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공주

눈과 얼음

by 은림



열린 창으로 겨울의 눈보라가 들이닥쳤다. 하얗고 포근한 눈의 입자들이 발코니 기둥 안까지 밀려들어 커튼처럼 늘어진 얇은 비단 망사에 오소소 달라붙었다. 이세는 망사 위에 엷게 뒤덮인 눈을 쓰다듬었다. 희고 투명한 우윳빛 손가락은 눈보다도 차가워서 눈 조각들은 더욱 조밀하게 응결되어 얇은 얼음이 되었다. 얼음 망사는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깊고 고요한 저물녘에 그 소리는 아주 상냥하고 시원했다.

“이세. 이세.”

누니아가 부르는 목소리에 이세는 얼른 침대 속으로 숨었다. 어떤 손님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잠든 채 하면 일부러 깨우지는 않을 것이다.

누니아는 이세의 방문을 열었다가 가볍게 부풀어 오른 침대를 보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조용히 들어와 발코니 문을 닫았다.

“정말 주의가 부족하다니까.”

이세는 누니아가 나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렸다. 더 이상 복도를 오가는 기척이 없었다. 이세는 소리 없이 침대를 빠져나가 닫힌 창문 앞에 섰다. 새삼 창을 열 수는 없었다. 그랬다 간 애써 잠든 척한 것이 들통나고 만다.

하늘은 붉었다. 함박눈에서 진눈깨비로 변한 눈 입자들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시야를 가렸다. 이세는 입김으로 유리 너머의 눈을 녹여 보려 했다. 하지만 입김이 더 차가워서 진눈깨비는 더욱 견고하게 달라붙었다. 이세는 하는 수 없이 살짝 문을 열었다. 상쾌한 미풍이 밀려들었다. 이세는 좁은 창 틈으로 따뜻한 갈색으로 물든 성하의 작은 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하늘 아래 따뜻한 갈색으로 물든 작은 지붕들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며 저녁 짓는 냄새가 흘러왔다. 이세는 공상에 빠져들었다. 어둠이 가라앉는 좁다란 골목의 아늑한 모퉁이, 거기 웅크린 고양이, 그 옆의 소년, 그 손에 들린 단맛 없는 빵, 그 빵을 나누는 지저분한 손, 받아 드는 노파의 쭈글쭈글한 얼굴, 상냥한 웃음, 불똥이 튀는 빨간 장작불……. 거기서 이세는 몸서리쳤다. 상상만으로도 불은 그녀의 눈을 태웠다. 그래도 이세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진짜 불을 보는 게 그녀의 소원이었다. 벽화 속에 얼어붙은 불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불을.

‘넌 녹아 버릴 거야.’

갑자기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누니아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였다. 무심코 뒤에 누니아가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뒤돌아 볼 정도였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들은 얼음 성의 공주, 눈으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흰 피부와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의 눈동자, 그리고 겨울의 심장을 가진 자들이었다. 불을 동경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공주님!”

난간에서 원숭이 같은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 이세를 놀래켰다.

“꺄…”

소년은 비명이 새 나오려는 이세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잠깐! 나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진정해 줘. 해 끼치러 온 거 아니야.”

이세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소년의 손은 따뜻했다. 그리고 시커맸지만 아무 냄새도 안 났다. 그 청결함이 이세를 안심시켰다.

“공주님 오늘 밤에 시간 있어?”

“저속한 말투구나.”

“거참 공주님, 보기만큼 딱딱하네.”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세는 더럭 겁이 났다. 소년을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시간 있으면 같이 놀자. 새벽까지는 바래다줄 테니까. 어때?”

소년은 화난 것이 아니었다. 이세는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소년은 그녀의 손을 끌고 발코니를 내려가고 있었다.

“여긴 3층이야!”

“나도 눈 있어 공주님, 바보 취급하지 말라고.”

소년의 말투는 거칠었지만 악의는 없었다. 그는 먼저 훌쩍 큰 나무 가지를 타고나서 이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안 갈 거야?”

이번에는 손을 잡아끌지 않았다. 이세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가.”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소년은 이세를 확 끌어안고 난간 아래로 뛰어 내렸다. 깜짝 놀란 이세가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에 소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소년의 목덜미에선 뜨겁고 건조한 풀 냄새가 났다. 이세는 연이어진 충격적 사건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그 사이 소년은 양팔에 이세를 앉고 날렵하게 정원에 착지했다.

“미안, 손이 둘 다 바빴어.”

“누니아라면 뺨을 때렸을 거야.”

소년은 행동만큼 눈치도 빨랐다.

“아, 그 얼굴 긴 공주님? 통통한 공주님은 아니고?”

소년의 능글능글한 얼굴에 이세는 울컥했다.

“이세야. 그리고 누니아는 얼굴 긴 게 아니라 달걀형이야. 미인이라고.”

“난 노마. 이세 공주님께 인사 올릴게.”

노마는 이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눈 하나 깜짝 안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맘에도 없는 말을 잘도 하는구나.”

이세가 눈살을 찌푸리자 노마는 웃었다.

“공주님도 그래.”

둘은 함께 성을 빠져나갔다.


노마가 이세를 데려간 곳은 굽이진 골목, 그녀가 늘 꿈꾸던 성하였다. 이세는 기쁜 한편으로 두려워졌다. 낯선 곳의 낯선 사람들, 그녀가 전혀 모르는 세상이 거기 있었다. 좁고 초라한 골목의 오줌 냄새나는 귀퉁이, 개똥, 썩어 가는 쓰레기, 그 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그 속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그들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뺨이 얼었잖아! 괜찮아? 거봐, 거기 엄청 추울 거랬지. 동상 걸렸겠다.”

너무나 자연스레 노마의 뺨을 쓰다듬는 여자애를 보고 이세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리고 무척 미안해졌다. 얼음 성은, 그녀들이야 상관없지만 보통의 따뜻한 몸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괜찮아. 동상 같은 거 안 걸려. 여기 앉아, 공주님, 지저분하지만.”

노마는 여자애의 손을 밀치고 자리를 권했다. 그때 노파가 그들을 불렀다.

“이리로 오너라, 여기가 더 따뜻해.”

노파는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그들에게 내주었다. 노마는 극구 사양했지만 노파가 막무가내여서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웬일로 멀끔히 씻었누. 아하, 이쁜 공주님 때문에?”

노마의 옆얼굴을 흘끔 대던 노파의 웃음에 이세는 얼굴을 붉혔다. 온기는 없지만 그녀 안에 돌고 있는 피도 분명 붉은색이었다.

“쉬, 늙다리 할망구.”

노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구 어떠냐, 너 애가 이렇게 멀끔한 거 본 적 있냐, 유카?”

노마를 마중 나왔던 소녀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씻으나 마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봤어요?”

“이 계집애.”

노마가 눈을 부라리자 유카는 입을 다물었다.

이세는 자기 때문에 일어난 다툼은 아랑곳 않은 채 중앙에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만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려 해도 불이 그녀를 따라오는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결정화된 눈과는 다른 부정형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눈부신 존재. 견고한 얼음 조각은 녹으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불은 스스로를 태워 버리고도 살아남는다. 더 강렬하게 열기를 전하면서.

“그만 봐, 공주님. 눈이 타 버려. 당신은 얼음 공주님이니까.”

눈을 감싼 노마의 손이 뜨거워서 이세는 불쑥 가슴이 아팠다.

“무엄해.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니야. 누니아라면 당장 벌을 내렸을 걸?”

“또 그 공주님 이야기로군. 너는 그 사람이 아니잖아?”

노마가 투덜거렸다.

“그리고 네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다면 아예 접근 안 했어,”

이세는 갑자기 치욕을 느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왜 나를 데려온 거지? 얼음 공주를 납치해서 몸값이라도 받으려고? 둘 중에 고르려니 누니아보다 내가 쉬워 보였어?”

노마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흥분하지 말고 앉아, 공주님. 이건 엄연히 초대고 공주님은 받아들였어. 그리고, 공주님은 항상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잖아. 바로 여기를.”

이세는 부끄럽고 화가 났다.

“돌아가겠어.”

“가지 마.”

“갈 거야.”

노마는 한참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바래다줄게.”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찾아가라 그러지?”

“유카!”

노마는 엄히 꾸짖고 악의적인 시선에서 이세를 보호하려는 듯 어깨를 안고 나왔다.

골목을 빠져나가 성으로 향하는 들판 길에서 이세가 말했다.

“미안해.”

“덜컥 불러낸 이쪽 잘못이지. 공주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노마의 눈을 보면서 이세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응. 좋았어.”

그늘져 있던 노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드러난 달빛 아래 소년의 웃음은 너무 천진해 보였다.

“좋았어, 공주님. 가끔 놀러 오지 않을래? 그 얼굴 긴 공주님한테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좋아.”

이세는 선뜻 받아들인 자신에게 놀랐다.


이세는 나올 때와 똑같은 발코니를 통해 돌아갔다. 노마의 몸은 굉장히 날렵하고 강해서 이세를 매달 고도 원숭이처럼 나무와 성벽을 타올랐다.

“무겁지 않아?”

이세는 잔뜩 걱정이 되었다. 노마는 빙긋 웃었다.

“새털처럼 가벼워. 공주님이니까.”

이세는 심장 뛰는 소리가 노마의 등에 전해질까 봐 몸을 움츠렸다.

“그러지 마, 공주님. 떨어진다고!”

노마는 발코니 난간을 잡고 어린애 추스르듯 이세를 추스른 후 가뿐하게 마지막 단계를 뛰어넘었다. 발코니에 내려진 이세는 아슬하게 난간에 웅크려 앉은 노마의 넓은 어깨를 새삼 깨달았다. 매달렸던 이세의 손이 아기처럼 작아 보이게 크고 어른스런 어깨였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아직 천진하고 솔직했다. 이세는 노마의 눈에 들어 있는 불을 보았다. 모닥불처럼 뜨겁진 않지만 상냥하고 따스한, 촛불처럼 작은 불꽃이었다.

“잘 자, 공주님.”

노마는 이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이세는 커튼 뒤로 달아났다. 가슴이 뛰는 것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반응은 심장에 치명적이다. 겨울 심장은 그런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멈추게 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세는 지독한 피로를 느끼며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잠이 깨었을 때, 이세는 침대를 흥건히 고인 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침대맡 거울에 비친 그녀는 어제까지의 그녀가 아니었다. 아기 엉덩이처럼 터질 듯하던 뺨이 보기 좋게 둥글어지고 몸의 모난 부분들도 약간씩 녹아서 굴곡이 매끄럽고 세련돼져 있었다. 이세는 당혹스런 한편으로 기뻤다. 노마는 누니아를 얼굴 긴 공주라고 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이세는 항상 그녀를 닮고 싶었었다. 그런데 오늘의 이세는 누니아를 조금 닮아 있었다. 이세는 가슴이 설렜다.


그 뒤로도, 이세는 종종 몰래 마을에 내려갔다. 뒷골목 사람들은 반갑게 그녀를 맞아 주었고, 재미있는 놀잇감이나 맛있는 과자가 없어도 항상 유쾌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적당한 온기는 그녀의 피부 결빙을 자극해서 더욱 투명하고 매끄럽게 만들었다. 어느새 이세는 누니아만큼 아름다워져 있었다.

이세를 데리러 오거나 데려다줄 때 성하의 언덕을 둘만 걷게 될 때면 노마는 황홀한 표정으로 이세를 보았다. 이세는 그 눈에서 커져 가는 불이 보기 좋았다. 둘은 항상 손을 잡았고, 가끔 입을 맞추게도 되었다.

그러는 동안 노마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훌쩍 자랐다. 계절을 훌쩍 건너뛴 것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이세의 가슴은 누니아처럼 부풀어 올랐다. 노마는 그녀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만져 보고 싶어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끌어안는 몸짓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세는 모른 척했다.

“잠깐 저 좀 봐요, 공주님.”

어느 날 유카가 이세를 불렀다. 이세는 내키지 않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신분 같은 거 빼고, 여자 대 여자로 말하지요. 노마한테 접근하지 마세요.”

이세는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왜 그런 말을 너한테 들어야 하지?”

“사람들이 뭐라고 쑥덕거리는지 하나도 못 들었나 보죠?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없다는 건 아녜요. 똑똑히 알아두라고요.”

이세는 둘만의 산책, 입맞춤 같은 것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얼굴은 창백한 그대로였다.

“참으로 무례하군.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

유카의 얼굴이 구겨졌다.

“글쎄요?”

그녀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그리고 휙 돌아섰다.

“한 번쯤은 정해진 시간이 아닌 때 같은 장소에 와 보세요. 전혀 다른 곳처럼 보일 테니까요.”

이세는 이 대화를 별로 마 않았다. 하지만 낮의 성하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밤이 아늑하게 끌어안은 휴식의 거리가 아닌 사람들의 활기에 넘쳐 나는 성하는 눈부실 것이다. 이세는 벌써 가슴이 뛰었다.


“오늘 성하에 시찰 갔다 올게.”

아침 식사 때 이세는 마주 앉은 누니아에게 말했다. 누니아는 시원한 냉국을 떠 마신 다음 입가를 두드렸다.

“언제?”

“티타임 무렵에 출발해서 저녁 먹기 전에는 올 거야.”

“오늘 저녁에 여름 왕자님이 도착하신다는 거 기억하고 있어?”

“물론이야. 하지만 왕자님이 성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냐고 물으면 어쩌지?”

누니아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이세는 시종장을 불러서 행차 준비를 시켰다. 여름 왕자를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시종장은 덜컥 내려앉은 일거리에 당황했지만 의연하게 대처했다.

“시종 열두 명, 가마, 가마꾼, 시녀 둘을 동반하실 수 있습니다. 이동하시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막사도 챙겨 두지요.”

이세는 온통 딴생각 중이었기 때문에 시종장이 하는 말을 겉귀로 들었다.

“시녀는 직접 고르겠어요.”

“뜻대로 하십시오.”

티타임 보다 조금 서둘러서 이세의 시찰 행렬이 성을 떠났다.

누니아는 활짝 열어 놓은 홀의 발코니에서 성문을 나가는 행렬을 보고 있었다.

“날이 포근하군요, 안이 너무 덥지 않으십니까?”

“참을 만 해,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세님을 보고 계십니까? 많이 아름다워지셨습니다.”

“다행한 일이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여름 왕자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혼인을 서둘러야 해. 봄과 가을이 점점 더 더워지고 겨울은 따뜻해. 눈이 적은 덕분에 가뭄과 굶주림이 들에 넘치지. 모든 시간에 여름 왕의 힘이 넘치고 있어. ”

“만약에 이세님이 선택되신다면 누니아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누니아는 차가운 파란 눈으로 시종장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선택을 받건 그런 건 상관없어. 우리는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거니까.”

누니아는 잠깐 행렬에 눈길을 주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내 ‘방’은 따뜻해지지 않도록 주의해 줘.”

시종장은 그녀의 방 그늘에 놓인 큰 물독을 떠올리고는 긴장했다. 사람 하나가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큰 독 외곽엔 재생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정말로 그걸 사용하실 겁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

누니아는 살얼음 낀 찻잔을 들었다.


이세는 행렬이 잠깐 쉬는 틈에 시녀들을 천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재빨리 말했다.

“옷을 벗어 내게 다오.”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시녀는 깜짝 놀라 벌벌 떨었다.

“고… 공주님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한 번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이세는 미소 지었다.

“잘못한 거 없어, 헬리. 내가 잠시 필요해서 그런다. 사라, 너는 내 옷을 받아 헬리가 입을 수 있게 도와줘라. 얇지만 봄이 따뜻해져서 입고 춥지는 않을 거다. 정히 춥거들랑 이걸 걸치도록 해. 여름 왕국에서 온 것이라 굉장히 따뜻할 거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두 시녀는 얼음 공주의 변덕에 맞춰서 옷을 바꿨다. 헬라는 얼음 공주가 되었고 이세는 시녀가 되었다.

“가마에 앉아서 사람들이 인사하거들랑 겸손하고 상냥하게 화답해 주면 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그 편이 나을 거다.”

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구 밖을 나가는 모퉁이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반 식경 정도 시장 구경하면서 기다려 주고, 그래도 오지 않걸랑 여기서 다시 쉬어라. 그전에 분명 돌아오겠지만 만약을 위한 거다. 헬라, 마을 입구에 들어갈 때 나에게 이 돈을 주고 심부름을 시켜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다들 볼 수 있게 돈만 주면 된다.”

“예, 공주님,”

“저녁에 보자.”

이 세는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행렬이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얼음 공주는 시녀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시녀는 공손히 돈을 받아 들고 행렬에서 벗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퉁이에서 행렬과 갈라지자 이세는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심장에 부담이 되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곧장 노마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밤의 안락이 사라진 거리는 흉흉하고 메말라 있었다. 이세는 허전함과 아쉬움을 애써 참았다. 그러리라고 짐작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노마를 찾았다. 그를 만나면 이런 불안감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그의 온기 하나만으로 모든 골목 구석마다 따뜻하고 풍요로움이 넘치게 되리라. 하지만 아무런 기약 없이 거미줄처럼 얽힌 수많은 길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세는 간신히 언젠가 스쳐 지났던 노마의 집 문을 발견했다.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수많은 초라한 집 틈에서 그 집을 기억해 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노…”

이세는 노마를 불러내려다가 불쑥 장난기가 발동했다. 노마를 길러 주었던 노파는 작년에 죽었다. 노마 혼자이거나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녀는 자물쇠 없는 문을 살짝 밀었다. 기름칠 잘된 문은 삐그덕 소리도 없이 열렸다. 하얀 가죽신을 신을 작은 발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좁지만 깨끗한 집이었다. 이세는 현관과 바로 붙은 부엌을 지나며 곳곳에 배인 노마의 체취를 더듬었다. 그때 낯선 소리가 그녀의 청각을 잡아끌었다. 아주 작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리였다.

이세는 숨을 멈춘 채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았다.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닫으려 했던 의도는 보였지만 그 틈에 옷가지가 끼어서 성공하지 못한 듯했다. 이세는 갑자기 가슴이 조이며 손발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문 너머를 봐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세의 손은 이미 문에 닿아 있었다.

“아……! 응….”

살짝 열린 틈으로 심장이 내려앉을 듯한 교성이 귀를 관통했다. 문틈으로 침대 위에 뒤얽힌 붉은 나신이 보였다. 이세는 그들이 누구인지 잠깐 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특히 남자 쪽은 지금까지 그녀가 알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세는 문에서 물러섰다. 그녀의 발 밑으로 얇은 얼음 조각이 부서져 내렸다. 서로의 행위에 열중한 남녀는 문 밖에서 사락이는 눈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중에, 그들은 이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물 얼룩을 발견했지만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세를 기다리는 시녀들은 온몸에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이세의 명령이긴 했지만 평민으로서 왕족의 옷을 걸치는 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해가 져 가는 데도 돌아오지 않는 이세였다.

“흐흠! 흠.”

그때 천막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시종장의 기침 소리였다. 시녀들은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이세 공주님.”

시종장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시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엎드려 벌벌 떨었다. 그러나 시종장은 그들을 보고도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늦으시는 것 같아 마중 나왔습니다. 이.세. 공주님. 행차가 많이 피로하셨나 봅니다. 제가 직접 모셔도 되겠습니까? 등을 기대 쉴 수 있도록 편안하고 푹신한 마차를 대령해 두었습니다. 부디, 안심하고 따라와 주십시오.”

시종장은 특히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시녀들은 안도하면서도 어리둥절한 채로 시종장을 따라갔다. 시종장은 일부러 그날 밤 성문 보초를 느슨히 하고 뒷문을 열어 두었다. 성안은 온통 여름 왕자의 방문에 신경이 쏠려 있어서 의아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짙은 어둠 틈새로 하얀 그림자가 뒷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왔다. 눈발이 잠깐 휘몰아쳐 들어온 것 같아서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이세는 자신의 방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얼음 살점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뼈가 훤히 드러나는 시체 같은 몰골이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던 머리카락도 모두 부서져 칠이 벗겨지고 깨져 나간 얼음 인형처럼 처참하고 끔찍했다.

“늦었구나.”

이세는 침대 그늘에서 들린 누니아의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그녀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누니아 역시 그녀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 마을에 가지 마.”

이세는 마디가 떨어져 나간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버려 두고 있었어. 네가 원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안돼. 너를 봐. 너는 얼음 공주야.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어. 처음에, 너는 조금 녹긴 했지만 더욱 견고해지고 아름다워졌지. 어느 정도의 자극은 도움이 돼. 그래서 내버려 두었어. 하지만 이제 안돼. 우리 몸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 열기를 받아들이거나 이겨낼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단 말이야. 너는 망가져 버릴 거야.”

‘너는 녹아 버릴 거야.’ 과거의 목소리가 현재와 겹쳐졌다. 누니아의 말은 진실이었다.

“나는… 이미 망가졌어, 누니아.”

이세는 숨을 삼키듯이 말했다. 그때 땡그랑 방울 소리가 침대 위를 굴렀다.

“아직은 아니야. 스스로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결빙의 방 열쇠야. 조금 쉬고 오도록 해. 여름 왕자가 지내는 동안 나올 수 있길 바라지만 그러지 못해도 괜찮아.”

이세는 열쇠를 쥐었다.

“잊지 마, 왜 우리가 여기 있는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누니아는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결빙의 방에서 이세의 몸은 다시 얼어붙었다. 수정 같은 물방울들이 그녀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굳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물도, 눈도, 파랗고 진한 원래의 눈동자 색은 되돌리지 못했다. 이세의 눈은 잿빛으로 퇴색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세였다.

얼음 성 꼭대기 구름 속에 숨겨진 결빙의 방안에서도 이세는 성안의 모든 일들 알고 있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얼음 조각들은 그녀를 위로하러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전해 주었다. 이세는 오랫동안 쉬고, 얼음이 빚어낸 하얀 옷을 걸치고 가끔 산책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밤에만.

“누니아 공주님? 늦은 산책이시군요.”

밤의 정원을 산책하던 이세의 등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세는 뒤돌아 보았다. 피부에 무르익은 보릿단처럼 햇빛 광채가 흐르는 청년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세는 눈이 어른거리는 걸 느꼈다.

“여름 왕자님이시군요. 얼음성의 둘째 공주 이세입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름 왕자는 눈을 크게 떴다.

“저야말로 결례를 저질렀군요. 편찮으셔서 쉬고 계시다고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예, 덕분에.”

이세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여름 왕자는 약간 의아했다. 그녀는 분명 얼음 공주였지만, 그림 속의 이세와는 전혀 달랐다.

“빨리 건강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분 공주님과 즐겁게 놀 생각을 하고 왔는데, 누니아 공주님은 정무만으로도 너무 바쁘시더군요.”

여름 왕자는 자유분방하지만 결코 불쾌하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아마도 힘 있고 상냥한 목소리 때문인 것 같았다. 노마도 저런 목소리였다. 양지에 선 큰 나무처럼 단호하고 상냥한 목소리. 이세는 문득 떠오른 기억을 흘러가게 내버려 둔 채 미소 지었다.

“어머, 귀한 손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니,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나 보네요. 대신이라면 뭣하지만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동행해 드리죠. 어떠세요?”

여름 왕자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차고 아름다운 얼음 공주를 보았다. 엷은 회색 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뿜어서 묘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얼음 성의 공주님들은 서로 닮았지만 아주 많이 다르군요.”

“여름 왕가에는 왕자님 혼자인가요?”

“네. 그리고 어떤 대에도 한 번에 한 명뿐이었죠. 제가 알기론 겨울 왕가도 그럴 텐데요.”

이세는 가슴이 선뜻 베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게요. 지금까지는 그래 왔죠. 하지만 이번 대는 달라요. 누니아가 있으니 나는 필요 없을 텐데, 왜 우리는 둘인 걸까요?”

여름 왕자는 당황했다.

“누가 필요해서 누가 필요 없다니요,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아마도 다른 뜻이 있을 겁니다. 이런 대화보다 우리 좀 더 재미있는 걸 합시다. 함께 성하에 나들이 가지 않겠습니까? 난 그걸 매우 즐기죠. 공주님은 싫으신 가요?

하나로 뒤엉킨 두 개의 불꽃이 이세의 눈앞에 떠올랐다. 괴롭고 괴롭고 괴로워서 간신히 나아진 몸이 다시 부서질 만큼 몸서리쳐지는 기억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그녀의 혈관에 떠돌고 있었다. 겨울의 심장은 갈가리 찢겼다. 그녀의 심장은 누니아만큼 단단하지가 않았다.

“저도 무척 즐겨요.”

그래도 이세는 미소 지었다.


누니아는 이세가 탑에서 내려왔다는 소식과, 여름 왕자와 함께 성하에 나들이 간다는 소식을 동시에 들었다. 시종장의 얼굴에는 쳐지는 주름처럼 수심이 늘어져 있었다.

“어찌할까요?”

시종장은 한마디도 묻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누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양피지를 넘겼다.

“보내드려. 보물 창고를 털어서라도 필요한 건 뭐든지 내드리고.”

시종장은 굵은 돋보기 너머로 주인을 보다가 허리를 굽히고 나갔다. 여름 왕자와 이세가 요구한 것은 평복 한 벌과 약간의 푼 돈 뿐이라는 것은 보고하지 않았다.


“길잡이가 없어도 되겠어요?”

이세는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대체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여름 왕자는 모든 일에 대책이 없었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때요? 집에만 가면 되죠. 걱정할 거 뭐 있어요? 마을 어디에서도 성은 저렇게나 잘 보이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언덕 위에 구름 꼭대기까지 탑이 닿는 얼음 성은 백리 밖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이세는 결국 포기했다.

“당신 뜻대로.”

“얼음과자 먹을래요? 딸기맛? 포도맛?”

“당신이랑 같은 걸로.”

“아, 저기 신기한 동물 보여요. 보러 가죠?”

“그래요.”

“시장 구경 좋아해요? 여긴 시장이 어디죠?”

“저쪽이에요. 뒷골목 시장은 저쪽. 여기와는 다른 풍광을 볼 수 있지요”

“잘 아시네요. 누니아 공주님은 모르시던데.”

이세는 선뜩한 기분을 미소로 포장했다.

“그럴 수도 있죠.”

둘은 활기 띤 시장을 구경했다. 해질 무렵 여름 왕자는 허름한 좌판에서 싸구려 구슬 목걸이를 골라 이세에게 선물했다.

“맘에 들어요?”

“네.”

이세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여름 왕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눈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정말 말하는 그대로 고분고분한 사람인 줄 알았을 겁니다.”

이세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으로 안 돌아가실 건가요?”

길거리에서 파는 납작한 빵과 과일즙으로 저녁을 때운 뒤에도 여름 왕자는 떠날 기미가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뒷골목을 봐야죠. 그 나라를 제대로 보려면 뒷골목을 보라고 했어요. 당신 나라인데, 혹시 한 번도 안 와 봤어요?”

이세는 대답 대신 여름 왕자가 원하는 대로 뒷골목을 안내했다. 사람이 다닐 거 같지 않은 좁고 외진 틈새를 여러 번 통과하면서도 이세는 한 번도 주춤대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여름 왕자는 턱을 더듬었다.

컹컹 개 짖는 소리와, 볕 든 적 없는 좁고 습한 돌바닥, 낡은 신발, 말라붙은 발바닥, 부싯깃에 불이 붙고, 젖은 나무를 태우는 매캐한 냄새, 그 위에 올려진 솥, 속을 휘젓는 마르고 거친 손, 그 눈에 일렁이는 불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세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에 여름 왕자의 어깨에 낡아빠진 망토를 둘러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같은 것을 둘러썼다. 여름 왕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들은 각자 가진 먹을 것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그걸 모아 조금씩 나눠 먹었다. 이세는 마른 빵을 내놓았다. 여름 왕자가 저녁거리로 사줬던 거였다.

“당신, 하나도 안 먹었군?”

여름 왕자가 목소리를 낮춰 묻자 이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 그늘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훨씬 생기가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하나둘씩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세는 얼굴을 들었다. 노마가 보였다. 유카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한자리쯤 건너서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공주님을 못 본 지 오래되었네. 누구 소식 들었나?”

“글쎄. 언제쯤부터였지? 어이 노마, 요즘은 공주님 모시러 안 가나?”

거친 수염이 비죽한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편찮으시다고 들었어요.”

“그래? 얼른 나아서 또 놀러 왔으면 좋겠구먼. 웃는 얼굴이 이뻤지. 통통한 뺨이 꼬집어 주고 싶게 귀여웠어. 내 딸 삼아도 좋았구먼.”

“불경한 말이로군요.”

여름 왕자가 한마디 툭 던졌다.

“뭐 어때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끼리 일러바칠 것도 아니잖아요?”

이세가 불쑥 말했다. 그리고 빵 대신 돌아온 늙어빠진 사과 조각을 아삭 베어 물었다. 시금털털했던 것이 불에 졸여져서 그런대로 단맛이 났다.

“그러게, 여기서 그런 거 일러바칠 사람은 없지. 없고 말고. 그리고 공주님도 안 싫어할 거야. 외모만 그렇지 하는 짓은 하나도 공주님 안 같았는 걸. 우리랑 똑같은 걸 먹어도 맛있게 먹고,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이 웃고… 난 얼음 공주님은 뭔가 희한한 건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다르더구먼.”

“그래도 한 번도 불 가까이는 안 왔죠. 녹아 버릴 테니까.”

유카가 말했다. 여름 왕자는 그들과 이세의 눈치를 동시에 살폈다.

“누니아 공주님 이야긴가요?”

“아닐걸? 다른 이름이었어. 아이스… 아니 이세였지.”

“그 공주님 노마 색시될 줄 알았는데. 그거 아냐 노마? 너네 할망이 죽기 전에 공주님이 네 색시될 거라고 그러더라. 노인네가 노망이 난 건지, 주책스럽게.”

“그래? 나도 노마랑 잘 될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이에요? 엄연히 신분이 다르다고요.”

유카가 버럭 말했다.

“안 그래 노마? 그 공주님이 불쌍하다고 했잖아? 그렇게 추운 성에서 매일 창 밖만 보고 있고. 안 그럼 일부러 데려오지 않았을 거라고.”

노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여름 왕자는 이세를 쳐다보았다. 두건을 벗어도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새벽이 밝아 올 무렵에 그들은 뒷골목을 나섰다. 그들이 떠나기 전까지 이지러진 불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겨우 네 명뿐이었다. 노마와 유카, 그리고 여름 왕자와 이세. 유카는 졸고 있었고 노마는 불을 지키느라 밤새 뜬눈이었다. 여름 왕자는 조용했고 이세는 불만 쳐다보았다.

“안녕히 계세요. 식사, 감사했습니다.”

이세는 이렇게 인사하고 일어났다. 어깨에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불가에 스치자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잘 가세요. 하루에 행운이 깃들기를.”

노마는 이렇게 답례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불을 보다가 문득 그녀의 자리에 남아 있는 물 얼룩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낯선 불청객들은 거기 없었다.


“누니아 공주님이 아시면 크게 야단맞겠군요. 밤을 보내고 왔으니 책임지라고 하면 어쩌죠?”

여름 왕자가 말했다. 이세는 고개 저었다.

“괜찮을 거예요. 다들 어른이니까. 당신의 선택대로 밀고 나가세요.”

그들은 말없이 언덕길을 올랐다. 노마와 함께 걷던 그 길이었다. 이세는 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가 있었다. 그녀가 있었다.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변했다. 누구도 처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불꽃만은, 눈을 사로잡는 빛의 향연은 그대로였다.

“내가 청혼하면 나와 결혼할 건가요?”

여름 왕자가 물었다.

“네.”

그러자 힘있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낚아챘다. 이세는 그 뜨거움에 소스라쳤다.

“당신 같은 사람, 내 쪽에서 사양입니다.”

내용과는 정반대로 그의 말투는 쾌활했다.

“이대로 끝나도 좋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해도? 원하시는 게 뭡니까? 당신은 누니아 공주님과는 달라요. 그녀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거고, 존재해 온 그대로 완벽하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면 부서져 버릴 겁니다.”

“나는 그를 원하지 않아요.”

이세 말해 놓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이 뭘 원하건 그건 내 알 바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대로의 당신은 무가치하다는 겁니다. 자신의 것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겁니다. 아무리 많은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을 겁니다.”

“나더러, 대체 뭘 어쩌라는 건가요?”

“그 답도, 아마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온기에 기대지 마십시오. 녹아 버릴 겁니다. 당신은 얼음 공주니까요.”

여름 왕자는 성큼 그녀를 가로질러 가 버렸다. 이세는 혼자 남았다. 비참함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평온이 밀려왔다. 감정은 아주 잠시 그녀를 흔들어 놓았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이세는 고개를 들었다. 얼음 성이 보였다. 등뒤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걸어 올라온 언덕길, 동네 어귀, 새벽 닭 울음소리, 그 아래 작은 지붕, 고된 잠을 인 어깨, 정적에 가로막힌 큰길 가, 틈새의 좁다란 골목, 그리고 아직 채 꺼지지 않은 불이 있었다. 그녀와는 전혀 다른 것, 그녀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

‘너는 녹아 버릴 거야.’

‘불 가까이는 안 왔죠, 녹아 버릴 테니까.’

‘녹아 버릴 겁니다. 당신은 얼음 공주니까요.’

‘너는 녹아 버릴 거야. 그게 두려워?’

몇 개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였다. 그것은 누니아고 유카이기도했고, 여름 왕자고, 그리고 이세 자신이었다.

“그래.”

그녀는 중얼거렸다. 차가운 목소리가 바람결에 갈라졌다. 눈으로 만들어진 혀끝이, 목구멍이, 폐가 부서져 나갔다.

“무서워, 무서워서 죽어 버릴 것 같아. 하지만 원하는 건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데, 어쩌지?”

그녀는 조밀하게 갈라져 눈으로 변하는 손가락을 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너무 추웠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졌으면서 춥다고 느끼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기억하는 한 이세는 언제나 추웠다. 성안에서도, 누니아와 함께여도. 따뜻한 기억은 단 한 가지, 노마의 손, 입술, 그녀를 바란 시선, 하지만 그것 모두 얼어 버렸다. 결빙의 방에서 몸을 얼릴 때 마음도 기억도 견고하게 얼어붙었다.

이세는 죽음이 무서웠다. 녹아 사라진 다는 것, 당연히 존재했던 모든 것이, 세상이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게 되는 것, 하지만 이대로 살아 있어야 하는 것도 너무 무서웠다. 태어난 목적도 알지 못한 채 얼어붙은 가슴을 안고 살아남는 건 더 끔찍했다. 이세는 따뜻해지고 싶었다. 정말로 영원히.


“이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어요.”

늦은 저녁에 누니아가 여름 왕자에게 말했다. 여름 왕자는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찾아봤습니까? 온 마을 구석구석?”

“물론이죠. 마을 뒷골목 모퉁이에 물이 녹은 흔적이 있었어요.”

이세의 소멸을 알리는 누니아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쉽게도 선택권이 없군요, 여름 왕자님. 저와 혼인하셔야겠네요. 이세를 마음에 들어 하신 모양이지만요.”

계절의 혼사는 그렇게 쉽게 결정이 나 버렸다. 사라져 버린 또 다른 얼음 공주를 기억할 사람은 없었다.

누니아 공주는 겨울 왕이 되었다. 여름 왕자는 여름 왕이 되었다. 전 여름 왕은 퇴색한 시간 틈의 마지막 햇살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은 혼인해서 봄 공주와, 가을 왕자를 낳았다. 그리고 헤어져 각자의 성으로 돌아갔다. 소멸이 진행되기 전에 다음 겨울 왕이 될 얼음 공주 혹은 얼음 왕자와, 여름 공주와 여름 왕자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들이 만날 일은 없었다. 계절의 혼인은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주린 뒷골목 대신 가뭄이 끝난 풍요로운 들과 밭으로 나갔다. 그래도 밤이면 그들은 뒷골목으로 되돌아왔다. 거기에는 아직 두런이는 이야기와, 굳은 빵, 호기심 끄는 불청객, 꺼지지 않는 불이 있었다.

“얼음 성의 공주님이 혼인하셨다지?”

“이세래?”

“아니 누니아라는 이름이었어.”

“그럼 이세님은?”

“글세…”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도 이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이상한 공주님이었어. 얼음이라고 하지만 얼음 같지 않던걸.”

“그렇지? 불가에 가면 녹는 다면서도 불 앞에 앉아 있는 걸 좋아했지.”

“그 공주님은 얼음이 아니었던 거 아닐까?”

“글세, 나도 녹는 걸 본 적 없으니…….”

“껍질이 그렇다고 속에 있는 것도 과연 얼음이었을까? 기실 아무도 확인 한 적 없을 거 아냐?”

“그렇지.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

“이봐 노마, 공주님 소식 들은 거 있냐?”

“없어요.”

노마는 잘라 말했다. 그는 이제 지긋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 내가 엊그제 옆 마을에서 재밌는 말을 들었지.”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화제가 바뀌었다.

“뭔데?”

“얼음인데, 녹지 않는 얼음이 있다는 거야.”

“에이, 거짓말. 그런 게 어딨나?”

“어, 그거 정말이에요, 전 직접 봤어요.”

불쑥 허름한 옷을 입은 소년이 끼어들었다. 작고 통통한 얼굴이 아주 어린데도 오래 여행한 것처럼 세월이 각인된 회색 눈을 갖고 있었다.

“어라 어디서?”

“연금술사들이 새로 발견한 얼음인데… 안 녹는 건 아니고 녹아서 물이 되는 게 아니라 사라져 버려요. 만든 사람 이름이… 아마 드라이라는 것 같아요.”

“사라져?”

사람들 사이에 호기심에 넘쳤다.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그건 물로 만든 얼음이 아니래요. 그리고 그건 뜨거웠어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에이 거짓말. 얼음이 녹지도 않고 뜨겁다니 말이 되나? 겨울 왕이 들으시면 웃으실걸.”

“바로 그 겨울 왕이 연금술사들에게 보낸 선물이라고요. 커다란 독에 담겨 왔다고 했는데 그 독도 제가 봤어요. 분명히 얼음 성의 문장이 있었는걸요?”

소년은 열심히 변호했다.

“뭐 그런 게 있다 치자, 그걸 워디다 쓴 다냐? 물도 아니고 녹지도 않는 걸.”

“바로 그런 용도예요. 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인 거죠. 불이 겨울에도 타듯이 말이에요.”

소년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때 한 여행자가 불쑥 손을 내밀어 소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여기 계셨군요, 오래 찾았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죠, 드라이님. 연구할 게 산더미인데 이렇게 노닥이실 시간 없습니다. 이번엔 참 멀리도 나오셨군요. 산을 세 개나 넘다니요.”

“드라이? 아까 얼음 만든 사람이 드라이라고 누가 말했지 안남?”

기억력 좋은 노인네가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은 이름이긴 하네? 희대의 천재 연금술사라던가?”

“어라, 이 꼬맹이가 천잰겨?”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소년은 여행자의 망토 속에 슬금슬금 숨었다.

“가야 할 거 같지, 나바?”

“그렇게 나와 주시니 고맙습니다. 드라이님.”

둘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왜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신 겁니까?”

말 등에 소년을 태우고 걸으면서 나바가 물었다.

“그냥, 얼음 성이 보고 싶어서.”

“겨울 왕께서 연구를 맡기실 때 특별히 얼음으로 모형을 떠다 드렸지 않습니까?”

“하지만 와 보고 싶었는걸.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단 말이야. 여름에도 녹지 않는 진짜 얼음 성. 절대 불가해하고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을.”

나바는 자기 무릎을 간신히 넘는 꼬마 연금술사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불가해한 것은 당신의 존재입니다. 드라이님.”

“알아, 겨울 왕의 물독 속에 담겨 있던 게 나라지? 당연하게도 나는 기억에 없지만 말이야.”

소년은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바, 나 분명히 여기 처음 오는 거지?”

“독 안에 담겨서 성에 있었던 거 빼고는 그럴 겁니다.”

“이상한 일이 있었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분명 처음 보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그런 기분이 들었어.”

소년은 수염이 삐죽삐죽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은 피로에 지쳐 있지만 그 눈이 천진하게 웃으면 얼마나 근사할지 기대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기분이었다.

“꿈 깨시고 전하께 야단맞을 각오나 하십시오.”

나바가 냉정하게 상상을 잘랐다.

“너무해, 나바.”

소년은 투덜댔다. 그들을 태운 말은 성하를 지나 얼음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세 공주가 노마와 손잡고 오르던 그 들판 길로.




<20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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