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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Sep 07. 2024

시로 납치하다 / 류시화 / 2018

책을 가장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나이를 먹는 것이다. 조금 덧붙여, 이것저것 인생의 쓰라린 경험을 하고 육체의 고통을 겪으면 더욱 좋다. 책이라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아는 만큼 읽히고 느껴지는 법이다.


내가 류시화의 글을 점점 흡수하고 있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이다. 어디 그뿐인가. 노숙을 하면서 삶의 벼랑 끝까지 달려간 시인의 처절한 고백은, 절망과 고통을 가득 끌어안고 살았던 나에게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생 절반 이상을 살아보니 이제는 그의 글이 다 보인다. 어려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겉멋 든 시인의 독백 같은 것으로 느껴졌지만, 고단한 의식세계와 늘어진 육신을 이끌고 힘겨운 삶을 살아온 사람의 넋두리는 동병상련의 번개처럼 내 안에 내리친다. 읽을 때마다 그렇다.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시인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인도여행기와 명상수필로 더 큰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집들은 에세이의 상아탑 같은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그의 수필과 에세이를 먼저 읽고 그다음에 시를 읽으면 제격이다. 뭐 그것도 내 생각일 뿐이지만.


왜 삶을 사는가에 대한 갈등과 이 지긋지긋한 현대 도시인의 각박하고도 진흙탕 같은 삶 속에서 근 5년간 그는 나의 멘토였다. 내가 정확히 고민하는 일, 내가 괴로워하던 것들이 그의 고백 속에서 별처럼 빛난다. 내가 짓밟아버리고자 했던 것, 불사르고 죽여 없애고자 했던 고통들이 그의 글 속에서는 하나하나 통증을 동반한 성숙의 씨앗으로 재탄생한다. 그 속에서 울고 웃고 미소 짓고 한숨짓는다. 피와 상처를 머금은 언어가 모두 가슴속에 와서 알알이 박힌다.


[시로 납치하다]는 전 세계 시인들의 보석 같은 명시들을 추려내어 류시화 자신의 삶과 견해를 투영한다. 독자들에게 일종의 인생수업의 교재 같은 느낌을 준다. 함축되고 상징적인 의미의 시들을 류시화 특유의 통찰과 사색으로 해석하여 정서적인 힘과 용기를 얻도록 해준다. 마치 나의 이야기를 하는 듯 모든 내용들이 깊은 울림과 파동을 전달한다.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을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두 사람이 노를 젓다 / 라이너 쿤체>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원 / 에드윈 마크햄>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사막 / 오르텅스 블루>


마침내 그날이 왔다

꽃을 피우는 위험보다

봉오리 속에

단단히 숨어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날이

<위험 / 엘리자베스 아펠>


삶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이들과, 고난과 실수로 얼룩진 인생의 쓰라림을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기꺼이 권하고 싶은 책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더욱 경험하고 나이를 먹고 패배하기를 바라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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