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알프스, 하동 여행기 - 2
Day 3
커튼을 살짝 젖히니 그 틈새로 햇살이 비췄다. 어제와 다르게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이 보였다.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맑아지는 날씨는 모든 여행에 적용되는 머피의 법칙 같은 것일까. 전날 조금 무리해서 걸었기 때문에 오늘은 여유 있게 비타민 D도 쬐면서 쉬엄쉬엄 움직일 계획이었다. 정성껏 차려진 아침을 먹고, 숙소 지킴이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에 올랐다.
“많이 걸으셨어요? 생각보다 걷기 편한 길이 잘 없죠.”
머무르는 내내 매일 아침 첫 목적지까지 차로 동행해주신 사장님이 걷기 여행에 대한 진척사항을 물으셨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삼만 보 프로젝트는, 하루에 이만 보를 채우기도 힘들었다. 조금 변명하자면 정말로 걸을 만한 길이 잘 없기도 했고, 마음만큼 몸의 움직임이 따라주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자연과 속세
오늘의 첫 목적지는 쌍계사였다. 첫째 날 걸어 내려왔던 십리벚꽃길을 반대방향으로 쭉 올라가면 지리산 자락 가운데 커다란 절을 만날 수 있다. 템플스테이에 다녀온 기억을 더듬어 법당에 올라 합장을 한다.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조화롭다.
스윽 주변을 둘러보고, 그늘 아래에서 각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취향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성격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났다.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와 다르게, K의 움직임은 더 바빠진다. 사부작사부작. 옆에서 타임랩스를 찍기도 하고, 노트와 펜을 꺼내어 순간의 기록도 남긴다.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가만히 있는 건 그녀에겐 꽤나 좀이 쑤시는 일인지 ‘언니, 나 좀 더 둘러보고 올게!’ 하며 그새 일어나서 주변 이곳저곳에 발자취를 남긴다.
그렇게 난 또 한참을 누워있다 K를 만나 기념품을 파는 조그만 매대에 슬금슬금 걸어 들어갔다. ‘만사형통’, ‘행운기원’처럼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은 의미가 새겨진 팔찌에 둘 다 한참 시선을 빼앗겨놓고선, 우린 여기까지 와서도 굳이 속세에 얽매여있다며 피식 웃었다.
가장 하동스러운 음식
점심을 먹으러 K가 미리 예약해둔 식당으로 향했다. ‘찻잎마술’이라는 이름답게 하동의 특색을 잘 살리면서도, 나름의 컨셉이 있는 꽤 고급진 한식당이었다. 애피타이저로 차씨오일과 차꽃와인을 마시며 메뉴를 살폈다. 몇 가지 메인 요리 중에 K는 야채가 듬뿍 들어간 비빔밥, 나는 당연히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시켰다. 함께 차려진 찬들이 대략 15가지는 넘어 보였다.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잘 먹는 K는 이것저것 먹어보더니 금세 모든 반찬 한 개씩 다 맛을 봤다며 흡족해했다.
녹차 소스와 간장으로 조린 메인 삼겹살찜은 살점이 부들부들했고, 간도 알맞게 베어 밥 한 공기를 쓱 비벼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차 한 잔까지 완벽했다. 차로 시작해 차로 끝난 식사는 지금껏 먹은 음식들 중 가장 하동스러웠다.
식당을 나와 눈으로 점찍어두었던 다리 아래 화개천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가장 묵직하고 편평한 돌덩이를 골라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물 아래가 훤히 다 비췄다. 이 곳은 축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물이 다른 계곡보다 더 맑고 깨끗했다. 뙤약볕에 머리는 뜨거운데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니 에어컨을 한껏 틀어놓고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는 기분처럼 상쾌했다. 미끄런 돌덩이에 가까스로 서서 포즈를 취한 채 마지막 사진을 남긴 후 다시 십리벚꽃길로 향했다.
하동의 알프스를 찾아
화개천을 따라 천천히 걷는 이 길에서의 시간이 내가 꼽는 이번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차의 고향답게, 어딜 가나 정갈한 차밭이 눈에 들어온다. 초록 무리 사이에 듬성듬성 피어있는 들꽃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건너편에 켜켜이 쌓인 산 아래 콕콕 박힌 집들은 아직 가보지 못한 하이디의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하동의 지역 슬로건이 알프스 하동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또 하나의 궁금증이 풀린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풍경들이 많아 카메라로 셀프 여행 다큐를 찍는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좋은 기억을 오래오래 남기기에는 사진보다 영상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풍경에다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자니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이제 또 한 차례 쉴 때가 되었다. 이름도 예쁜 카페 ‘윤슬당’에서 청귤 홍차와 구기자떡을 먹으며 당 충전을 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숙소 테라스에서 조촐한 파티 계획을 세웠다. 재첩회와 재첩전을 포장해 들고 해가 질 새라 숙소로 향했다. 여행 내내 숙소에서 저녁을 해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배산임수의 입지를 갖춘 최고의 집을 두고 굳이 밖에서 밥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기분에 취해 두 병이나 산 막걸리는 반도 마시지 못한 채 여행의 끝을 실감했다. 목표한 만큼 걷지 못했고, 섬진강에 서식하고 있는 재첩이란 재첩들은 다 먹고 오자고 호탕하게 세웠던 먹방 계획도 소박하게 마무리되었다.
다음에 다시 오면 꼭 삼성궁에 가보자, 다음에 오면 꼭 자전거를 타자. 아쉬운 마음에 언제 또다시 올지 모를 두 번째 하동에 대해 벌써부터 떠들어대며 섬진강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