자신에 대해 자주 오해하는 부분을 미리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은 성격에 대해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히나 영국인 매니저를 대할 때 이런 부분에 대해 미리 언급을 준다던지) 본인이 어떨 때 동기부여가 되는지, 가장 관심 있는 커리어 목표는 무엇인지 등등, 앞으로 회사생활을 하면서 서로 간의 관계 다지기에 도움이 될 유용한 정보들을 매니저와 리포트 간에 나누는 것이다.
이건 효과가 꽤 좋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 기술, 처세술, 회사 정치술 등등의 전제조건은, 다른 상대방도 논리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이성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라면? 아무리 좋은 인간관계 기술도 먹히지 않고 그냥 피하는 것이 답이다. (실제로 그녀는 우리가 서로 유저프로파일을 쓸 때 공유했던 내용들을 훗날 내 약점으로 잡아 내가 인사고과 대상이 돼야 하는 이유에 집어넣었다.)
내 커리어 인생 최악의 나르시시스트 매니저와 8개월간 고생하며 번아웃을 겪다 가까스로 벗어난 이야기들을 앞으로 하나씩 천천히 이곳에 풀어가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