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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May 01. 2016

아슬아슬 인디아

여행은 홀림이며 떠남에 대한 설렘이다.

- 프롤로그    


  여행은 끌림이다. 여행은 홀림이며 떠남에 대한 설렘이다. 여행은 만남이요, 돌아옴으로 인한 헤어짐이다. 여행은 비움이고 내려놓음이다. 사소한 기쁨의 채움이며 아픔에 미소를 칠하는 고마움이다. 여행은 푸른 울림을 맛보는 시간이다. 여행은 흐림도 어둠도 붉음도 다정한 색깔로 저장되어야 하는 단편 소설이다. 쉼표와 느낌표요, 말줄임표 끝에 마침표를 찍는 게 여행이다. 여행에 대한 작은 그릇 같은 생각 속에서 만난 인도는 이랬다. 인도는 얼굴이다. 인도는 눈빛이다. 인도는 미소다. 인도는 수용이다. 인도는 느낌이다. 인도는 자비다. 인도는 행복이다. 그러므로 다시 인도를 꿈꾸는 나는 행복하다.


1. 설렘, 떠남


  인천을 출발한 지 13시간이 지난 새벽 1시, 뭄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직항은 델리까지 8시간이면 가능하지만 홍콩과 델리를 경유하여 뭄바이까지 갔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동안 밤거리가 유난히 어둡다는 것 외에 그리 놀랄만한 풍경은 없었다. 공사 중인 도로가 울퉁불퉁했고 산재한 쓰레기와 소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을 뿐이다. 여장을 풀고 인도에서의 첫 밤을 보낼 때까지 예측하지 못했다. 인도가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지…


  이른 아침, 거리는 지난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골목뿐 아니라 대로변에도 쓰레기가 지천이고 소와 염소, 개와 사람이 내질러놓은 악취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게다가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소음까지 합해져 혼돈 그 자체였다. 차선 없는 도로에서 소떼가 유유히 활보하고 바퀴 달린 각종 탈 것의 운전자들은 곡예운전을 했다. 지들이 무슨 레이서라도 되는 양, 머리카락 한 올의 공간이라도 있으면 불문곡직 앞지르기를 했다. 그때마다 용쓰는 산모처럼 손잡이를 부여잡고 신음을 참는 내 모습이 가관일 터였다. 안전거리 확보라는 말은 그들에겐 외계인들의 언어이다. 인도에는 인도가 없다. 횡단보도도 없다. 사람까지 뒤엉킨 도로는 아비규환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고는 거의 나지 않는다. 인도의 운전자들은 차가 밀리지 않는 도로에서도 자주 경적을 울린다. 그 경적의 음색이나 멜로디를 색깔로 나타낸다면 48색 크레파스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뇌가 가출이라도 할 태세다.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차량의 뒤편에는 Please Horn, Blow Horn이라는 문구가 농담처럼 쓰여 있다. 경적은 다른 차량에 대한 경고나 짜증이 아니라 예고의 의미다. 내가 이렇게 앞질러 가거나 비켜가고자 하니 네가 이해 좀 해 달라는 것이다. 밀리는 차량 사이로 수없이 끼어들기를 해도 고성이 오가거나 삿대질을 하는 경우도 없다. 인도에서만 볼 수 있는 여유로움과 관대 함이다. 운전사들은 이 경적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마저 없었다면 인도의 교통질서는 당장 마비될 게 분명했다. 인도에 가면 뭔가 깨달음을 얻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없진 않았지만 열악한 환경에 부딪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인도 사람들은 인간사에 뭐 그리 대수로울 것이 있느냐는 여유로움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노 프라블럼을 달고 산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노 프라블럼의 반응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프라블럼이 많이 제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 프라블럼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상, 문제의 개선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 아닐까? 노 프라블럼이 인도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자체가 빅 프라블럼이 아닐까 생각했다. 



2. 색깔


  세계 최대의 빨래터이며 뭄바이의 세탁소로 불리는 도비 가트, 한국의 빨래터가 아낙들의 소통 공간이었다면 인도의 빨래터는 빈자들의 삶터이다. 인도는 집에서 빨래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빨래를 아주 하찮고 불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스트에도 끼지 못하는 아웃 카스트, 즉 접촉하면 페스트 같은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는 양 취급받는 불가촉천민인 도비 왈라들이 빨래를 한다. 버튼만 누르면 빨래하고 헹구고 탈수하고 건조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 엎어 치고 매치며 양잿물에 손발이 짓무르도록 빨래를 한다. 언젠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러 방문한 기자에게 제발 나를 이곳에서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색깔>이라는 카스트(스페인에서 유래)의 뜻처럼 인도 최대의 경제 수도인 뭄바이엔 아직도 더러워진 옷을 손빨래로 제 색깔을 찾아주는 도비 왈라가 존재한다. 불가촉천민들은 동물보다 못한 처우를 받으며 살아왔다. 소나 개들이 맘대로 마시는 우물물을 불가촉천민은 마시면 안 된다. 나렌드라 자다브의 저서 <신도 버린 사람들>(원제 : Untouchabes 불가촉천민)을 보면 그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 계급인지 불 보듯 훤히 나타나 있다. 그는 인도 중앙은행 수석 경제보좌관으로 근무했고 현재 인도 최상위 랭킹 대학인 푸네 대학의 총장이다. 인도의 차기 대통령 감으로 평가받는 그는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신분의 계급은 최상급인 사람들은 지속되길 원한다. 나렌드라 자다브 같은 아웃 카스트들이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지금 느리게나마 변하고 있다. 신의 나라 인도에 과연 신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도비 가트가 전설로 회자될 날이 올 것을 믿는다. 




3. 사람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로 가기 위해서는 아우랑가바드로 가야 한다. 앞니 빠진 도우미(Helper)가 야간열차를 태워주기 위해 뭄바이 역으로 안내했다. 역사로 들어서는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수적으로 많다는 것은 차치하고 크고 까만 눈들이 일제히 우리에게 향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비썩 마른 사람들이 건조를 위해 널어놓은 멸치처럼 대합실과 플랫폼 온 바닥에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충격이다. 인도 최대의 경제 중심지인 뭄바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대의 빈민촌이 있다고 하더니 홈리스들이 이렇게 많은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기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승객들이었다. 

헬퍼는 바우처를 들고 사무실 이쪽저쪽을 다니며 뭔가 알아보는 듯했는데 우리 보고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연거푸 했다. 인도 기차에는 열차 칸마다 출입문에 좌석번호와 예약된 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워낙 좌석 변동이 많기 때문에 확인을 하고 타야 하는 것이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을 가진 그 할아버지는 끝도 없이 연결된?(세 보진 않았지만 30량도 더 연결되었을 듯) 기차의 객실을 정확히 찾아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곤 또다시 신신당부한다. 그게 열두 번도 더 말한 것 같다. 아무에게도 티켓을 보여주지 마라. 반드시 검은 재킷을 입은 차장이 왔을 때, 그에게만 보여주고 티켓을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 한다. 어린 손녀딸 혼자 기차에 태워 먼 타지에 보내는 할아버지처럼 그는 기차가 움직일 때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못했다. 어설픈 콩글리시와 인글리시로 소통하는 사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보내준 친절과 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인간애를 느끼게 했던 인도인이었다.



  여기저기서 나무젓가락 길이 정도 되는 나뭇가지를 다발로 들고 다니며 파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이를테면 일회용 칫솔 같은 역할을 하는 림 트리다.(치약의 원료가 되는 림 나무) 칫솔질 대신 그것을 칡뿌리 씹듯 씹어 뱉으면 끝이란다. 인도인들이 일회용품을 맨 먼저 사용한 민족이라는 걸 증명하는 대목을 들 수 있는 건 또 있다. 짜이나 라씨(일종의 요구르트)를 원뿔 모양의 토기 잔에 담아주는데 마신 후 깨 버린다. 한 번 사용한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버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짜이를 잔 받침에 따라 마시는 이유도 그와 같다.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는 절대 그릇을 입에 대고 먹는 법이 없으며, 수저나 포크 대신 자기 손을 사용한다. 신분적으로 어떤 하찮은 놈이 사용했을지 모르는 물건에 입이 닿는 것이 싫은 것이다. 


  우리가 탄 기차는 에어컨이 나오는 2층 침대열차로 세탁된 두 장의 면 시트가 누런 종이봉투 속에 담아 있었다. 필시 도비 가트에서 세탁된 것이리라. 하지만 담요와 배게는 그리 청결해 보이지 않았다. 인도의 기차는 정차 예고 안내 방송도 없이 그냥 서고 그냥 출발했다.  옆 칸에 앉은 젊은 부인에게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니 그들도 아우랑가바드까지 간다고 한다. 우리도 그곳에 간다고 일러두고는 도착 예정 시간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서로의 가방들을 와이어로 묶어 자물통을 채웠지만 여권이며 지갑이 든 가방을 껴안고 누울 수밖에 없었다. 2층에 누우니 꼭 배를 탄 듯 일렁거렸다. 잠이 올까 싶었는데 믿기지 않게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련하게 ‘Excuse me mam’ 하는 소리가 꿈결처럼 몇 차례 들려왔다. 눈을 뜨니 옆 칸에 있던 젊은 부부 중 부인이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우리가 내릴 곳에 거의 다 왔으니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일행을 깨우고 그들을 따라 내리니 새벽 4시, 플랫폼에서 역사까지 가는 길은 멍게 껍질처럼 울퉁불퉁했고 가로등 하나 없어 칠흑 같았다. 젊은 부부는 밤바다의 등대처럼 우리를 간간히 뒤돌아보며 앞서 걸었다. 인도인들은 전생과 윤회를 믿는다더니 우리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저 묵묵히 그들 뒤를 따랐다. 


  사이드 미러는 필수가 아니라 옵션인가? 없는 차가 많다. 속도계는 있는데 속도를 가리키는 바늘이 없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타고 다니던 차가 그랬다. 인도에서는 어차피 교통단속이란 것이 무의미, 아니 불가능하므로 속도계 자체가 필요 없는 부속일지도 모른다. 도로를 횡단하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정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길을 건너는 사람이나 차를 모는 사람의 배짱 겨루기 같다.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에 누워 누가 오래 버티나 하는 걸 내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길을 건너고 있어도 투명인간이라도 되는지 기사는 아랑곳 않고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돌진한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내가 운전하는 양 저절로 브레이크를 밟아지는 오른발에서 쥐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차가 충돌하려는 찰나 홍해가 갈라지듯이 인파가 양편으로 좌악 벌어진다. 놀라운 것은 그들도 달려오는 차에 별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10미터 전방에서 추월하는 차가 우리의 차를 향해 역주행한다. 두 대의 속도를 산출해보면 영락없이 충돌하게 되어 있다. 그래도 두 운전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페이스대로 가고 있다. 청룡열차의 맨 앞 칸에 탄 것처럼 아악 하고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두 대의 차는 키스를 거부하듯 한 뼘 차이로 쌩하며 스쳐 지나간다. 곡예 운전은 엘로라에 도착할 때까지 반복되었다. 이젠 운전기사에게 믿음이 생기기까지 한다. 이번엔 요란한 치장을 한 안경 쓴 모습의 트럭이 우리를 덮칠 듯 마주 달려왔다. 흥! 문제없어, 역시 결과는 노 프라블럼! 어느새 인도의 교통법에 중독이 되어 가고 있음이다. 


  야간열차에서의 긴장감에 이어 아슬아슬 인디아를 달리는 동안 우리는 계속 아임 헝그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3G로 만들어진 자동차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충격이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킨 것이다. 그러나 기사는 알았다는 대답만 계속할 뿐 쉬지 않고 달려갔다. 엘로라 석굴 입구에 도착해 호텔 식당에 들어가니 9시가 되어야 식사가 가능하단다. 아뿔싸, 하지만 뭐든 먹어야만 했다. 주변엔 길거리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이 몇몇 보였다. 말이 식당이지 우리나라처럼 관광지에 즐비한 대형 음식점이 아니라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플라스틱 의자가 몇 개 놓여있는 아슬아슬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아직 음식 준비가 안 된다고 한다. 우리에게 손짓을 하는 식당이 있어 들어서니 프라이 팬 위의 식빵 몇 조각과 튀김 감자 몇 알 위로 사막의 모래만큼 많은 파리들이 진을 치고 있다. 해골바가지에 담긴 빗물을 마신 원효 대사처럼 못 봤으면 먹었을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것을 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급한 대로 음식을 주문하고 전날 중국식당에서 스팀 했던 햇반을 꺼냈다. 다행히 상하진 않았다. 비록 종이에 싼 식은 밥과 고추장이지만 한 입 먹은 순간 만한전석이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으깬 감자튀김과 구운 식빵 몇 조각과 오믈렛은 금방 만들어서인지 제법 맛있었다. 놀라운 건 후식으로 맛살라 짜이 까지 한 잔씩 마신 네 사람의 밥값이 200루피(약 5000원)로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인도에 대한 진짜 놀라움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걸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아우랑가바드를 기점으로 엘로라 석굴은 10시 방향으로 1시간, 아잔타 석굴은 2시 방향으로 3시간 거리이다. 이 두 석굴 군은 천 년 전부터 수 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거대한 암반 속에는 각기 30여 개의 석굴이 있고, 그 안에 수많은 신상들이 양각되어 있다. 이 거대하고도 정교한 작업에 동원된 도구는 단지 정과 망치뿐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엘로라는 불교, 힌두교, 자인교가 차례로 조성된 데 반해, 아잔타는 모두 불교 석굴이다. 아잔타 석굴 군은 천 년 동안 데칸고원의 정글 속에 파묻혀 있다가 1819년 사냥을 하던 영국 병사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천 년 만에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낸 석굴 군을 목도한 병사의 전율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잔타의 어떤 동굴에 들어가니 한 남자가 문 앞에 서 있다가 안쪽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손을 모아 입에 가져다 대고 메아리 외치는 모양을 하더니 가사 없는 모음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노래방의 성능 좋은 마이크 에코도 그 울림을 따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양의 그레고리안 찬트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답고 깊이 있는 노래였다. 순간 땀이 철철 흐르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동굴의 공명효과도 있지만 그의 목소리는 천하일품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우리는 일제히 박수를 치고 팁을 주었다. 나는 그이에게 너무 환상적인 노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때가 꼬질꼬질한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흰 이를 드러내고 환히 웃었다. 



4. 만남 


  인도는 여권과 출국 바우처가 있는 사람만 공항에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것도 보딩  서너 시간 전부터 들어갈 수 있다. 아우랑가바드에서 델리까지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하여 보딩 패스를 받으러 가니 직원이 Miss Kim 이냐고 묻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우리가 제일 늦게 왔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부랴부랴 짐을 부치다 보니 깜빡 잊은 것이 있었다. 첫날 델리에서 뭄바이로 환승할 때 샀던 테킬라가 배낭에 들어있던 것이다. 두 잔 밖에 마시지 않은 1리터 술을 가차 없이 빼앗기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인도는 술을 파는 상점이 따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게 큰 도시에 한두 개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술 사기가 어렵다니 내 어찌 오호 통제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의지의 한국인, 호텔에 도착 후 오토 릭샤 왈라에게 물어 와인 샵을 찾아갔다. 값싼 인도산 위스키를 한 병 사고 나니 그나마 진정 모드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원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신발을 벗는 순간 발바닥이 델 것 같아 개구리처럼 팔딱팔딱 뛸 수밖에 없다. 델리는 뭄바이보다 북쪽임에도 불구하고 연일 40도를 웃도는 기온이었던 터라 대리석 바닥은 잘 익은 찜질방 맥반석만큼이나 뜨거웠던 것이다. 그 속을 걷는 내가 삶은 계란처럼 익어가는 느낌이었다. 


  옛 인도 무굴제국의 왕들은 다들 부부 금슬이 좋았던가? 델리의 후마윤 묘는 타지마할의 모델이 된 건축물인데 재미있게도 후마윤 묘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 부인 하지 베검이, 타지마할은 부인의 죽음을 슬퍼한 남편이 만든 것이니 말이다. 후마윤 묘는 비록 호화스러운 재료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건축학 상으로 안정된 구조에,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정원의 설계 등이 무굴 시대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것은 또 그대로 타지마할의 건축에 적용되었다고 한다. 무굴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은 행운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 바부르에 의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아프간의 공격에 의해 인도를 떠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5년간의 망명 생활과 자신의 제국을 찾기 위한 오랜 전투 끝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도 잠시 다시 왕위에 오른 지 6개월 후, 델리에 있는 자신의 도서관 계단에서 굴러 사고로 죽고 말았다. ‘창밖을 봐, 바람이 불고 있어, 하루는 북쪽에서, 하루는 서쪽에서, 인생이란 그런 거야, 우리는 그 속에 있는 거야’ 하던 영화 대사처럼 후마윤 묘의 돌창을 통과한 아침햇살과 그 속을 떠도는 먼지까지도 평화스러워 보였다. 그 바람과 빛 속의 석관을 바라보는 발걸음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뉴델리 역 부근의 가장 큰 시장으로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인다는 빠하르 간지로 갔다. 길거리에 앉아 헤나 타투를 하는 유러피언들도 보고 인도 상품들도 구경했다. 그러나 그조차 녹록지 않았다. 끊임없이 빠라 바라 밤 경적을 울리며 달려드는 릭샤와 오토바이, 소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 번에 발길을 몇 걸음 떼 지도 못하고 자주 비켜서거나 멈추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영 전진이 되지 않아 힘이 배로 들었다. 배 째라 식으로 클락션이 울리든 말든 소가 어슬렁거리듯 내갈길 간다 하며 빈둥거리니 한결 편해졌다. 역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이다.   

   

  질척한 뭄바이 광장에서 신고 다녔던 슬리퍼 바닥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신발 고쳐주는 곳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신발 가게로 들어가 수선 집을 물어보니 벗어보란다. 신발을 살펴본 주인은 본드를 찾아들고 나와 다짜고짜 붙여주고는 꾹 누르란다. 얼마냐고 하니 공짜란다. 웃으며 고맙다고 하니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노 프라브럼” 하며 웃는다. 그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가 행복하게 웃는 통에 내가 행복해진 것을 그는 아는지 모르겠다. 


5. 삶


  바라나시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타러 델리 역으로 갔다. 이미 뭄바이 역에서 충격을 받았던 터라 이제 웬만큼은 적응이 되었지만 여행객과 노숙자들이 뒤섞여 아차 하는 순간 정신을 놓치기 십상인 건 델리 역도 마찬가지였다. 개찰구도 없는 역에서 겨우 겨우 찾아간 델리의 플랫폼 역시 아무 데고 눕거나 앉아 있는 노숙자와 여행객과 그들의 짐 보따리 등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그러다 기차가 도착하면 밀고 밀리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된다. 버스에서 내리던, 유적지에서 나오던, 시장 거리를 다니던, 기차역에 가던, 빠지지 않고 나타나 구걸하는 아이들이 호환마마만큼 무섭다. 히치콕의 영화 <새>을 연상시킨다. 까마귀 떼처럼 몰려와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먹는 시늉을 하며 돈을 달라고 하거나, 오빠가 북을 치면 여동생은 머리통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하는 링을 가지고 각종 요가 동작의 묘기를 부린다. 처음엔 안타까워 돈이나 사탕, 과자, 초콜릿 등을 주었지만 밑도 끝도 없다.  짜증을 넘어 화가 난다. 남은 사탕과 과자들을 모두 털어 나눠주고 나니 또 다른 아이들이 새떼처럼 몰려와 손을 내민다. 영화 ‘슬럼 독 밀리어네어’에 나오는 꼬마 형제 살림과 자말이 떠올랐다. 영화와 현실이 다르지 않은 나라, 인도였다. 


  뭄바이에서 아우랑가바드로 가는 야간열차를 이미 경험한 터라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지난번과 똑같은 AC 2단 침대 열차였지만 그때와는 달리 끊임없이 출현하는 바퀴벌레로 인해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칸에서 잡은 수만 해도 100마리가 족히 넘을 것이었다. 이 기차 바퀴는 대형 바퀴 벌레?로 상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저렇게 바퀴벌레와 동침하길 거부하며 뒤척이다 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나마 차창 밖으로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니 좀 나았다. 새벽인데 철로 변엔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손엔 작은 통이 들려 있다. 그리고 딱히 어디랄 것도 없는 지점에 멈추어 무슨 섬처럼 쭈그리고 앉는다. 앗! 그건 1회용 노천 해우소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다도해처럼 느껴졌다. 들고 간 물통엔 일 처리한 왼손을 닦을 물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뒤로 돌아 앉지 않고 얼굴을 철로 쪽으로 향하고 있다. 엉덩이만 보이지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인가 보다. 아침 용변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도 심오하고 평화로워 보여 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었다.  


 6. 죽음  


  바라나시 졍션 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들어가 씻고 아침 식사를 한 후 갠지스 강가로 나가기로 했다. 급히 빨래를 해서 널고 식사를 한 후 버스에 올랐다. 그 사이 30분가량 비가 내렸는데 바라나시로 가는 길이 온통 진창이다. 대형버스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좁은 도로는 오토 릭샤, 사이클 릭샤, 사람, 소, 염소, 개로 뒤엉켜 아수라장이다.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해서도 얼마간은 걸어야 했다. 고행이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움직임의 연속이다. 석가모니의 첫 설법지인 사르나트와 녹야원, 박물관, 사원들을 방문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행과 떨어지지 않으려 안 간 힘을 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12억 인도라더니 어딜 가나 넘쳐나는 사람들 때문에 억 소리가 절로 났다. 


  미로 같이 좁은 골목길 사이를 여지없이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며 달린다. 수시로 등장하는 소와 개를 피하며, 앞사람이 외치는 ‘똥 조심’을 메아리처럼 릴레이로 뒷사람에게 열심히 전했건만 질펀한 소의 그것을 한 번도 밟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가끔 길을 막고 있는 소 사이를 비집고 가는데 파리라도 쫓을 양으로 그 더러운 꼬리를 흔들 양이면 진퇴양난이었다. 만일 여기서 불이 나면 하는 생각을 하니 머릿속에서 먼저 불이 난 것 같았다. 그렇게 미로 찾기를 얼마간 하고 나서 도착한 한국식당 라가 카페의 한글 메뉴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신 라면에 밥을 얹어 주는 라면 정식을, 어떤 이는 냉면을, 그리고 어떤 이는 김치 볶음밥을 주문하고 나는 참치 김치찌개를 시켰다. 명목이 점심이지만 시간은 저녁 6시를 넘어서고 이미 꼬르륵 합창이 끝나버린 때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별 맛은 없었지만 공기 밥까지 추가로 시켜서 배를 채우고 나니 임금님이 부럽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규칙적인 리듬의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근처엔 크고 작은 사원이 많았기에 어디서 제를 올리는 의식이려니 했다. 식사를 하고 좁은 계단을 내려와 역시나 좁은 골목에 서자마자 두 줄의 남자들이 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행진을 해왔다. 앞선 이가 ‘람람 사띠야해’를 선창 하면 뒤따르는 사람들이 후렴처럼 ‘람람 사띠야해’를 받으며 나아갔다. 장작을 둘러 맨 사람, 깃발을 든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모두 남자다. 좁은 길에서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건물 계단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하는 순간 대나무로 만든 들것을 둘러 맨 남자들이 보이면서 반짝이는 주황색 천에 싸진 시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꽃으로 장식한 검은 얼굴을 본 순간 그만 정신이 혼미했다. 순식간에 맞닥트린 그들은 갠지스 강으로 화장을 하러 가는 운구 행렬이었다. ‘람람 사띠야해’는 ‘신의 이름만이 진리다’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상여소리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였다. 행렬이 끊어진 틈을 타서 우리도 강가로 향하니 이미 사위는 어두워진 후였다.


  마크 트웨인은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더 오래된 도시가 바라나시라고 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하여 인도로 흘러든 갠지스 강은 산스크리트나 힌디어로 강가(Gaga)라고 한다. 정부에서 갠지스 강의 오염을 우려하여 각종 제재를 가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시위를 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물은 물이 아니다, 단지 어머니 강이 아픈 것이다” 

 「태초에 갠지스 강은 천상에서 흐르던 강이었다. 그 강은 비쉬누 신의 발가락에서 흘러나와 천상의 극락세계 곳곳을 적셔주는 풍요의 강이었다. 그러던 중, 지상에 가뭄이 들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인 한 분이 고행을 한 결과 이 갠지스 강을 지상으로 끌어내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곧바로 떨어진다면 땅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리고 말 것이었다. 이 사태를 알게 된 시바신이 결국 자신의 머리로 강 물줄기를 받아 그 물줄기들을 조각내어 땅에 안착시킨 것이다. 그래서 갠지스 강은 시바의 머리칼이요, 시바가 목욕하는 곳이고, 시바가 명상하는 곳이다. 그러한 연고로 이 갠지스 강은 인도인들에게 성스런 물이 되는 것이다.」


  힌두교도들은 이 강물에 목욕하면 모든 죄를 면할 수 있으며, 죽은 뒤에 그 강물에 뼛가루를 흘려보내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현신을 마감한 육신을 불로 태워 신에게 바친 후 어머니 강가에 안겨 모든 죄를 정화받고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인도인들의 소망을 강가에 서니 알 것 같기도 했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 유역에는 연간 100만 이상의 순례자가 찾아든다고 하니 북새통을 이루는 건 비단 어제오늘 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우기인 탓에 불어난 강물은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인 가트를 모두 삼켜버렸지만 화장터에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게 보였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빨리 나오세요’ 하던 무소유의 법정 스님 다비식이 떠올랐다. 진정한 자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지 않은 채 가지는 것이라 했던 파울로 코엘료와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같은 가지에서 나온 생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강가에 도착한 시신은 죄를 씻는 의미로 먼저 성스런 강물에 담근 후 머리와 다리가 보이게 흰 천으로 싼 후 장작을 올려 이제껏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화장터의 신성한 불을 붙인다고 한다. 돈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장작은 나무 종류도, 나무의 양도 다르다니 죽어서도 빈부의 차이를 벗어나지 못함이 씁쓸했다. 


7. 내려놓음, 헤어짐 


  세상에 외롭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 죽음 앞에 비난받을 생이 어디 있으랴? 산 자와 죽은 자가 여과 없이 만나는 장소 버닝 가트엔 외국인도 여자도 출입을 금했으니 나는 2중으로 해당되는 터였다. 아니 허가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볼 배짱은 없었다. 힌두인들은 사진기의 플래시 불빛에 영혼이 놀라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였다. 화장터 뒤편으로 화장 순서를 기다리는 시체 안치소가 있었다. 돈이 없어 충분한 장작을 사지 못하면 타다 만 시신을 그대로 강에 띄워 보낸다고 한다. 그 와중에 시신의 일부를 개가 물고 가도 유족은 못 본 채 하며 곡소리를 내며 울지도 않는다고 했다. 어린 아기는 화장을 하지 않고 강물에 그대로 띄워 보내고, 타다 남은 시신 역시 강물로 보내 물고기의 식사가 된다고 하니 우리 정서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잊히는 것이나, 누군가를 잊는 것이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망각이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꼈다. 누군지 모를 주검을 태운 재들이 수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낯선 풍경, 낯선 냄새, 낯선 시간, 내가 인도 속에 있음이었다. 


  갠지스 강변에는 죽기를 기다리며 구걸을 하여 장작을 하나씩 사 모으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바라나시의 수용시설 묵티 바반(해탈의 집)이 그것이다. 이승을 떠야 할 시기가 왔음을 깨달으면 그들은 임종을 맞으러 바라나시를 찾는다. 그들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바라나시에서 숨을 거두면 과거의 업을 모두 씻을 수 있고 번뇌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밀려든 강물과 소의 오물과 진흙이 뒤범벅된 강가엔 영혼을 위로하는 노래와 종소리가 불꽃과 함께 어우러져 삶의 씁쓸함을 전하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드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카스트에 따라서 하층 카스트는 강가 쪽, 상층 카스트는 강에서 떨어진 언덕 쪽에서 화장을 하며 화장은 24시간 지속되는데 하루에 600여 구의 시신이 재로 분하여 어머니 강에 뿌려진다고 한다. 바라나시의 부자는 화장터 주인이란다. 타다 남은 금붙이들은 화장터 주인이 챙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외국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무를 기부하라고 한다. 부자가 더 무서운 건 인도도 마찬가지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갠지스가 내일도 뜨거운 태양을 토해 내려나? 보트를 타고 일출을 보려면 새벽 5시엔 출발해야 한단다. 인도(印度)는 참고 가야 하는 길(忍道)이라는 뜻인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과 함께 잠이 들었나 싶기 무섭게 모닝콜이 울렸다. 머릿속은 그야말로 수년 간 가뭄을 겪고 난 곳간처럼 텅텅 소리를 낼 정도로 피곤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모자를 눌러쓰고 나가니 새벽부터 덥다. 한참을 달리니 자동차 실내 온도가 30도에서 29도로 떨어졌다. 놀라지 마시라, 에어컨도 작동 중이고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선풍기도 달려있는 소형 버스다. 그야말로 인도는 천연 사우나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인도, 다시 생각해도 땀난다.  


8. 소원, 디아(Diya)


  전날 가봤다고 이제 풍경이 제법 익숙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난밤 보다 더 많다. 성스러운 강물에 누구보다 먼저 몸을 씻으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대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인도에 가면 꼭 해 보리라 마음먹은 것이 디아 띄우기였다. 나뭇잎을 말린 접시에 꽃불을 띄워 보내며 소원을 비는 의식이다. 바구니에 색색의 꽃을 수북이 담아 놓고 디아를 파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배들이 가트를 가로막고 정박한 관계로 디아는 강을 따라 나아가지 못하고 안쪽에서 빙그르르 맴돌다 사람들이 목욕하느라 휘정거리는 바람에 물속으로 가라앉기 일쑤였다. 디아 한 개의 값은 3~5루피(100원 남짓), 손바닥보다 더 작은 꽃불에 꿈과 소망을 띄워 보내는 맘이 얼마나 기막히게 애절한지 금세 맘이 숙연해졌다. 머드를 풀어놓은 듯 탁한 강물과는 반대로 인도인들의 의상과 장신구는 컬러풀하기 그지없다. 수염을 주황색 헤나로 물들인 남자들이 많았고 힌두교도들은 거의 주황색 옷을 입었다. 목욕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양치하는 사람, 강물을 물통에 퍼 담는 사람, 디아 파는 사람, 강물에 데려간 아이의 응아를 치우는 엄마. 그 풍경은 나 어릴 때, 명절이면 꼭 엄마가 데리고 가셨던 공중목욕탕을 떠올리게 했다. 인도의 『마누 법전』에는 ‘밥을 알몸으로 먹지 않는 것처럼 목욕도 절대 알몸으로 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이 목욕한 웅덩이에서는 목욕하지 말고 항상 강이나 호수, 연못 등에서 하라’고 써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도인들은 옷을 입고 목욕하며 항상 흐르는 냇가나 강에 가거나 펌프로 물을 끼얹는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결코 대중탕을 찾아볼 수가 없다. 목욕을 함으로써 그들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매일 윤회를 체험하는 것이다.

디아를 띄우려는 일행들이 하나 둘, 보트를 건너 강물 안쪽 보트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난 내 디아를 대신 띄워 주길 부탁하곤 강가에 혼자 남았다. 원래 계획했던 보트 투어는 강물이 불어 취소되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일행들이 내게 손짓을 한다.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극구 손을 내저으며 안 가고 싶으니 다녀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배 타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둘째 이유요, 그 첫째 이유는 혹시나 강이 품고 가는 시신의 일부를 보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행을 태운 보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나를 혼자 놔두지 않을 요량이다. 마사지해라, 어디서 왔느냐? 오토 릭샤 타지 않겠느냐? 좋은 파시미나 파는 곳을 소개하겠다, 블라 블라 블라… 그렇게 30여 분 동안 근처를 어슬렁거리는데 갑자기 어떤 이가 내 이마에 빨간 칠을 하고는 1루피를 달라고 한다. 바바 신을 믿으라며 내 이마에 흰 칠을 해주겠다는 사두도 나타났다. 지갑을 두고 나와서 돈이 없다고 하니 노 프라블럼이라며 기어이 이마에 흰 칠을 해 주곤 사진 한 장 찍자고 한다. ‘오케이 노 프라블럼’, 이제 내 입에서도 노 프라블럼이 술술 나온다. 그와 나를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이 무슨 희한한 구경거리를 보는 양 즐거워하며 박수를 친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이제 바바 신까지 나를 보살피게 되었으니 인도에 머무는 동안은 노 프라블럼이겠군 했다. 상인들과 외국인 여행자, 우리만큼 먼 길은 아니지만 그만큼 먼 시간을 들여 강가를 찾은 인도인들이 한데 뒤엉켜 바라나시 시가지는 온통 별천지 신세계다. 인도에선 어디든 카메라만 들이대면 작품이다. 그게 거지든, 아이든, 노파든, 수행자든, 릭샤왈라든, 비단 사람뿐만이 아닌 유물이나 건축물, 거리 풍경할 것 없이 모두 작품이 된다. 사진을 너무 많이 찍다 보니 이러다 내 영혼이 모두 빠져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발가락이나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나병환자들이 줄지어 앉아 손을 내밀고 있다. 그들도 노 프라블럼 하며 살까? 정말 내 주머니엔 돈 한 푼 들어있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마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고 강가로 돌아오니 일행들이 탄 보트가 돌아오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영혼이 혼재하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서의 이틀이 이토록 긴 그림자로 남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인도 속에 들어가 인도를 숨 쉬고 인도를 먹고 있을 뿐이었다.



  인도는 전력 사정이 열악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전이 된다. 8시가 넘으면 거리는 어둡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인도 여인은 보기 힘들다. 숙소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고 도로는 조금 헐렁해졌지만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경적은 여전히 끊이질 않는다. 숙소까지 사이클 릭샤를 탔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해의 환호를 받으며 행여 바람에 모자가 날아갈까 살포시 모자챙을 잡고 고상하게 인력거를 타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상상했던가?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자전거 릭샤를 타는 건 고행이었다. 소음과 매연, 배설물의 악취로 이목구비 전체가 문을 닫고 싶어 했다. 한 마디로 오감이 불편했다. 스타일이고 뭐고 따질 겨를도 없이 싸구려 인도산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니 무슨 탈레반 반군 같아 보인다. 갈지 자로 흔들리는 릭샤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꽉 잡고 잘 디뎌야 한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자전거를 끄는 릭샤 왈라의 비쩍 마른 뒷모습에서 문득 김 첨지가 떠올랐다. 며칠 째 손님이 없어서 허탕을 치고 돈 한 푼 벌지 못한 김 첨지는 아프다며 곁에 있어달라는 아내를 뿌리치고 인력거 일을 나간다. 그런데 김 첨지는 그날따라 손님도 착착 맞아떨어지는데다가 삯도 평소보다 후하게 받는다. 운수 좋은 날이라며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을 한 그릇 사들고 갔지만 아내는 죽어있더라는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 땀에 절어 탈색된 티셔츠 안쪽에 뼈와 근육이 드러나 보이는 릭샤 왈라에게 저녁 먹었냐고 물으니 가족들이 기다리기 때문에 집에 가서 먹을 거라고 한다. 달리 줄게 없어 마시던 콜라를 건네주니 사양도, 고마운 표시도 없이 덥석 받아 든다. 그리곤 다른 릭샤 왈라들과 흐뭇하게 나눠 마셨다. 많은 인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었지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인도인들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네가 선행을 하게 되었으니 신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 자신이 그 축복의 기회를 준 것이니 오히려 자기들이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것도 말이 되는 듯했다. 그가 돌아갈 집이라는 것이, 그가 가족과 둘러앉아 먹을 저녁 식사라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 한숨 나올 정경인 게 뻔하지만 그는 김 첨지보다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인도 사내들의 망측한 버릇 하나를 고자질해야겠다. 이 친구들, 민망하기 그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사타구니를 긁적 댄다. 그때마다 난 시선의 방향을 멋쩍게 바꾸게 되는데 튀김을 먹고 있던 차장도 긁적, 터번을 두른 나이 지긋한 아저씨도 긁적, 공원에서 사진 찍어달라던 청년들도 긁적, 여기저기서 시간차 공격처럼 다 같이 긁적긁적, 지들이 무슨 마이클 잭슨도 아니면서 말이다. 나 원 참….


9. 물음 


  늦은 아침을 먹고 카주라호로 향해 떠났다. 지난밤 잠도 부족한데다 강가에서 긴장한 탓에 버스에선 꿀잠을 잤다. 얼마나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는지 모른다. 잠에서 깨니 차창으로 바라나시에서 보았던 차림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출발한지 2시간 남짓 되었는데 행진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카놔리야 라고 하는 그들은 순례자로 한 달가량 동안 수 백 킬로미터를 걷는다고 한다. 순례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과 의미는 비슷하지만 방법은 사뭇 달랐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울긋불긋 꽃 장식의 물통을 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샤프란이라고 불리는 주황색은 불을 의미하는데 번뇌와 욕망, 업을 태워버린다고 믿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대부분 샤프란 옷에 맨발이다. 차선 하나를 완전히 통제하고 이어진 행렬은 바라나시로 향하는 거란다. 언제 어디서부터 걸어왔을지 모르는 순례자들의 길목에는 간간히 식당 겸 휴게소가 있었다. 순례자들은 강가 성수를 뜰 플라스틱 통이 들어있는 호주머니가 달린 사프란 장대를 벗어, 길가에 있는 나무 받침대에 걸어놓는다. 이들이 벗어놓은 샤프란 수십 개가 나란히 걸려있는 걸 보는 것도 순례 철에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성스런 강가 물은 바닥에 내려놓으면 안 되기 때문에  걸어놓는 거란다. 낮과 밤을 걷고 또 걸어 어머니 강으로 향하는 그들의 의지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갠지스에서 목욕을 하고 강물을 떠서 고향에 가져가는 것이다. 이들 가난한 순례자들은 고난의 행군을 통해 종교적 신념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져 간다.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 눈에 비친 그들의 고행은 그들에겐 평온이며 안식이요, 기쁨이고 행복 이리라. 누구에겐 하찮게 보이는 것이 누구에겐 거룩한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인도에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바보짓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어디든 자리를 잡고 소변을 봐야 한다. 아프리카 가나에는 서서 소변보는 여자가 있다더니 인도에는 앉아서 소변을 보는 사내도 있었다. 여자들의 여건은 더 나쁘다. 훤한 대낮에 은폐가 용이한 장소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출발한 지 3시간쯤 지났을 때 주유를 하기 위해 잠시 정차하니 하나뿐인 화장실 앞엔 벌써 줄이 길다. 여자 가이드가 빨리 해결할 곳으로 갈래요? 묻기에 그녀를 따라갔다. 나무 한 그루씩을 등지고 앉아 시원한 진저리를 느끼려 하던 차에 어디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사리를 입은 인도 여자들 한 무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오토바이가 달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참았던 소변은 쉽게 그치지도 않는 법, 고장 난 수도꼭지요. 칼로 물 베기였다. 겨우 브레이크를 걸고 지퍼를 올릴 새도 없이 허둥지둥 돌아오는데 뒤따라오는 가이드 왈, 급해서 빤쮸는 못 올리고 바지만 올렸다고 하며 투덜투덜한다. 그네들은 일상이 그러면서 외국인들의 노상방뇨는 그토록 신기했는지? 아무튼 버스가 쉴 때마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녀야 가벼운 몸으로 버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카주라호 하면 무슨 호수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미투나(쌍둥이라는 뜻으로 남녀 교합상)라는 단어는 몰라도 그 섹시한 포즈의 돌조각 많은 데 있잖아 하면 ‘아~ ’하며 어디선가 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카주라호는 타지마할과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유적지이자 관광지이다. 철도가 연결되지 않고 대륙 깊숙이 박혀있어 교통이 불편하지만, 여행자들은 기어이 이곳을 찾아간다. 여행자들이 카주라호를 즐겨 찾는 이유는 에로틱한 조각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곳은 한적한 시골이라 인도의 혼잡한 소음에 지친 여행에서 모처럼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좋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유명 관광지 명성에 걸맞게 마을 외곽에는 일류 호텔들과 비행장까지 갖추어져 있다. 


  에로티시즘의 유산 카주라호는 聖地인가? 性地인가? ‘말과 성교하는 남자, 이를 엿보는 여자’ 생각만 해도 엽기적인 이런 장면을 신전에, 그것도 1000년쯤 전에 버젓이 조각해 놓은 카주라호는 분명 19금 도시이다. 간디는 카주라호의 에로틱한 사원들을 모두 부숴버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곳 사람들은 사랑의 탑을 보러 온 여행자들로 인해 먹고 산다. 종교와 신화가 지배하는 땅 인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순례자들로 북적거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인 아그라의 타지마할이 대칭의 전당인 것처럼 인도엔 극상의 대칭적인 존재들로 넘쳐난다. 빈자와 부자, 귀족과 천민, 성자와 악인. 이해할 수 없는 이 카오스의 세상엔 사원의 형태와 주제조차 신비롭다. 에로티즘으로 먹고사는 카주라호의 출산율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 이곳에서 번성한 찬드라의 자손이라 칭해지는 찬델라 왕국이 최고 전성기에 세운 사원도시가 카주라호다.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정복했을 때 사원의 조각들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파괴해버리는 바람에 85개의 사원 중 22개만 남아있다. 사원 입구는 평범한 힌두사원의 그것처럼 별다른 특징이 없지만 일단 사원 앞으로 다가서면 누구든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게 된다. 거의 모든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염하고 관능적인 성행위 장면을 부조한 조각들로 사원 전체가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원의 외곽을 장식하는 조각들은 그야말로 카마수트라(섹스 테크닉)의 전당이다. 여러 명의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과 동물과의 성행위 장면 등 끝이 없다. 이 에로틱한 상상들은 당대의 뛰어난 조각가와 예술가의 손을 빌어 생생하게 현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자이나교의 사원은 미투나 상을 기대할 순 없지만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유롭다는 자이나교의 창시자답게 나신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어 카주라호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군상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다. 풍만한 젖가슴과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엉덩이, 잘록한 허리 그리고 매혹적인 눈매 등 카주라호 조각상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과 다른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같다. 사원의 아름다운 조각상에 사로잡혀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미투나 상 모습도 더욱더 현란해지기 시작한다. 조각상이 붉은 태양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날 때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꿈틀대며 살아날 것만 같다. 남녀 교합상 모습이 외설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돼 보이는 이유는 아마 힌두의 신과 인간의 영혼적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사원에서 나오니 80여 가지의 남녀 교합상을 사진으로 엮은 인도의 성 지침서인 카마수트라를 파는 사람들이 여행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런데 그 민망한 사진이 들어있는 책을 파는 이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다. 대부분 여행자가 차를 타는 순간 값은 최하로 내려간다. 가이드가 설명할 때는 ‘저 정도쯤이야 다 아는 거 아냐’ 하거나 별 관심 없는 듯 먼 산만 바라보며 태연자약하던 많은 사람들이 카마수트라 사진첩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19금에 취해 키득거리며 오랜만에 더위도 피곤함도 잊고 있었다. 


10. 끌림, 비

 

  드디어 아그라로 향하는 날. 잔시에서 기차를 타고 타지마할이 있는 도시 아그라까지 갈 예정이다. 잔시로 가던 중 오르차에 있는 고성(古城) 제항기르 마할에서 점심을 먹었다. 인도는 왕위 계승이 우리나라처럼 장자승계가 아니라 능력제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형제끼리 피 터지는 싸움은 기본, 무굴제국의 왕 악바르에게 아들 제항기르가 반역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성주가 도피시켜 준 곳이란다. 하지만 2년 후 악바르가 죽고 제항기르가 왕이 되었고 제항기르를 도와주었던 성주 마하 자르는 그 덕분에 무굴 왕국의 막강 파워에 힘입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제항기르가 죽고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이 왕위에 오르자 마하 자르는 그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성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1층은 레스토랑으로 2,3층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 고성은 세월의 더께가 그대로 얹혀 있었으며 하늘과 바람의 기운이 달리 느껴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세월을 거부할 수 없는 비까지 내리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라는 영화 제목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 성에서 한 달만 살고 싶었다. 그곳에서 내 여행을 마음껏 디자인할 자유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차 시간 때문에 발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제항기르 마할, 그곳은 이미 인도를 또 가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11. 사랑


  아픈 것이든, 그리운 것이든, 잊으면 안 되는 것 까지도 잊은 듯 살아야 되는 때가 있다. 그중에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 것이다. 피 맛 본 짐승처럼 사랑하라 했던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허용되는 마약이 사랑이라 했던가? 타지마할은 황제와 왕비의 구구절절한 사랑이 낳은 무덤이다. 그곳으로 들어서는 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선이 한 곳에 멈추며 뜨거운 바람이 한 줄기 훅~ 지나가듯 가슴이 뛰었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정점에 대한 경외감마저도 초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에 침식당하지 않고 공간에 변형되지 않는 단 하나의 사랑이 시공을 초월해 내 앞에 놓여있었다. 샤자한의 피보다 더 진한 사랑이 유백색 비늘이 되어 눈을 찌르고 있었다.


  눈부신 흰색의 연속이다. 타지마할은 물론이고 바닥과 좌우 네 귀퉁이에 서있는 탑도 모두 흰색이다. 경이의 극치랄까? 어떤 설명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묘역을 두르고 있는 대리석은 종이 자르듯 예리하고 정확하게 모양을 만들어 홈을 파고 색이 다른 대리석을 넣었다. 꽃잎은 붉은 옥돌을 박고, 수술과 암술에는 또 다른 색의 보석을 박는 상감기법이었다. 대리석이나 보석을 무슨 고무 찰흙 주무르듯 하여 매끄럽게 만들어 놓은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은 가히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이었다.

타지마할에 얽힌 일화는 ‘전설 따라 삼천리’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인도를 통치했던 이슬람 왕조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지배했던 샤자한의 두 번째 왕비 뭄타즈 마할은 샤자한의 수많은 왕비 중 가장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17년의 결혼 생활 중 15번째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쯤 되면 총애라는 말이 끔찍하다. 17년 동안을 거의 임신 중이었다는 말인데 그게 총애? 희대의 건축 광이기도 했던 샤자한은 부인보다 건축을 더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사랑을 빌미로 만든 건축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뭄타즈 마할이 죽은 지 6개월 후 그녀의 마지막 소원대로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굴 제국은 물론 이탈리아, 이란,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의 건축가와 전문기능공 2만 명이 불려 왔다. 대리석 등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서 코끼리도 1000여 마리나 동원된 대공사는 22년간 이어졌다. 최고급 대리석과 붉은 사암은 인도 현지에서 조달되었지만, 황백 옥, 다이아몬드, 비취, 수정, 사파이어, 산호, 자수정 등의 보석은 인근 나라에서 최상품으로 수입했다.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 샤자한은 이 같이 아름다운 건물이 두 번 다시 만들어지지 않도록 건축에 참여했던 기술자들의 손목을 잘라 버리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 벌인가? 이러한 샤자한의 광적인 사랑은 그의 인생과 나라까지 불행하게 만들게 된다. 타지마할 완공 10년 후, 그의 막내아들 아우랑제브는 반란을 일으켜 샤자한의 왕위를 박탈하고 아그라 포트의 무삼만 버즈에 가두었다. 거기서 8년을 지낸 샤자한은 결국 죽어서야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 옆에 묻힐 수 있었다. 지금부터 약 350년 전 일이다. 타지마할 뒤로 야무나 강이 느릿느릿 흘러간다. 그 끝에 아스라이 붉은색의 거대한 성이 보인다. 아들한테 왕위를 빼앗긴 샤자한 왕이 사랑하는 부인의 묘역인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던 성 아그라 포트의 무삼만 버즈다. 아그라 포트의 긴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며 몇 개의 문을 거치니 넓은 정원이 나왔다. 미로같이 얽힌 내부의 길이나, 잘 꾸며진 정원들은 이 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하는데 이의를 달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보석으로 만든 감옥이잖아? 유폐도 이 정도면 괜찮겠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그라 포트의 발코니에 오르니 야무나 강을 따라 멀리 사랑의 금자탑인 타지마할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줌으로 당길 수 있는 카메라도 없던 시절, 2km나 떨어진 타지마할을 애처롭게 바라보았을 샤자한을 생각하니 그 무덤이 더 슬프게 보였다. 몸이 쇠약해져서 그나마도 볼 수 없게 된 샤자한은 바닥에 보석을 박고 그곳에 비치는 타지마할을 간신히 바라보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야무나 강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묘를 짓고 구름다리로 타지마할과 연결하려고 했던 그의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죽어서 아내 옆에 눕게 되었으니 그 또한 다행 아닌가 생각되지만 샤자한의 마음은 어땠을지… 


12. 꾸밈  


  겉모습이 아름다워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있고 외양은 심드렁하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가는 경우가 있다. 인도의 옛 수도 파테푸르시크리는 후자의 경우였다. 암베르 포트는 한 마디로 인도의 만리장성 같은 형태이다. 걸어서 오르면 20분 정도 걸린다고 하나 코끼리를 타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정코장?으로 가니 수많은 여행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수십 마리의 코끼리들이 성을 오르내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성에 도착하니 또 다른 탄성이 나온다. 인도의 건축물은 건축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예술 작품이다. 그곳 벽에 그려진 파스텔 톤의 그림과 조각들이 얼마나 예쁜지 한 조각 떼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성의 앞부분은 화려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내려다보는 조망 또한 아주 훌륭했다. 창가에 자리 잡고 앉으니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해주었다. 큰 정원을 가운데 두고 아름다운 방들이 꾸며져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거울의 방’이다. 딱히 한 개의 방이 아니라 왕비가 거처했다는 공간 모두를 말하는데 ‘쉬즈 마할’이라고 불린다. 사방 벽에 거울로 만든 모자이크가 되어있는가 하면, 창문은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꾸몄다. 천장은 둥근 궁륭형이 가미된 장방형인데 거기에도 거울의 모자이크가 있다. 들리는 말에는 촛불 한 개만 켜면 방안이 온통 환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인도는 하루하루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자이푸르는 시가지가 온통 분홍색(산호색) 건물들로 즐비하다. 1876년 영국의 웨일스 왕자가 처음 방문했을 때 마하라자가 환영한다는 의미의 핑크색(인도에서는 핑크가 환영을 뜻한다)을 온 시가지에 칠했는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도시는 핑크 시티로 불린다. 이곳을 보고 나니 온통 집들이 푸른색으로 칠해진 도시 조드푸르가 가고 싶어 졌다. 하지만 이번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이래저래 인도는 다시 갈 수밖에 없을 듯? 인도의 국조가 공작이라 공작 꼬리털로 만든 부채와 먼지떨이 장사가 많더니 그곳엔 공작 문이 사방에 있다. 컬러와 문양이 각각 다르지만 세밀한 디자인과 색채가 너무 아름다웠다. 


- 에필로그


  모포를 뒤집어쓴 노숙자들이 송장처럼 거리에 누워있는 이 나라는 아시아에서 인공위성을 가장 먼저 쏘아 올렸다. 아직도 아침마다 물통을 들고 철도변에 나와 용변을 보는 사람들이지만 핵을 보유하고 강대국 반열에 서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수많은 사두들이 영적 성취를 위해 토굴 수도를 하는가 하면, 발리우드라 불리는 세계 최대의 영화 제작국이자 실리콘밸리(미국의 Santa Clara의 속칭)를 추격하고 있는 컴퓨터 산업 국가이며 최신형 미사일을 소달구지에 달고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는 알다가도 모를 나라가 바로 인도다. 

맥도널드에도 스타 벅스에도 도어맨이 있는 나라, 온갖 교통수단의 살인적인 데시벨이 귀를 멍하게 하는 나라, 외국인은 정원만 타지만 현지인은 지붕에도 선반에도 태울 수 있을 만큼  모두 태우는, 아니 실려 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버스와 트럭들, 문맹률이 높아 어떤 주에서는 투표용지에 후보자나 정당을 그림으로 표시할 정도인 ‘Incredible India’


  하지만 신의 손으로 만들었을법한 건축과 예술문화는 공작의 깃털보다 더 화려하고 치밀했다. 코끼리처럼 육중한 인구로 소처럼 더디 걷지만 신에 대한 믿음은, 헐벗고 굶주리는 일 따위는 노 프라블럼이었다. 한없이 느려 보이지만 그 깊이와 끝이 보이지 않는 장강의 흐름 같은 인도의 모습은 쉽게 평정심을 잃고 자기중심적 가치관을 우선시하는 우리 스타일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행복의 스펙트럼은 모두 다르다. 꿈을 갖고 사는 영혼은 빛나는 법, 실현하기 어려울지라도 꿈이 있으면 힘이 나는 것이다. 


 


 인도는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편견은 자주 브레이크가 걸렸고, 그들의 끈질긴 그악스러움에 고개를 외면했으며, 천연덕스런 거짓말에 번번이 당황했고, 뼛속 깊은 가난은 침묵하게 했으며, 그들이 이뤄낸 예술 문화에 예외 없이 침몰당했고, 검은 눈동자와 해맑은 미소에 매료되었으며, 끊이지 않는 클락션 소리에 익숙해져 갔지만 인도를 정신적인 판타지로 덧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한 印度에는 人道가 없었고, 힘든 발걸음의 忍道였지만, 무엇인가 모를 것이 나를 引導하고 있었다. 말없이 말 거는 나라 인도, 그곳이 그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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