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개인 그리고 공동선

마이클샌델, 한병철, 김태형

by Silverback

70~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 즉 정부의 개입이 없는 완벽한 글로벌 시장경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부의 공정한 분배로부터 소외된다. 경제적 양극화, 특히 엘리트를 제외한 하위영역의 간극이 심해지는 것. 이러한 경제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90년대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그간 막대하게 소모되었던 군사 관련 재원들이 사회복지나 민주사회의 공동선의 영역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정부의 개입이 없는 글로벌 시장경제와 자본의 유입이 서로를 요구하면서 자본권력이 막강해지는 악순환이 생겨난 것.


냉전이 끝나고 또 구소련은 해체되고 결국 미국이 갖고 있는 미국식의 체제 이것만 남은 상태다 보니까 겸손이라는 걸 전혀 이제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체제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인데, 표면 아래로 보면 많은 사람들은 불만을 느끼고 무기력하게 느끼고 있는데 이러한 불만이 언젠가는 폭발할 수 있다... 내 의견과 내 목소리가 더 이상 존중되지 않는다라고 느끼고 있는 그런 시대 상황... / 마이클 샌델 인터뷰


이러한 신 자유주의 속 자본주의의 특징은, 근대화 이전의 규율사회가 갖고 있었던 공동체적 질서를 따르지 않으며 억압이나 규제, 강압이나 독재의 일방향적인 제제를 벗어난다. 오히려 사람들은 개인화되고 그 어떠한 강제나 외부적 압력 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소모해 가면서 자본의 암묵적 강제에 구속된다. 아니, 누군가에 의해서 구속된다기보다는 자신이 스스로를 구속하여 끊임없이 자본을 갈구하도록 채찍질하는 것이다. 즉, 개인은 자기 자신의 경영자 혹은 자기 자신의 지배인이 되고, 그와 동시에 또한 자기 자신의 노동자나 노예가 되는 것. 이러한 자본주의 속 개인화는 외부의 강제가 없다는 점에서 자율성을 띠며 이는 자기 착취의 형태로 나타난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긍정성을 모티브로 하는 성과주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의 경쟁상태에 있다. 이러한 성과주체는 자기를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으며,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욱 효율적인 것이다. / 한병철 피로사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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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된 자기 착취의 형태는 외부로의 소통을 가로막는다. 자신들 모두가 하나하나의 고치가 되어 스스로 벽을 쌓고 내부를 응시하는 삶을 추구한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고, 문제나 갈등이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지극한 수학적 논리와 경제적 계산으로 무장되어야 하는 상태가 된다. 이는 타인에 대한 배려, 이해, 관용, 공감 같은 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서, 언제나 측정이 가능한 것 계산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향하게 만든다. 어떠한 것을 이루어가는 서사적 과정은 배제되고, 그 결과로 남은 수치와 재산 같은 것들이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패배한 사람은 몰락하는 것이 당연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를 수 밖에 없게되고, 승자는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 이로써 분배의 격차는 더욱 심각해지고 사회적 양극화와 갈등은 치솟는다.


한국에서의 정의는 사회적 공정성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정성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사회자체를 개혁하는 것을 포기하고 개인 간 경쟁에서의 공정성, 즉 사적이고 이기적인 공정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죠.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공정이라는 것은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능력은 곧 돈을 버는 능력을 말합니다. / 김태형 심리학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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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극우의 득세는 무엇을 뜻하는가? 무한 경재 체제 속에서 패배한 자기 자신의 노동자들, 혹은 개인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세계에서 완벽하게 따돌림당한 사람들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해주고, 당신들에게 발언권과 영광을 되돌려주겠다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엄청난 지지를 받지 않겠는가. 21세기 극우의 등장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부의 양극화, 자신의 의견과 신성한 노동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박탈감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무언가 그들이 잃어버린 것, 대접받지 못한 것을 되돌려준다는 구호를 배경으로 한다. 옛 영광의 재현, 위대한 질서의 수립 같은 것을 약속함으로써 기존 엘리트들이 독점한 이익과 권력을 되찾아올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자신이 그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극우 정치인들이 대부분 이 위대함 또 과거의 영광 이런 것들을 약속하곤 합니다. 이게 어떻게 먹히는가가 더 이제 중요한 질문 같은데요. 그 이유는 아무도 내 의견을 경청해 주지 않고 내 목소리가 의미가 없구나 하고 어떤 무력감을 느끼는 그런 상태에서 국가적인 위대함, 다시 영광스러운 시대를 이제 살 수 있게 해 줄 것 같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 거기에 혹해서 이를 믿게 되는 거죠. 일례로 미국에서 수백만 명의 이민자를 추방해 버리면 다시 미국이 위대해질 거다라고 약속을 하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거든요. / 마이클 샌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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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극우의 형태가 '자유'라는 단어의 도식화로 나타난다. 자유대한민국, 자유한국당, 자유민주주의, 자유대한포럼, 자유마을, 한국자유회의와 같은 단어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생성된다. 마치 공동체와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진보적 가치관이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는 식으로 매도하면서, 각 개인이 그러한 것에 구속되지 않고 마음대로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구호가 도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소비자적인 자유, 즉 물질적 자유는 막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그러한 자유, 즉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그 경제적 편중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그러한 구호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실제로 공동체나 집단에 소속되어 나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창조하고 싶은 시민으로서의 자유가 더욱 큰 만족감을 준다. 어찌 보면 자유라는 것은 변증을 드러내는 반어의 가치일지도 모른다. 자유라는 것은, 나 홀로 떨어져 나온 뒤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일종의 '방종'이나 소모가 아닌, 관계 맺고 있음에서 발현되는 '창조(생산)'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자유롭다는 것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자유로우니까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걸 살 수 있어. 이런 소비자로서의 자유는 사람들에게 큰 만족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더 강력한 자유는 바로 시민으로서의 자유,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내가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고, 내 의견을 경청해 주는 사람이 있고,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 시민의식을 갖고, 여러 가지 일을 행하는 것 그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는 어떤 소비자적인 자유보다 더 큰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느끼고 여기서 얻는 만족감이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 마이클 샌델 인터뷰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오히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묶여이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관계의 어휘이기 때문에 연결이 고려된다 / 한병철 시간의 향기 中


신자유주의, 신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자기 안에 갇혀서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 부의 양극화에서 따돌림당한 사람들, 자책과 패배감이 자신 안으로 쌓여서 외상이 아닌 내파의 형태로 안에서 병들어간 사람들은 심각한 우울증을 겪는다. 외부로 숨이 트여 피로가 배출되지 못하고 자기 안에 쌓여서 종양화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배출구를 찾지 못해 코너에서 고양이에게 돌변하는 쥐처럼 폭력을 취하기도 한다.


자기 관계적 강제구조는 우울증과 소진증후군 등의 신경성 질환을 유발하며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 한병철 피로사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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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나 연대감이라는 것이 상실되어 가는 시대이다. 지금의 학생들은 분열화, 개인화되어 있다. 조별 숙제와 팀별 공동과제 또한 각자의 방 안에서 손바닥 안에 펼쳐진 각자의 스마트폰을 통해서 서로 화면상으로 공유될 뿐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영사기를 돌려대던 커다란 영화관도 이제는 개인들의 각 가정의 TV 모니터 화면 속으로 파편화되어 옮겨간다


장터의 분위기를 보아가며 흥정과 거래를 경험하고 공간의 분위기와 수 많은 사람들의 구매심리를 피부로 느꼈던 시간들 또한 원자화되어 각 개인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속 구매버튼 속으로 흩어진다. 구매를 하기 위하여 시장에 갈 필요도, 또한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할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지하철에 나란이 앉은 연인들도 한쪽 손은 맞잡고 있지만 다른 손으로는 각자의 휴대폰을 쳐다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회사에서 퇴근 후 회식을 하는 문화는 사라져간다. 남은 시간에 개인들은 집으로 돌아와 1인용 소파에 누워 TV에서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를 보고, 폰으로 쇼핑을 완료하며, 어제 비대면으로 배달된 음식을 혼자서 조리해 먹는다.


20세기의 철학자들이 간과했던 것, 디지털과 인터넷의 흐름 속에서 과거 규율사회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분열된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마주한 극단적 이기주의와 우울증은, 공동체와 사회연대의 관계로 치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찾아 나서는 오디세우스의 노스토스처럼 사람은 공동체로 돌아와야 한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에 대한 타인의 평가, 그리고 그러한 소통을 바탕으로 한 나의 창조적 행동. 그리고 그러한 행동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내에서의 가치 선순환. 다시 그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개인의 폐쇄적인 누에고치를 벗어나와 타인과의 관계, 내가 아닌 것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시행착오와 갈등을 통한 의식의 크로스체크를 몸소 실행하고 나와 너, 나와 타인, 나와 세계를 거듭 오가면서 촘촘한 사유의 거미줄을 쳐야한다.


2천년 전 아우렐리우스가 묵시했던 그 간결한 충고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고민해볼 일이다.


이성적이고 공동체적인 동물에 어울리도록 하라. 이성적 동물의 선은 공동체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서 태어났다. 언제나 공동체에 유익하고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추구하라. 너 자신이 공동체 조직의 보완적 구성요소이듯, 너의 행동도 공동체적 삶의 보완적 구성요소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中


끝.





<참고자료>

한병철 - 피로사회, 우울사회

마이클 샌델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

https://www.youtube.com/live/kT1WvUmMF40?si=1hq4fWPdwUTYwhWQ&t=6376

김태형 심리학자 다스뵈이다 인터뷰

https://youtu.be/WAVo0QoJMiY?si=vZVl1HtFlhbDaXFr&t=3210

서부지법 폭동 관련 MBC뉴스

https://imnews.imbc.com/news/2025/society/article/6680116_367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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