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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림 Dec 23. 2020

좌절되는 꿈에 대하여: 연극 <생쥐와 인간>을 통해

연극 리뷰: 생쥐와 인간

생쥐와 인간이 세운 정교한 계획은
자주 빗나가고,
우리에게 약속된 기쁨 대신
회한과 아픔만을 남기잖니!

The best laid plans of mice and men
Go often askew
And leave us nothing but grief and pain
For promised joy!

Robert Burns, “To a Mouse”의 현대어 번안, 7연 3~6행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는, 「생쥐에게」에서 집을 잃은 생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겨울 직전에 가족들과 지낼 보금자리를 망가뜨려서 미안하다고, 나도 너와 똑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쥐에게, 그래도 네가 낫지 않냐고, 너는 현재만을 생각하면 되는데, 나는 과거와 미래도 생각해야 해서 두렵고 괴롭다고 말을 덧붙인다. 1785년 가을에 밭에서 쓰인 이 시는, 사회의 격변기 1937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으로 이어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대공황 시대의 노동자 조지와 레니, 그리고 주변 인물을 통해 개인의 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의, ‘생쥐와 인간의’ 꿈의 좌절도 그려낸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 얼마나 아름다운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을 희곡으로 다시 편집하였고, 이 대본은 미국 브로드웨이의 무대 위에서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2018년 초연 이후, 한국에서 2019년에 재연되고 있는 연극 <생쥐와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극을 최초로 국내에 올린 박지혜 연출은, 대본이 가진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새로운 장치를 추가했다. 원작과 달리 1인 2역을 통해 한 배우가 대조적인 두 배역을 맡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인물이 사건을 일으킨 직후, 같은 배우의 다른 배역은 그 비극을 고스란히 겪는다. 늙고 냄새나는 개를 캔디 영감은 늘 안고 다니고, 칼슨은 그 개가 눈엣가시여서 죽여버린다. 개를 죽이려는 칼슨의 분노와 캔디 영감의 슬픔을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다른 역이라고는 하지만 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온 폭력을 같은 사람이 온전히 뒤집어쓸 때, 그 잔혹함은 배가 된다. 무대 역시, 기존의 극보다 인간의 삶의 내재한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새롭게 구성되었다.

    인간도 생쥐와 마찬가지로 ‘구조’라는 우리 속에서 갇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 세트는 햄스터 케이지처럼 만들었다. 일반적인 무대의 바닥과는 달리 단단하지 않은, 원두로 깔린 바닥(2019년에는 팥으로 수정되었다)은 인물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똑바로 걸을 수 없게 한다. 추가된 자체 OST 10여 곡도,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하는 구름과 하늘, 밤이 될 때마다 빛나는 별빛도 인물들의 운명과 상관없이 아름답기만 하지만, 그 아래에서 인물은 삐뚤삐뚤 걸으며 어떻게든 헤쳐나가 보려 안간힘을 쓴다. 2019년 재연의 민준호 연출은, 여기에 더해 원작에서는 헤픈 여성으로만 묘사되는 컬리 부인과, 2018년 극에서는 빠졌던 흑인이자 장애인인 크룩스의 서사가 추가했다. 약자인 두 인물의 이야기를 더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https://www.nocutnews.co.kr/news/5221664)




http://www.viva100.com/main/view.php?key=20191003010001080

    두 이주 노동자인 조지와 레니는, 2019년 9월 25일 기준으로 고상호 배우와 서경수 배우가 맡았다. 고 배우의 작은 키와 날카로운 눈매는, 영리하고 예민한 조지의 성격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서 배우는 큰 덩치와는 달리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레니를 잘 구현해낸다. 말투까지도 레니 그 자체다. 이렇게 대조적인 조합의 조지와 레니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레니를 조지는 지겹다고 말하지만, 정작 조지의 꿈, 자신만의 집과 농장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지탱해주는 것은 레니다. 매번 조지의 꿈을 물어보기 때문이다. 레니의 뒷수습을 맡으며 2인분의 삶을 지키느라 늘 지쳐있지만, 조지는 레니가 우리의 집과 농장에 대해 말해달라고 할 때는 눈을 빛낸다.


    조지는 레니가 있어서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조지는 다른 노동자들은 술과 여자에 돈을 낭비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지만, 우리는 서로가 있기 때문에, 서로 지탱해주기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 피곤해하면서도 조지가 끝까지 레니를 버리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레니는, 끊임없이 그 특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작은 동물을 좋아하지만 반복해서 그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컬리 부인과 친해지고 그의 머리칼을 만지다가 그의 삶을 앗아간다. 극 중 조지는 말한다. 레니는 자연재해 같은 존재라고,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자신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http://www.viva100.com/main/view.php?key=20191003010001080

    그 가운데에서 컬리 부인과 조지, 레니의 꿈은 무너진다. 잔인하게도, 이 극은 꿈을 이야기하며 반짝거리는 인물의 독백 직후에 그 꿈의 좌절을 보여준다. 밝게 빛나는 조명과 희망적인 노래가 무대 위를 가득 채우고 인물은 목소리 높여 꿈을, 집을 가지고, 부드러운 동물을 잔뜩 만지고,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말한다. 그리고 곧장 다음 장면에서 그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혹자는 ‘생쥐와 인간의 꿈’이라는 부분에 주목해 조지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인간이며, 레니는 현재만을 생각하는 생쥐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지가 레니를 책임지며, 결국 사람을 죽인 레니를 죽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힘을 가진다.


    이제는 쓸모없어진 개를 죽여야 하는 캔디 영감의 고뇌와 자신을 믿어주던 레니를 죽여야 하는 조지의 내적 갈등은 겹쳐진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인간’인 조지의 꿈을 망가뜨리는 것은 ‘생쥐’인 레니다. 심지어 캔디 영감의 동참으로 돈이 모여, 꿈이 바로 눈앞에 있는 순간에 말이다. 그 과정에서 레니보다 약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다.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컬리 부인은 배우가 되기 위해 야반도주를 시도하지만, 레니 때문에 꿈을 이루는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로부터 온전한 남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던 컬리는, 레니의 폭력으로 장애를 얻고 아름다운 부인을 잃는다. 이 상황에서는 레니를 온전한 생쥐, 로버트 번스의 시에서의 “보릿단의 이삭 하나(A random con-ear in a shock’s)”만을 취하는 순수하고 가엾은 생쥐라고 보기 어렵다. 20세기에 쓰인 이 소설의 의도와는 달리, 계속해서 죽음을 만드는 레니의 폭력성과 그런 그를 옹호하는 조지는 21세기의 우리가 그들에게 마냥 공감할 수는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극이 현재까지도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강자가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구조와 꿈이 사그라드는 과정에서의 아이러니 때문이다. 조지는 레니와 도망치는 대신 살기 위해 레니를 죽이는 것을 선택한다. 연극은 이 이후 조지의 삶을 묘사하지 않지만, 조지가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닌, 그토록 싫어했던, 평범한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말을, 꿈을 버리는 것을 선택한 것은 조지이기도 하다. 어쩌면 너무 지쳐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멀게만 바라봤던 꿈이 막상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니 두려웠을까. 그래서 조지의 고통은 고스란히 다가온다. 레니를 버리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지 못한 것, 그의 미래를 예측하면서도 떠나지 못한 것, 결국 레니와 희망을 모두 버리고 자기 자신의 미래를 죽인 것. 꿈은 이뤄지지도 않았는데, 그 좌절은 너무나도 절망스럽다. 별빛과 노을, 현악기의 선율 속에서 흘러가는 극은 비참하기만 하다. 마지막에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조지는 레니를 죽인다. 연극이 끝난 뒤에도, 조지 역의 고상호 배우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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