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허락된 선물

by 슈퍼엄마

학창 시절에 새 학기가 되면 어김없이 간단한 인적사항을 작성해야 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부모님 나이, 직업, 학력 등을 써넣다 늘 한 곳에서 펜이 멈춰졌다.


"엄마, 아빠 직업에 뭐라고 써?"

"그냥 아무거나 써!" 날카로운 엄마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결국 대충 친구들이 적어내는 것을 살짝 훔쳐보다 ‘사업가’라는 말을 보게 되었다. 어쩐지 멋진 말 같아서 나도 그렇게 적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아빠 무슨 사업하시니?"라고 물었다. 거짓말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그게..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그 다음 학년에 되어서는 아빠의 직업에 "농부"라고 적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아빠가 무슨 농사 지으시니?"라고 물어보셨다.

"아... 그게 잘 모르겠어요"

"응? 아빠가 무슨 농사를 짓는지도 몰라??"

그 후로도 매년 아빠의 직업을 적을 때마다 울고 싶어 졌다. 누군가 알게 되면 거짓말쟁이라고 손가락질할까 두려웠다. 나는 매년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어리숙한 아이인 척해야 했다.

내 기억으로 아빠가 집에 돈을 벌어다 준 적은 별로 없다. 어린 시절 엄마는 작은 종이가방을 만드는 부업을 하셨다. 펼쳐진 종이가방 모양의 종이에 양면테이프를 붙여 바닥을 만들어 그 속에 탄탄한 도화지를 넣어 종이가방의 형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 옆에서 종이가방 만드는 일을 도왔다. 손이 야무지고 빨라서 엄마보다 더 빠르게 만들 수 있었다.

봉투 수백 개를 만들어가면 다음날 엄마는 장을 보고 맛있는 반찬도 만들어주셨다. 그게 좋아서 더 열심히 엄마의 일을 도왔다.


그 후에도 엄마는 다양한 일감을 가져왔다. 엄마는 손이 야무지셨다. 내 옷도 가방도, 우리 집 식탁보도 엄마가 뜨개질을 해줬다. 엄마는 그렇게 만든 물건들을 동네 아주머니들께 팔기도 했다. 정말 샀다고 믿을 만큼 멋지고 근사했다. 엄마는 그렇게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서 생활비를 벌어 우리를 키우셨다.


힘들게 돈을 버는 만큼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 외에는 거의 돈도 쓰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내 책을 사주는 일이었다. 엄마는 내 생일이나, 내가 시험을 잘 보고 오면 뭐 갖고 싶은 거 없냐고 물으셨다. 그러면 ‘책’을 갖고 싶다고 말했고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서점에 데리고 가셨다. 그땐 드물게도 엄마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영이는 책을 그렇게 좋아한다며? 책을 좋아해서 공부도 잘하지?"

동네 아줌마들이 그렇게 말할 때면 엄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얘는 뭘 사준대도 늘 책을 사달라고 하네"라며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사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책 보다 더 갖고 싶은 것이 많았다. 예쁜 머리핀이나 옷도 갖고 싶었고, 피아노, 침대, 컴퓨터, 워크맨.. 여느 여자애들처럼 갖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것들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이 갖고 싶은지 보다 엄마가 사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내 입에서는 어김없이 ‘책’이라는 말이 나왔다.


엄마는 책을 좋아하는 나를 기특해하셨고, 책을 좋아하는 게 마치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보장처럼 여기셨다.

"나중에 훌륭한 사람 돼서 돈도 많이 벌고, 우리 영이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살면 엄마는 소원이 없겠네.."

그런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책을 읽었고, 그러다 보니 정말 책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어린 시절 내게 유일하게 허락된 선물이자, 엄마의 지금의 고생을 잊게 해주는 보험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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