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불 꺼진 건물의 셔터를 살짝 올려 틈 사이로 빠져나온다. 이렇게 퇴근을 한다.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아침 7시 다시 사무실 행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쉬는 날도 없다. 사무실 지박령, 공연 기획 팀 막내, 티켓 담당. 이게 나다.
콜센터 직원들이 친 사고, 갑작스러운 변수, 배우들의 막무가내 부탁, 정신없는 와중에 불만 있는 관객들까지 매표소에 와서 화를 낸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주눅 들었다가 공연이 끝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또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박수 속에 나는 없다.
‘아, 너무 지친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닌데..'
요즘은 이런 상태를 번아웃이라고 하던데 그때는 그런 것도 몰랐다. 또 하나의 공연이 막을 내렸고 집에는 지방 공연을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배낭에 작은 디지털카메라와 옷만 대충 구겨 넣고 무작정 터미널을 향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이라 이것저것 검색할 것도 없다. “우리 제천에서는” 터미널에 빼곡히 쓰여있는 행선지들을 천천히 훑어보다 제천 출신의 어떤 배우가 늘 하던 말버릇이 생각나 얼마나 대단한 제천인가 싶어 제천행 버스표를 샀다.
이미지 @픽사베이
그렇게 도망치듯 도착한 제천은 유난히 덩치가 크고 소란스러운 목소리로 제천 타령을 하던 누구와는 달리 작고 조용한 곳이었다. 그 낯설음이 마음에 들었다. 작은 절 한 구석에 앉아 듣는 풍경 소리는 시끄럽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추운 날, 시퍼렇게 젊은 여자가 가방을 메고 멍하니 걸터앉은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떡 하나를 손에 쥐어 주고 가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갈 곳이 없었다. 뭐든 있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무작정 눈에 띄는 버스를 잡아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해수욕장으로 가는 차였다. 그곳으로 가는 마지막 차 라고 했다. 지금 들어가면 아침까지 못 나온다. 차라리 편하다. 무척 작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고 금세 어두워졌다. 너무 추워 더 알아볼 것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민박집 벨을 눌렀다. 키가 작은 나보다 더 작은 여자가 나왔다. 할머니라 부르기에는 꽤 젊었고, 아주머니라 부르기에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떨고 있는 나에게 작은 방 하나를 내주었다. 잠바를 벗을 기운도 없어 그 채로 웅크리고 있었는데 여자가 조용히 문을 두들겼다. “술 할 줄 아나?”
‘환장하죠.’
캔 맥주를 사이에 두고 오고 가는 이야기는 없었다. 어쩌다 캔만 부딪히고 찌그러진 빈 캔만 하나씩 늘어갔다.
“교회 갈래?”
“저 교회 안 다녀요.” “나도 안 다녀. 가보자.”
작은 교회는 마침 예배시간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는 낯선 여자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이 마을 여자는 잠시 앉아 마주 보며 키득대다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술 냄새를 풍기며 함께 걸었다.
이미지 @픽사베이
며칠 전 건너편 모텔에 나처럼 혼자 온 다른 여자가 있었다고 했다. 혼자 온 여자는 그날 밤 모텔방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덧붙였다. “그쪽도 죽으려고 여기 온 줄 알았어.” 본인에 집에서 죽으면 곤란해서일까. 아니면 차갑게 얼어있던 내가 위태로워 보였을까. 내 마음을 알아봐 준 것 같은 말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그쪽만 할 때 혼자 여행 다닌 적 있었어. 여자 혼자 다니다가 몹쓸 일도 당했지.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잘하는 것도 많았는데 그러고 나니 아무도 못 믿겠고 아무것도 못하겠어서 그냥 이렇게 혼자 나이 들어가고 있어. 그쪽은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 그리고, 혼자 다니지 말고.” 속삭이듯 이야기를 해주며 쓸쓸하게 웃는 얼굴을 내 작은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을 인화하면 보내드리겠다고 했지만 작은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바쁜 나날들을 보내다 어느샌가 잊고 말았다. 문득 생각이 나 외장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20여 년 전 여자의 사진을 꺼내 보며 약속을 해본다. “이제 용기 내 하고 싶은 일 해 볼게요. 글 써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