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May 07. 2016

백야의 돌길,
그 시간의 걸음걸이

"아름다운 기억은 죽지 않는다." 




ㅣ프롤로그




 * 파란색 숨, 세련된 여유 한 조각


  “여행 같이 갈래?" 

  북유럽에 관한 책을 읽은 즈음이었다. 막연하게 언젠가 갈 수 있겠지? 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자고 한다. 거짓말 같다. ‘상트?’ 순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음악감독인 마린스키 극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여행 중의 음악회! 완성된 퍼즐처럼 아름다운 조합이다. 마린스키 극장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프로그램을 확인하고 좌석을 골랐다. E티켓이 발권되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났다’ 라거나 ‘그래도 될 것 같아 떠났다’ 그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지구 북쪽의 파란색 숨을 들이마시며 세련된 여유 한 조각을 맛보고 싶었을 뿐이다. 

“맨 앞자리나 비상구 옆 좌석으로 주시면 좋겠어요.”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해드릴게요.” 

“정말요?” 

발권할 때마다 앞 열이나 비상구 옆 좌석을 요청하곤 한다. 비좁은 이코노미 석에서 여유 있는 좌석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비즈니스석이라니, 무료 업그레이드라니, 너무 쉽게 술술 풀려 나간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헬싱키 반타 공항 입국장, 입국 심사가 꽤 까다롭다. 특히 젊은 중국인들이 더 심하다. 여권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요리조리 세심하게 살펴보고, 꼬치꼬치 묻고 또 묻고 한다. 5분 이상 걸리는 사람도, 어디론가 데려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내 차례, 입국 심사원이 묻는다. 

“어디로 갈 거니?” 

“탈린으로…” 

“거기 왜 가는데?” 

“가고 싶으니까” 

그것이 바로 탈린으로 향한 목적이자 이유, 그리고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남자는 나를 보며 웃었다. 

“즐거운 여행하길 바라” 

‘이거 너무 간단한데…’ 생각하며 미소와 함께 

“키토스(핀란드어로 땡큐)” 

그렇다. 여행은 논리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여행, 다른 나라에서의 또 다른 호흡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이라 하더라도 비가 내리면 한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곳이라고 했다. 그 글을 읽을 땐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7월이라는 숫자와 어울리지 않게 가죽점퍼, 모직 코트 등을 입은 사람들이 따뜻해 보였다. 반바지와 반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공항에 내린 나는 집 없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얇은 후드 점퍼를 꺼내 입었지만 싸늘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중앙역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트램으로 바꿔 타고 웨스트 하버로 가서,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향하는 페리를 타야 한다. 핀 에어 공항버스를 탔다. 펜싱 칼처럼 아주 긴 와이퍼가 느릿느릿 빗물을 훔치고 있다. 일제히 미등을 켠 자동차들이 침묵하듯 고요히 달리고 있다. 중앙역에서 행인에게 물으니 9번 트램을 타라고 한다. 그렇게 여러 탈 것을 거쳐 추적추적 비 내리는 헬싱키에서 또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 항구를 찾아갔다. 페리를 타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타임 테이블을 보니 예매한 티켓보다 한 시간 일찍 출발하는 배가 있었다. 빠른 배로 바꿀 수 있을까 하여 물어보았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도착하는 시간은 오히려 더 늦어요. 그래도 바꾸고 싶어요?” 

“아니오, 바꾸지 않을래요.”

 항구란, 지도의 해안선 어디쯤을 뜻하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땅과 바다의 경계 어디쯤이라고 생각하니 좀 더 근사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항구 주변은 을씨년스러웠고 볼거리는 없었다. 카페 하나 보이지 않고 크루즈와 페리들이 정박해 있다. 다소 거칠어 보이는 남자들과 피어싱을 한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는 모습만 흑백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다. 여행 캐리어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어슬렁거릴 수도 기웃거릴 수도 없었다. 그때 대합실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 승선하러 나갔다. 북적거리던 스낵 코너가 조용하고 한가해졌다.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따뜻한 수프를 먹고 싶어 물어보니 없단다. 머핀과 커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그리고 책을 꺼낸다. 이번 겨울에 예정된 이탈리아 일주 여행을 위해….      


  크루즈 내부는 영화에서처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북적였다. 뷔페와 카지노, 클럽 등, 각종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에서는 면세가 되기 때문에 오로지 술을 쇼핑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를 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결혼식과 같은 큰 행사가 있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승합차를 가지고 와서 대량으로 술을 사간다고 한다. 그 바람에 외교적인 문제가 생기기도 한단다. 위스키나 보드카를 맥주처럼 박스 단위로 사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움직이는 다운타운인 크루즈는 조금은 소란스럽지만 나름 여행의 색다른 묘미가 있었다. 




ㅡ 나이 든 꽃, 탈린



   탈린에 도착한 건 두 시간 후였다. 에스토니아 인구는 130여 만 명이다. 대전시 인구 보다도 적다. 그중 3분의 1이 살고 있는 수도 탈린은 ‘덴마크 사람들이 세운 도시’라는 뜻을 가졌다. 고색창연함이 곰삭은 도시로 유럽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졌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 때부터 구소련까지 두꺼운 장벽 속에 가려졌었지만 1991년에 독립한 뒤 발트 해의 진정한 보석으로 거듭나고 있다. 

 배에서 내리니 비는 그쳐있다. 밤 10시, 그러나 환하다. 약간은 나른하고 조금은 상기된 여행자를 제일 먼저 맞이해 준 건 보라색이 살짝 돌면서 푸른 기운이 도는 하늘, 백야(Midnight Sun, 白夜 : 48도 이상의 높은 위도에서 한 여름,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였다. 

‘아~ 이런 거야?’ 

그러나 느긋하게 백야를 느낄 때가 아니었다.  

“Olav 호텔로 가주세요” 

택시는 파노라마 썬 루프로 윗면까지 투명하다. 거리 풍경은 물론 하늘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신사다운 면모를 가진 중년의 택시 기사는 탈린을 찾는 관광객이 하루에 천 명을 넘는다며 뿌듯해했다. 곳곳을 설명하며 연신 기분 좋은 얼굴이다. 팻 마가렛 타워(Great Coastal Gate and Fat MARGARET'S Tower)가 보였다. 옛 시가지 외곽에 세운 성벽의 일부로 높이 보다(20m) 가로가 5m나 더 길어서 뚱뚱한 타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뚱뚱한 마가렛 성문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기사가 말했다. 

“저기 저 사람, 네 친구 아냐?” 

앞을 보니 정말 거짓말처럼 R이 호텔 앞에 서 있었다. 뒤늦게 여행에 합류한 탓에 항공권을 구하지 못한 나는 일본을 경유하여 1박 하고 하루 늦게 도착한 것이다. R은 그런 나를 마중 나온 것이다.




 * 검푸른 보랏빛 하늘이 적요하게...


  엘리베이터가 없다. 유럽의 곳곳에서 엘리베이터 없는 호텔을 많이 보아왔던 터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18일의 여정을 함께 할 트렁크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실내 인테리어가 예스럽다. 계단엔 고풍스러운 양탄자가 깔려있고 복도는 미로처럼 좁고 어둡다. 유화들이 걸려 있는 벽과 드문드문 놓여있는 앤티크 가구들이 아름답다. 방으로 들어서니 매끄럽거나 편편하지 않은 벽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벽돌과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돌이 자연스레 보이게끔 마감한 벽이다. 마음에 들었다. 한쪽은 원목을 가로지른 벽체였는데 세월이 느껴져서 더욱 좋았다. 흰색 시폰 커튼이 드리워진 여닫이 유리창으론 자작나무 이파리가 너울거리며 바람의 풍경을 중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엔 아직 검푸른 보랏빛 하늘이 적요하게 떠 있었다. 아름다웠다. 나는 그제야 북유럽의 하늘 아래 있음을 실감했다. 행복한 전율이 여정의 피곤함을 마법처럼 풀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차도르로 얼굴을 가린 절세미인을 앞에 둔 혈기왕성한 남자처럼 애가 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발길은 구 시가지의 골목길을 빠르게 스캔하며 아름다움을 탐하고 있었다.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된 유럽 강대국의 찬란한 문화가 작은 도시 안에 응축되어 있다. 무려 800여 년 동안 주변 여러 나라의 식민지로 살아온 에스토니아의 슬픈 역사는 탈린에 뜻하지 않은 매력을 선물한 것이다. 인적 없는 거리는 낯선 도시의 신비로운 무드를 부추겼다. 호텔로 돌아오니 12시가 훌쩍 넘었다.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흥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 돌이 좋아


  어느새 창밖이 훤하다. 6시쯤 되었을까? 시계를 보니 4시 30분. ‘여기 해는 대체 잠을 자긴 하는 걸까?’ 신기했다. 좀 더 자려고 했지만 정신은 이미 정을 맞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 명징했다. 조용히 일어났다. 아이보리 트렌치코트를 입고 갈색 스카프를 둘둘 감은 후 카메라만 챙겨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혹시 길을 잃을지 모르니 호텔 정면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탈린의 새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갖가지 사연이 있었을 집들, 가족의 웃음소리가 자란자란 흘러나왔을 창문, 나지막하게 성가가 울려 퍼졌을 교회, 돌로 쌓아진 성벽을 어루만지며 살펴보았다. 굽이쳐 들어가는 골목 어디서든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들이 불쑥 튀어나올듯했다. 거리엔 꽃들이 수를 놓듯 물결치고 영업을 끝낸 노천카페는 가지런히 접힌 파라솔과 의자들이 새벽이슬을 맞으며 침묵하고 있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공간의 변화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도시를 만날 때가 있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 외에 그곳의 공기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는 곳 말이다. 탈린도 그런 곳이다.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시대를 건너온 기분이다. 과거로부터 수 백 년 간 이어진 역사가 곳곳에 그대로 녹아 있다. 



  탈린의 올드 타운은 전깃줄이 없다. 프라하처럼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시간의 저쪽으로 고스란히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가 유럽을 좋아하는 이유 중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돌길이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울퉁불퉁한 돌의 맛이 정겹다. 돌로 지은 집, 돌로 만든 길, 돌담, 돌계단…, 나는 돌이 좋다. 


  탈린의 올드 타운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중세 광장과 미로 같은 골목길, 그 사이에 빼곡히 들어선 옛 건물들이 마치 천 년 전쯤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기쁨과 흥분을 채운 거리의 풍경들이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전해오는 듯하다. 아치형으로 쌓은 돌기둥 아래 빛바랜 올리브색의 나무문엔 투박한 무쇠 경칩이 달려있다. 그레이와 화이트가 조화로운 젤 소미노, 빨간 경칩이 달린 청회색 문, 그 아름다운 문고리들과 하나하나 악수하고 싶다. 산호색과 병아리색이 어우러진 건물들, 아이보리와 연두색이 조화로운 카페들, 같은 것 하나 없이 모두 아름답다. 색채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건물이나 대문, 현관 옆에는 어김없이 주물로 만든 벽 등이 붙어있는데 고깔을 쓴 모양이다.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원형 콘크리트 가로등에 익숙해진 정서인지라 그런 사소함 마저 기분이 좋다. 제라늄과 이름 모를 꽃들이 창틀이며 문 옆, 노천카페 울타리마다 피어있다. 화려한 리본이나 값나가는 화분으로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은하수처럼 자잘한 흰 꽃과 보랏빛 꽃의 어울림, 무심하게 자란 듯 노랑 빨강이 섞여 있으나 언밸런스하거나 촌스럽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꽃 무더기들은 내 입 꼬리를 저절로 올라가게 만든다. 마치 어릴 때 선물 받았던 64색 파스텔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 그것과 비슷하리라. 거리에는 갈매기 한 마리가 무심하게 돌길을 거닐 뿐 아무도 없었다. 

  


  한 시간 반, 산책이라고 하기엔 조금 긴 시간 동안 거닐다 들어가니 친구들이 깨어 있다. 호텔 식당엔 아름다운 암 체어와 빈티지한 샹들리에가 고풍스럽게 매달려 있다. 체리 토마토를 곁들인 초록의 샐러드와 우윳빛이 감도는 에멘탈 치즈 한 장, 그리고 몽글몽글한 오믈렛, 버터를 듬뿍 바른 하드 롤에 커피를 곁들여 식사를 했다. 아기 조막만 한 파란 사과를 디저트로 먹은 후 본격적으로 탈린 속으로 들어갔다. 


  산이 없는 탈린에서는 30m의 툼페아 언덕이 마치 산처럼 느껴진다. 해안가 절벽에 위치한 툼페아는 최고봉이라는 뜻이다. 성곽에는 원뿔 모양의 붉은 지붕을 이고 있는 탑들이 남아 있다. 아르누보 양식의 국회의사당과 장엄한 돔 천장이 인상적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러시아 정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러시아 정교회는 가톨릭과 달리 성호를 두 번 긋는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 방향도 반대이다. 정교회 교회당 안에는 의자가 없다. 신자들은 서서 기도를 드린다. 가톨릭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이프 오르간도 없다. 아카펠라로 노래한다. 모든 성가는 가슴이 찡해지며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 말간 바람 몇 줌과 울긋불긋한 구시가지 지붕들이 콘체르토처럼... 



   두 건물 사이로 난 투박한 돌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니 교회가 보인다.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루터 교회이다. 교회를 뒤로하고 좁은 골목길을 지나니 구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 전망대에 오르면 이 도시의 복잡다단한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붉은 고깔 지붕, 하늘을 날카롭게 찌르는 첨탑,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목조 건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개성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시간 이 도시가 견뎌온 슬픈 역사에 괜스레 마음이 짠하다. 많은 사람들로 복작대는 전망대에 몸을 섞어 내려다보니 회색 성벽과 탑 그리고 녹색 숲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붉은 지붕과 뾰족한 구시청사의 첨탑 그리고 은빛으로 물든 발트 해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다. 복원한 유화 그림 같은 탈린을 보고 있노라니 왜 그곳이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이자 발트 해의 보석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말간 바람 몇 줌과 울긋불긋한 구시가지 지붕들이 빚어내는 시각적인 요소가 마치 콘체르토처럼 아름다웠다. 



  예나 지금이나 윗동네에 부자가 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의회와 성당, 학교와 같은 주요 국가 기관들이 위치해 있고 전망이 좋아 귀족들의 주거지로 사용된 것이다. 반면 저지대는 상점과 공방, 갤러리 등이 모여 있다. 귀족과 왕이 거주했던 윗동네가 박물관처럼 다소 엄격한 감흥을 주었다면 서민들의 터전이었던 아랫동네는 시장바닥처럼 생생한 활기가 넘친다. 아랫동네는 비좁은 골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 길을 헤매기가 쉽다. ‘짧은 다리’라는 뜻의 ‘뤼히케 얄그(Lühike Jalg)’와 ‘긴 다리’라는 뜻의 ‘픽 얄그(Pikk Jalg)’ 거리가 있다. 주로 귀족들은 경사가 완만한 ‘픽 얄그’ 로 마차를 타거나 말을 타고 다녔다. 하지만 평민들은 거리가 짧은 ‘뤼히케 얄그’ 로 다녔다고 한다. 그 길을 나타내는 의미로 각각의 길의 시점엔 처마 밑에 철로 만들어진 긴 장화와 짧은 장화가 매달려 있다. 그건 글씨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종의 메시지일 터다. 




        

   * 분장을 바꾼 배우처럼 느낌이 다른 새벽과 밤


   천을 두 번 접어 어깨와 허리에서 매듭을 지어 입는 중세 의상 튜닉을 입고 걸어야 할 법한 길을 청바지를 입고 걷는 것이 무색하다. 성곽 밖으로 이어진 긴 다리를 따라 내려가는데 돌담을 전시 공간 삼아 몇몇 화가들이 판매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대부분 탈린의 성문과 탑 등 소소한 풍경화들이다. 키가 크고 다소 마른 체격의 남자가 베이지 컬러의 모자에 역시 베이지 사파리를 입고 이젤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광경만으로도 근사한 한 폭의 그림이다.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구시가지 광장에는 고딕 양식의 구시청사 건물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다. 1400년 대 초반에 지어진 이 건물은 불로초를 먹은 것처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시청사는 중세의 탈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꼭대기에는 토마스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풍향계가 달려있다. 토마스는 탈린의 수호성인 이름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침략에 시달리다 보니, 시민들은 수호성인을 <게으른 토마스> 또는 <늙은 토마스>라고 부르며 조롱한다고 한다.


  구시가지는 대충 보자면 걸어서 몇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자그마하다. 한나절이면 충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벽과 낮, 밤에 만나본 탈린은 분장을 바꾼 배우처럼 느낌이 다르지만 언제 어느 때 만나도 아름다움은 변함없는 게 사실이다. 네모반듯한 시청 광장에는 파스텔 톤 건축물들이 크레파스처럼 어깨를 맞대고 있다. 곳곳에 중세시대 갑옷과 칼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들과 전통의상을 입은 종업원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회색의 성벽과 흰 벽을 가진 교회를 지나니 원기둥 모양의 돌기둥 2개가 쌍둥이처럼 올드 타운 입구에 서 있다. 비루 문이다. 비루 문 안쪽에 하늘과 구름을 떼어다가 만든 듯한 빛깔의 꼬마 기차가 다닌다. 그걸 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길을 잃어도 좋을 아름다운 골목골목들을 발바닥에 전해오는 돌의 느낌 없이 주마간산 식으로 스치기엔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목이 마르면 마음에 드는 노천카페에 들어가 와인 한 잔, 또는 도자기 컵에 담아 주는 허니 비어 한 잔 마시면 될 일이다. 이른 아침과 대조적으로 여행자들의 수가 많았다. 거리의 꽃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 나도 그중에 1인이라는 것 또한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 오랜 세월을 지내온 노파의 주름처럼 깎이고 무뎌진 돌담의 흔적들


  카타리나 골목에 이르렀다. 탈린에서 가장 중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좁은 골목이다. 중세 종교개혁 전까지 활동했던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이르는 길이란 의미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온 노파의 주름처럼 깎이고 무뎌진 돌담의 흔적들이 아름답다. 조금 가다 왼쪽으로 들어가면 건물이 무너지지 말라고 횡으로 돌을 받쳐 놓은 모양의 길이 있는데, 각종 장인들이 상점을 열었던 길드였다고 한다. 받아들임에 익숙하며 그들이 지탱해온 삶, 그 이상의 진짜는 어디에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린 광장 주변엔 중세 복장을 한 아가씨와 청년들이 간단한 연극이나 연주를 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통 방식의 아몬드 볶음과 아이스크림을 파는 수레도 심심찮게 보인다. 올데 한자(Olde Hansa)라는 레스토랑은 아직도 내부에 촛불을 켜고 전통 의상을 입은 종업원들이 서빙을 하고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탈린에 며칠 머물다 보니 호텔로 들어가는 여러 길을 알게 되었다. 그중 Holly Ghost Church(Puhavalmu kirik church) 곁을 지나는 것이 가장 맘에 들었다. 교회 벽에 그려진 빛바랜 시계 때문이다. 수 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시계 너머로 사라져갔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새로운 시계의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는 오래된 시계의 걸음걸이가 왠지 거룩하며 아름답게 느껴졌다.   


  중세시대에는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물건 모양의 간판이 대부분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잘츠부르크의 게트라이테 거리였다. 상점의 존재와 목적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한 간판도 있지만 신화와 민담 같은 흥미로운 스토리를 숨긴 간판도 많다. 탈린의 구시가지 역시 허공에 걸려있는 수많은 그림 간판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예를 들어 6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약국은 간판에 북유럽 신화에서 병을 고치는 신을 상징하는 뱀을 그려 넣었다. 탈린이 중세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까다로운 도시 건축법 덕분이다. 집을 짓는 것은 물론 수리나 개조를 할 때에도 철저히 시의 통제를 받는다고 한다. 현재 에스토니아의 목표는 기술정보 강국이 되는 것이다. IT라는 첨단 용어와 어울리지 않게 수도 탈린이 여전히 중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러니 하다. 




       

* 서글픈 중세의 코스모폴리스 탈린은 이제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듯…



  구 시가지를 벗어나 카드리오르그 공원으로 갔다. 번잡한 여행자들의 틈에서 벗어나 소소한 여유를 즐기기에 좋다. 공원은 물론 대통령궁과 현대미술관이 시민들에게 활짝 개방되어있다.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탈린 안내책자를 보니 탈린에서는 백화점에서 영부인과 쇼핑을 즐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 농담처럼 적혀있다. 부리는 빨갛고 깃털은 까만 흑조들이 연못 위를 우아하게 떠다녔다. 서글픈 중세의 코스모폴리스 탈린은 이제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듯…




ㅡ 프로메나디 해안, 차이코프스키의 의자에 앉다.



   근교 도시인 합살루에 갔다. 버스는 중간중간에 사람들을 내려놓거나 태웠다. 에스토니아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을 때 예카테리나 황제가 디자인하여 만든 합살루 역은 목조 건물로 단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왕이 기차를 타고 합살루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러시아 왕족들이 머드 목욕을 하기 위해 휴양 차 들렸다고 한다. 1905년에서 1995년까지 기차가 다녔으나 지금은 철도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플랫폼은 러시아 시절 가장 긴 것이었다는데 여러 종류의 기차가 녹슨 철로 위에 위용을 드러내고 발이 묶여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기차를 부여잡고 밀고 당기는 시늉을 하며 유쾌한 사진놀이에 한동안 시간 가는 중 모르고 빠져들었다.




   * 한 철 태양이 머물다 떠난 들판의 냄새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합살루는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곳 역시 파스텔 톤의 오밀조밀한 나무집의 문간이나, 창틀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을 배부르게 한다. 약 11억 7천8백 서른아홉 송이쯤 되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면 짐작이 될까? 눈과 코가 달큼하여 아무 생각이 없다. 얼마를 걸어왔는지 목적지가 어딘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시내를 조금 벗어나니 대주교 성이 나타났다. 에스토니아 전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곽 중 하나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거의 없다. 한 철 태양이 머물다 떠난 들판의 냄새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드디어 바다가 보인다. 프로메나디(Promenaadi). ‘프롬나드’가 산책이라는 뜻이니까 아마도 ‘산책하는 해안 도로’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합살루는 한쪽이 긴 직사각형 모양의 도시로 해변의 길이가 10km도 넘는다. 따뜻한 바다와 치료 효과가 있는 진흙 그리고 맑은 공기로 유명하다. 합살루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 바닷가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1867년에 차이코프스키가 휴양 차 왔다가 노을을 감상하며 앉아 있었다던 의자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바다는 거대한 회색빛 구름거울에 비친 양 푸른빛을 잃었다. 바람이 분다. 그래서 좋다. 걷다 보니 소박한 흉상 하나가 보인다. 에스토니아 작곡가인 루돌프 토비아스(Rudolf Tobias)다. 바닷가엔 규칙적으로 흰색 나무 벤치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의자마다 주물로 만든 이름표가 붙어 있다. 차이코프스키가 앉았다는 의자는 어떤 걸까 하나하나 주의 깊게 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이름만 이어졌다. 흐린 하늘 때문에 푸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고적하다는 게 꼭 쓸쓸한 것은 아니었다. 약간 쌀쌀한가? 생각하면 시원하고 시원한가? 하다 보면 한기가 드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좋았다.  





*차이코프스키의 의자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니 하얀 레이스 모양의 처마를 두른 연회색 건물인 쿠르살에 다다랐다. 예전엔 사교장이었다는데 장미 정원에 둘러싸여 아름다웠다. 꽃을 사랑하는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나쁜 짓은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쿠르살을 지나 해안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돌로 만들어진 투박한 벤치가 나타났다. 차이코프스키 의자였다. 등받이에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 비창의 테마 악보 몇 마디가 새겨져 있다.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니 설명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왔다.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의 내 나이에 차이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 잠시 앉아 그의 음악을 들었다.   


  얼마를 걸은 걸까? 꽃에 홀리고 바다에 취해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허기가 진다. 배낭에 서 바나나와 견과류를 꺼내 먹었지만 부족하다. 걸어온 만큼을 다시 되짚어 걷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로컬 버스가 있는지, 어디서 타는지 알 길이 없다. 거리엔 차도, 사람도 없다. 두리번거리며 정류장을 찾던 중 한 중년 부인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익스큐즈 미…?” 

  부인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듯했으나 설명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했다.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연신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러던 중 부인의 낯빛이 환해지며 남편이 왔다고 했다. 그때 우리 곁에 RV승용차가 와서 멈췄다. 두 사람은 독일어로 뭔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남편이 뒷좌석에 놓여있던 맥주 박스며 물건들을 주섬주섬 트렁크 칸으로 옮기곤 손짓했다. 기차역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거다. 사양 같은 건 애당초 모르는 사람들처럼 기다렸다는 듯 냉큼 올라탔다. 그리고 무척 긴 거리를 걸어갔다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차역까지는 자동차로 가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기분이라는 게 그토록 대단한 힘이 있는 것이다. 탈린으로 돌아갈 버스 정류장에 내려준 부부는 즐거운 여행을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악수를 나누고 바~이.


“밥 먹고 가자!”

“그래 배고파” 


그런데 음식점이 있는 시내까지는 거리가 꽤 멀다. 온 길을 다시 또 걸어가기엔 너무 피곤했다. 주변의 마켓에서 먹거리를 사서 자잘한 별꽃들이 은하수처럼 펼쳐진 잔디밭에서 소풍을 하기로 했다. 순간 건너편에 허름한 주택이 보였다. 간판은 보이지 않지만 마당에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커피라도 마실 수 있는지 내가 가보고 올게” 

이번 여행에서 나의 닉네임은 직진 선경이다. 항상 맨 앞에서 가장 빨리 걸어 다니며 묻고, 사진 찍고 하는 이유다. 약간 수줍은 듯, 그리나 순박한 미소가 정겨운 할머니가 주인이다. 커피가 있다고 한다. 피자나 스파게티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냐고 하니 냉장고에서 조각피자를 꺼내 보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일종의 간이식당이다. 화덕에서 갓 구워낸 고소한 피자가 아니라 냉장 피자를 오븐에 데워주는 시스템이긴 했지만 따뜻한 커피와 먹으니 그럭저럭 만족했다. 게다가 가격이 놀랄 정도로 저렴해서 기분 좋았다. 


   건물 안쪽엔 나무로 만든 진열장이 있었다. 손뜨개로 만든 작은 지갑 하며 수를 놓은 린넨보와, 아기 모자들이 몇 개 놓여 있다. 어찌 보면 촌스럽고, 어찌 보면 골동품 같은 물건들이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 방식의 물건들을 만드는 주인 할머니 또한 한 송이 꽃이구나 싶었다. 복도 끝의 화장실로 가는 중이었다. 좁은 복도의 양쪽 공간에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 두 개와 빨간색 의자가 놓여있다. 마치 미니 라이브러리 같다. 화장실 앞의 도서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발상인가? 존경심마저 들었다. 다시 나무 진열장 앞으로 갔다. ‘요즘 저런 것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던 의구심이 ‘요즘 저런 물건을 어디서 살 수 있겠어?’ 로 바뀐 것이다. 분홍색에 은색 테두리를 한 손뜨개 지갑과, 초록색의 작은 꽃을 수놓아 만든 빨간색 지갑을 샀다. 당장 동전들을 꺼내 담았다. 그 모습을 보신 할머니는 그건 휴대전화 지갑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스마트폰은 너무 커서 들어가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시더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신다. 할머니는 단발머리에 키가 작고 통통하셨다. 그 미소가 얼마나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은지 오랜만에 만난 외할머니처럼 친근함이 느껴졌다. 여기서 사시냐고 물으니 집은 시내에 있다고 하신다. 식당은 7년 채 렌트하여 꾸리고 있는데 근처에 마켓이 있어서 손님이 좀 있는 편이라고 한다. 잘 먹었다고, 잘 가라고, 정답게 그리고 섭섭하게 인사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20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순간 우리가 동시에 생각한 것이 있었다. ‘다시 가서 할머니랑 사진 찍고 오자’였다.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 할머니 댁을 찾아가는 어린아이들처럼 신바람 나게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다시 나타나자 어리둥절하시는 할머니와 문간 바닥에 철퍼덕 앉아 함박웃음 가득한 사진을 찍었다. 그제야 누룽지까지 다 먹은 듯 깔끔하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할머니 또한 코리아에서 온 세 여인과의 조우를 한동안 기억하시리라 생각하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 오래된 집들이 미분의 리듬으로 시간의 곡선 위에 파도를 타며... 



  탈린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이다. 그러나 여전히 환한 밤이다. 카타리나 골목을 지나고 올데 한자를 지나고 시청 광장을 지나며 방금 도착한 여행자처럼 산책을 했다. 그때 어디선가 기타 연주가 들렸다. 보통 솜씨가 아니다. 발길은 저절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오픈 카페 파라솔 너머 2층 창틀에 걸터앉은 기타리스트가 보였다. 

“음악도 있고 너무 좋다. 여기서 만찬을 하자.”

의견 일치. R은 자기가 좋아하는 화가 엘 그레코를 닮았다며, L은 브루스 윌리스를 닮았다며 싱글벙글 연신 황홀경이다. 귀에서 꽃송이가 피어난다. 뿌리가 뻗어 나와도 좋아하며 엉덩이를 길게 붙이고 앉아 식사를 했다. 순록 스테이크와 라비올리가 예전부터 주식으로 먹어오던 음식처럼 친근했다. 테킬라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 마르가리타는 상큼한 라임과 어울려 입안을 황홀하게 만들어주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소 쌀쌀한 한기로 인해 숄을 두르고, 카페에 마련된 담요를 덮으면서도 차가운 공기가 결코 싫지 않았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란 사람이 뭔가 다른 재료로 빚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오래된 집들이 미분의 리듬으로 시간의 곡선 위에 파도를 타며 출렁인다. 알 수 없는 새들의 몇 마디 울음소리가 자작나무 이파리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아침이면 둥근 아치형 대문에 흐드러진 제라늄이 보고 싶어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나가곤 했다. 높직하고 반듯한 살구빛 벽에 그럴듯하게 매달려있는 빛바랜 녹색 문이 좋았다. 낡은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나이 지긋한 집, 뜨거운 태양에 녹아버린 물감처럼 군데군데 갈색으로 번진 갤러리 창, 정교한 자물쇠가 달린 문들, 돌담에 달려있는 곡선의 등, 녹슨 철제 발코니 사이로 삐죽이 손을 내민 연보라 빛 옥잠화를 올려다보는 일들이 더 없이 행복했다. 나흘간의 다정한 탈린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ㅡ 음악, 그림, 운하의 트라이앵글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른 아침 기차를 타야 했다. 리셉션에 미리 부탁해서 식사를 일찍 할 수 있었다. 덜컹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돌길을 걸어 역으로 향했다. 내 흔적이 돌에 새겨지길 소망했다.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날이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바우처를 티켓으로 교환하기 위해 창구에 내밀었다. 그러나 쓸 수 없다고 한다. 자기네 회사가 아닌 러시아 사이트에서 예매한 것이라 티켓을 줄 수 없다는 거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묻고 또 물었지만 대답은 변함이 없다. 탈린에서 상트 가는 기차는 하루에 한 번 뿐이고 7시간을 가야 하는 상황이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벅벅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아깝지만 다시 티켓팅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름다운 탈린의 그림 한 귀퉁이가 살짝 구겨지는 아침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곡에 불과하다는 걸 그땐 몰랐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자작나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나타나고를 반복했다. 언젠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리라 소원했다. 기차가 달리는 일주일 동안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를 읽으리라 생각했었다. 나는 지금 일곱 시간이 아니라 일주일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는 거야 라는 주문을 걸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 러시아 공안들이 입국심사를 했다. 왠지 약간 긴장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디 질문도 없다. 여권에 도장만 쾅쾅 찍는다. 4량뿐인 열차지만 식당 칸이 있다. 명색이 국경을 넘는 열차이니 한 평 남짓한 매점은 면세인지라 값이 싸다. 러시아에 가느니 만큼 보드카를 마셔야 할 듯했다. 와인과 보드카를 한 병씩, 캔에 든 허니 믹스너트를 세 통이나 샀다. 기차에서 먹어보니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잠깐 졸기도 하다 보니 어느덧 기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틱 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역의 인상은 일단 어둡고 무거웠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기대하면 안 되지 싶었다. 그럴 줄 알았다. 반들반들 닳아빠진 대리석 계단으로 체중의 40% 쯤 되는 무게의 캐리어를 오로지 두 팔로 들고 내려가야 했다. 힘들었다. 호텔로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환전을 해야 한다. 어느 도시든 역 앞은 환율이 좋지 않으니 일단 소액만 바꾸었다. 역사 앞에 택시가 두 세대 보인다. 하나같이 구닥다리 자동차다. 그중 가장 클래식한 올드 카를 타기로 하고 다가가니 기사가 없다. 우리를 본 한 남자가 기사를 데려왔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남자는 키도 덩치도 제법 크다. 뽀빠이처럼 우람한 팔뚝엔 문신이 있다. 외모가 영락없이 러시아 마피아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구글 맵에서 뽑은 호텔 지도를 보여주며 얼마냐고 물었다. 러시아는 미터제가 아니기 때문에 택시를 타기 전에 반드시 값을 흥정해야 한다는 정보를 알고 갔기 때문이다. 한 사람당 500 루블씩 1,500 루블을 내라고 한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하니 52,500원이다. 너무 비싸다. 아무래도 역 앞이 더 비쌀 거라는 한국식 판단으로 일단 그곳에서 조금 벗어나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 기사가 우리에게 소리쳤다. 

“헤이 여봐~ 한 사람에 400 루블씩 해줄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택시가 많을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100m쯤 걸어가 멈추었다. 여전히 택시라는 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몇 사람에게 말을 건넸지만 영어를 못 알아들었다. 모녀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물었다. 

“네프스키 그랜드 호텔로 가려고 해요. 어디서 택시를 탈 수 있죠?” 

“아무데서나 타면 돼요”       

“1인당 500 루블씩 1500 루블 내라고 하는데 적당한 가격인가요?”

깜짝 놀라며 

“아니오, 500 루블 이상은 절대 주지 마세요.”

“앗!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바가지를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하며 기분 좋았던 것도 잠시였다. 비싸건 싸건 당최 택시가 없다. 모녀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걷고 또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시 서서 기다리다가 저쪽으로 또 가보고 해도 택시가 없다. 진짜 없다. 그러길 거의 한 시간이 넘었다. 막막했다. 언제까지 길에서 있게 될까? 급기야 교차로 앞 길바닥에 쭈그리고 않았다. 그때였다. 친구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그러나 다급하게 말했다.


“저쪽 좀 쳐다봐, 어떤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손짓하는데? 태워 줄 테니 오라고 하는 것 같아,” 

“할아버지? 무슨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가 아까 이쪽에서 신호 대기하면서 우리를 계속 쳐다보더라고, 그러다가 신호받아서 좌회전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 차 트렁크를 열고 우리한테 손짓하는 거야”

길 건너편을 바라보니 정말 어떤 할아버지가 차 트렁크를 열어 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할아버지가 서 있는 방향의 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 불이 켜졌다. 어느 누구도 “갈까?”라고 묻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가자!”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었다. 그 순간은 캐리어도 날아가듯 가벼웠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외국인이 택시를 못 잡고 헤매는 것 같으니까 도와주려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 트렁크에 들어있는 자질구레한 쇠공 구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가방을 집어넣을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그런데 짐을 실으라는 시늉을 할 뿐 할아버지는 손끝도 까딱하지 않았다. 낑낑대며 가까스로 가방을 싣고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다. 할아버지께 호텔 맵을 보여주었다.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할아버지가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드디어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한다. 그런데… 러시아말이다. 

“@#$%^ &*!%#*@%#$%” “아마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나 여기 알아, 그런 말 같아” 

앞자리에 앉은 내가 통역? 했다. R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러시아 말이 들려?” 폭소가 터졌다. 


  족히 설흔 살은 되었을 법한 젊은? 자동차는 굴러가는 게 대견할 정도였다. 

“정말 고마운 할아버지야, 용돈이라도 하시게 차비를 드리자” 

의견에 동의했고 금액은 500 루블로 정했다. 그리고 도착하면 함께 기념사진도 찍자면서 하하 호호 행복해했다. 그러던 중 차가 멈추는 게 느껴져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네프스키 그랜드 호텔>이라는 간판이 눈앞에 떡 하니 보였다. 

훌륭해 훌륭해!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우리가 모두 내렸는데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건 뭐람? 하는데 할아버지가 지갑을 꺼내더니 우리에게 돈을 보여주었다.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나름의 계략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우리는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고 어차피 돈을 드리려고 생각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500 루블을 건넸다. 할아버지는 흡족했는지 가타부타 말없이 돈을 챙기고는 차 트렁크를 열어 주었다. 어찌 되었든 고마운 일 아닌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손 사레를 치며 처음과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휑하니 떠나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뭔가 엔딩이 찝찝했지만 어쩌랴, 결과적으로 우리가 손해 본 건 아니잖은가? 그렇게 길거리에서 몇 시간 동안 긴장감으로 기운을 소진하고 나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리셉션에서 몇 가지 안내를 받고 키를 받았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다행이었다. 방은 밝고 깨끗했다. 그런데… 없다. 냉장고가 없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복도 끝에 공동 이용으로 보이는 대형 냉장고와 정수기가 있었다. 새로운 로마법에 익숙해질 차례다. 러시아에 입성하는 일은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고단했다. 각각의 침대에 기절하듯 쓰러졌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구 소련 시대의 레닌그라드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독일식 발음이고 러시아어 명칭은 ‘싼끄뜨 빼쩨르부르그’. 하지만 시민들은 빼쩨르 라는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의 도시로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지어진 이래 200년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였다. 그 후 많은 동란과 혁명으로 굴절 많은 역사의 장이 되었다. 


  러시아의 겨울은 길다. 10시에 해가 뜨고 오후 2시면 어두워진다. 그러나 하지에는 새벽 2시 반에도 밖에서 불빛 없이 신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환하다. 8개월 동안 지속되는 추위 때문에 건물은 빈틈없이 붙여 짓고 벽체의 두께는 1m나 될 정도로 두껍게 만든다고 한다. 길고 긴 러시아의 겨울이 궁금하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밍크 모자 쓰고 눈 내리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도 해 보고 싶다.  


  다음 날, 상트의 지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가지 전체에 박물관, 성당, 궁전, 미술관과 음악당이 즐비하다. 파리 뺨친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냐면 놀라지 마시라. 약 250개의 박물관과 50개의 극장(음악당 포함), 80개의 미술관이 있다. 모스크바가 정치·경제의 중심지라면 상트는 문학, 음악, 그림, 발레 같은 러시아 예술의 중심지이다. 모스크바를 <러시아의 머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심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다 이 때문이리라.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일찍 문호를 개방한 덕에 시내 분위기는 이국적이고 독특하다. 거기다가 우리의 숙소는 네프스키 대로에서 약 100m밖에 안 되는 중심가인지라 거의 모든 곳을 걸어서 다닐 정도로 위치가 탁월했다. 입성이 녹록지 않았지만 일주일이 행복할 걸 생각하니 그 또한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생각되었다.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우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그리스도 부활 성당, 일명 피의 사원(흐람 바스끄레세니야 흐리스또바)으로 향했다. 약 300~400m 걸었을까? 짜잔하고 나타난 성당의 화려하면서도 무게 있는 위엄에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러시아 건축양식 중 하나인 모자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피의 사원은 다른 러시아 정교회처럼 둥근 탑 위에 러시아 정교 십자가를 머리에 세우고 있다. 양파 모양의 지붕은 꾸볼이라고 한다. 끄트머리의 뾰족한 촛불 형상은 하늘에 봉헌하는 의미라고 한다. 색과 모양이 조금씩 다른 9개의 꾸볼 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사원과 많이 비슷하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가 그 위치에서 피를 흘리며 살해당한 알렉산드르 황제 2세를 기리기 위하여 성당을 지은 것이다. 바닥이며 벽 천장 할 것 없이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한쪽에 캐노피로 둘러쳐진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알렉산드르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곳이라고 한다.



  도시의 인상은 위풍당당하다. 피의 사원 앞 쪽으로 보이는 운하에는 유람선이 쉴 새 없이 지나간다. 시원스럽게 뻗은 네프스키 대로를 중심으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도열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1세가 러시아를 유럽 제국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고 완성한 계획도시다. 그는 러시아보다 강대국이었던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러시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러시아 사람들은 표트르 1세를 ‘대제’라 칭송하며 존경해 마지않는다고 한다.


  상트에는 모이카, 그리 바이도 바, 폰탄카의 3개 운하가 대로를 가로질러 네바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섬과 운하와 다리가 얼개가 되어 골목골목을 모세 혈관처럼 흐르고 있다. 아름다웠다. 상트에서 만 하루를 지내고 나니 지도의 표시된 물길 따라 찾아다니는 게 가능해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크고 작은 101개의 섬을 365개의 다리로 연결해 완성한 도시다. 교외까지 합치면 다리는 625개에 달한다. 내가 알기로 이탈리아의 베니스에는 약 400여 개의 다리가 있다. 그러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운하를 건설한 사람 역시 표트르 대제이다. 그는 네바 강이 시내 중심을 관통해 핀란드만으로 유입하면서 형성된 자연의 섬 델타와 운하에 의해 생긴 인공 섬들 위에 이 도시를 만들었다. 표트르 대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우선 늪지를 메워야 했다. 늪지를 메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다. 표트르 대제는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는 칙령을 내렸다. 배의 크기에 따라 30㎏이상의 돌을 10~30개씩, 사람에겐 통과세란 명목으로 자신의 머리보다 큰 돌덩이 2개씩을 내도록 했다. 도시가 세워지는 동안 노역에 동원된 4만 명의 포로와 농노가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숨져갔다. 그리고 죽은 자들 역시 돌덩이처럼 늪지로 던져졌다. 그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어 있다. 그렇게 온갖 시련 끝에 마침내 화려하고 웅장한 상트 페테르부르가 세워졌다. 무려 1/10이 늪지인 곳에 말이다.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로 옮겼다. 이후 문화·예술·혁명이 뒤엉킨 역설의 도시로 세계사에 지속적 영향을 미쳐왔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문화·예술의 총 역량이 결집된 이곳은 중세 말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200년 동안 러시아의 수도이며 문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상트는 원래 늪지대였기 때문에 건조한 여름 말고는 안개가 잦고 습도가 높다. 그래서 화창한 여름날 시인 푸슈킨은 <유럽을 향한 창>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습하고 냉혹한 겨울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고전과 퇴폐,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이라 평한 것이다.


  피의 사원과 운하를 돌아보고 근처에 있는 미하일로브스키 정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이 잠겨있다. 세계 1위의 면적을 가진 나라답게 공원 역시 어마어마하다. 잘 정돈된 잔디와 빼곡한 나무들이 좋아 보인다. 면적이 넓어서일까? 러시아의 인구 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낮다. 운하를 끼고 늘어선 건축물 곁엔 어김없이 노천카페들이 운집해 있고 건물 외벽엔 유화들이 걸려 있다. 수많은 작가와 화가 음악가들이 배출된 나라다운 면모이다. 


  이어 레뜨니 사트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정원으로 갔다. 마름모꼴 연못엔 백조가 우아하게 떠다니고 나무들이 즐비하다. 조금 가다 보면 분수, 또 가도 분수와 조각, 더 거닐어도 또 다른 모양의 조각과 분수, 잔디와 꽃들, 대체 얼마나 너른지 짐작도 되지 않는 그곳은 여름 정원이다. 걷다가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웨딩 촬영하는 신랑 신부도 구경도 하고 얼마를 또 걸어가니 출구가 나왔다. 바다 같이 너른 네바 강이 그곳에 있었다. 강 건너편 커다란 빌딩 위에 집채만 한 광고판이 떡 하니 서 있다. SAMAUNG.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나 만나지는 그 이름은 Korea보다 더 유명하다.


  저녁에 오페라를 보러 가야 하기 때문에 호텔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가는 길에 커다란 마켓을 발견했다. 상트에는 반 지하 형식의 상점들이 많았는데 그곳 역시 그랬다. 전기구이 치킨이며 연어 구이, 으깬 감자와 치즈, 당근, 오이 등으로 만든 샐러드며 초밥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게다가 24시간 오픈이다. 치킨과 샐러드, 크루아상, 과일, 우유, 요구르트, 물 등을 샀다. 그런데 물을 살 때는 꼭 확인할 게 있다. 탄산수가 많기 때문이다. 물병에 영어로 gas라고 써진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경우도 많아 흔들어 봐야 한다. 우리가 가장 애용한 것은 손가락만 한 크기의 미니 오이로 만든 게르킨 피클이었는데 정말이지 그 맛이 ‘갑’이었다.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아 상트에 머무는 동안 그 마켓을 자주 이용했다. 심지어 우리는 ‘포인트 카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드디어 마린스키 극장으로 가는 날이다. 예정된 공연은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여유 있게 호텔을 나섰다. 그런즉슨 이유가 있다. 마린스키 극장 홈피에서 예매를 하던 날, 같은 좌석인데 가격이 두 가지, 즉 special rate와 full rate로 나뉘어 있었다. 금액의 차이는 약 30%나 되었다. 조기 예매는 할인해주는 것일 거라는 지레짐작만으로 special rate를 그야말로 클리어하게 클릭하고 결재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자세히 읽어보니 special rate는 러시아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티켓이었다. 나 같은 여행자는 full rate로 선택했어야 한 것이다. 큰일 났다 싶어 급히 마린스키 극장 홈피에 이메일을 보냈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 라고 물었다. 놀랍게도 10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연주 당일 박스 오피스에서 돈을 더 내고 티켓을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일찍 가서 티켓도 찾고 주변도 돌아볼 요량이었다. 


  음악회를 위한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보리 민소매 원피스에 검은색 린넨 재킷을 걸치고 검은색 펌프스 힐을 신었다. 진주 귀걸이도 잊지 않았다. 네프스키 대로에서 버스를 탔다. 올리브 그린과 아이보리로 채색된 마린스키 극장은 외관이 그리 화려해 보이진 않았다. 625석 밖에 안 되는 유서 깊은 극장이니 만큼 수 천 명을 수용하는 현대 공연장과 차별화된 모습인 건 당연하다. 시간이 일러선지 박스오피스엔 사람이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상트는 고개를 빼고 조금만 둘러보면 돔이 보이고, 돔이 보이면 성당인지라 근처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하늘색과 흰색이 명징하게 어우러진 성당의 꾸볼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오후 6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운하 옆에 있는 노천카페 <로미오>에 앉았다. 친구들은 시원한 흑맥주를, 나는 카푸치노를 마시며 오가는 유람선 여행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시간을 보냈다. 



  마린스키 극장으로 다시 돌아가니 많은 관객들이 저마다 성장을 하고 모여들고 있다. 러시아 여인들은 키가 무척 크다. 170cm는 기본인데 거기다 하이힐과 맥시(길이가 발목을 넘어 바닥까지 끌리는 길이) 드레스를 입으니 훤칠하다. 인형 같은 그녀들을 자꾸 쳐다보게 된다.  티켓을 교환하려고 E티켓을 꺼내는데 L이 난처한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티켓이 없다니?”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예매 직후 티켓을 E메일로 전달했는데 R의 이름으로 된 티켓만 두 장 출력해 온 것이다. ‘침착하자. 정신 차리자. 방법이 있을 거야.’ 티켓 창구에서 사정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인터넷으로 세 장의 티켓을 예매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E-티켓을 호텔에 두고 왔다. 내 이름은 김선경이다. 확인해 달라” 

그리고 끝으로 마법의 단어 '플리즈…'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직원은 컴퓨터 조회를 하더니 확인되었다면서 티켓 한 장을 내주었다. 어휴, 다행이다. 

“ 우리 외국인 티켓으로 바꾸지 말고 그냥 입장해보자, 안된다고 하면 그때 차액을 내고 바꾸면 되잖아” 각자의 티켓을 출입구 검표원에게 내밀었다. ‘가볍게 통과~~, 이럴 수가…’ 그로써 우리는 세 사람의 티켓 차액을 세이브하게 되었다. 그 돈으로 근사한 저녁을 먹자고 하며 들뜬 기분으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울 거라는 짐작은 했다. ‘고상하면서도 우아하고 품격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1860년대에 들어선 마린스키 극장은 원형의 쿠폴라 천장 중앙에 3단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뮤즈를 표현하듯 날개를 펼친 천사들과 아기천사들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는 천장 화도 보였다. 각 층의 발코니에는 금색과 흰색의 주물 장식과 석고 조각상이 둘러져 있고 각 층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군데군데 매달려 있다. 티켓을 예매할 때 인터넷 화면 상 무대 맞은편 2층 중앙에 독특한 좌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좌석은 일명 ‘왕의 자리’였다. 커튼으로 옆의 좌석과 완전히 분리된 개별 석으로 계단과 로비까지 따로 갖춘 자리였다. 무대에 드리워진 금색과 은은한 청색, 그리고 청회색 벨벳 커튼은 차르의 문양을 상징하는 태슬이 달려있고 그곳의 품격을 단적으로 표현하듯 묵직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곡선을 강조한 나무 의자는 각각 하나씩 떨어진 형태로 의자 바닥과 등받이 팔걸이까지 청록의 벨벳으로 감싸져 품격을 더했다.  

 지휘자가 등장하고 무대 아래쪽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서곡이 연주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은 보마르셰 원작으로 내용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단골 주제처럼 막장 드라마 격이지만 해피엔딩이다. 



  이발사인 피가로와 그의 결혼 상대역인 수잔나 배역을 맡은 가수 음색이 참 아름다웠다. 하지만 기대치가 높아서였을까? 지휘자와 가수들의 사인이 종종 어긋났다. 연습 부족일 수도 있고, 마린스키의 2군에 연주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린스키 극장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을 제치고 러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매일 저녁 다른 레퍼토리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점인 것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인터미션이 상당히 길었다. 늦게 끝날 것 같은데 버스가 끊기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살짝 들었다. 택시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무대인사까지 보고 난 후 어두운 극장을 빠져나온 시각이 거의 밤 11시가 가까웠다. 그런데 밖에 나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환하다. 백야를 잊고 있었다. 시간을 덤으로 얻은 듯했다. 환한 밤에 다시 익숙해져서 갑자기 여유만만 버전으로 급반전, 마린스키 길 건너편에 있는 동상을 보러 갔다. 



  이름이 쓰여 있지만 알파벳이 거꾸로 또는 좌우가 바뀐 듯한 모양의 키릴 문자는 도통 읽을 수조차 없다. 그러나 생몰 연도와 얼굴 모습으로 보아 분명 차이코프스키는 아니다. 길 가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러시아의 유명한 음악가라고만 한다. 이름이 뭐냐고 하니 <림스키 코르샤코프>라고 말했다. ‘아하! <Flight of bumblebee! 왕벌의 비행>’ 하니 깜짝 놀라며 좋아한다. 자기 나라 음악가 작품을 알고 있다는데 대한 일종의 자부심이었으리라. 사진을 찍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표지판에 올 때 탔던 버스 번호가 있다. 정류장의 간이 의자엔 그야말로 조각 같은 몸매와 바비 인형처럼 예쁜 아가씨 둘이 금발을 늘어트리고 앉아있었다. 한 손엔 담배를, 한 손엔 위스키를 병으로 들고 마시는 중이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보니 무관심해야 하는데 흥미롭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감독의 큐 사인이 어울릴 법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어느새 아가씨들도 떠나고 정류장엔 우리만 남았다. 그때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에게 되돌아오더니 물었다. 

“저~ 어디 가는 버스를 기다리세요?” 

“네프스키 대로로 가려고 하는데요” 

“네프스키 대로로 가는 버스는 오늘 오지 않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거든요” 하고는 휙하니 가버렸다. 


  “큰일 났다. 어떻게 하지?” 

정류장 앞엔 아까부터 왠 시커먼 승용차가 조수석 유리창을 내린 채 가끔씩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눈치였다. 자동차 안에선 음악이 꽝꽝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그 차가 신경이 쓰이던 차에 남자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인적은 뜸하고 거리엔 자동차들이 현저히 줄었다. 게다가 어둠이 발밑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보자는 생각으로 마린스키 앞 쪽의 대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시커먼 승용차가 서서히 우리를 천천히 따라오는 것이다. ‘네프스키 네프스키’ 외치며 타라고 손짓을 한다. 운전자는 딱히 선량해 보이는 관상이 아니었다. ‘노’를 거듭하며 발길을 재촉해 보았지만 택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환하게 실내등이 켜진 리무진이 천천히 지나갔다. 차 안이 들썩들썩 요란하다. 신랑 신부와 친구들을 태운 자동차 안에선 술잔을 부딪치며 화기애애하다. 그 또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아직 완전히 어둡진 않지만 12시가 다 되어가는 상황이고 행인은 거의 없었다. 그곳은 외곽지역이니 될 수 있으면 대로로 걸어가려고 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우리 곁에 자동차 한 대가 멈추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말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네프스키’ 하니 400 루블에 태워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택시를 상징하는 캡이 없는 차라 믿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이 차가 택시 맞아요?” 

“네~ 이 차도 택시예요. 타도됩니다.” 

그 와중에 택시비를 300 루블로 디스카운트하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호텔 네임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말을, 그는 러시아 말을 각자 지껄이다 보니 네프스키 대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우리가 버스를 탔던 곳에 이르자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소는 여기가 아니라 더 가야 한다는 듯 손가락으로 명함을 가르치고, 앞을 가르치며 그야말로 계속 직진했다. 어느덧 캄캄해진 거리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화려한 야경 속엔 낮보다 더 많은 인파들이 오가고 있었다. 행인의 말대로 버스는 찾아볼 수 없었고 굉음을 내며 달리는 모터사이클과 승용차들의 폭주만 있을 뿐이었다. 스톱을 외쳤지만 기사는 네프스키 대로를 계속 달릴 요량으로 보였다.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 여기 알아. 유턴해!” 

그러자 기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어느 지점에서 거짓말처럼 유턴을 했다. 이미 호텔과는  멀리 떨어진 지점이었다. 사람도 많고 위치를 아니 내려서 걷는 게 맘이 편할 듯했다. 약속한 300 루블을 주니 대뜸 400 루블을 달라고 했다. ‘싫으면 말고’ 하며 돈을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기사는 알았다며 달라고 했다.  택시가 문제다.


  유럽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면 상트의 모든 길은 네프스키 대로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로 곧게 뻗어 있는 거리에는 최고의 호텔,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성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에도 등장하는 거리이다. 불타는 금요일이라더니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낮에 본 거리도 아름다웠지만 낮은 곳에서 위로 비추는 조명을 받은 화강암 건축물들의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맥주를 들고 다니며 마시는 젊은이들, 봉고를 두드리거나 기타를 치며 춤을 추는 거리 악사와 구경꾼들이 오래된 벗처럼 친숙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느꼈던 택시의 공포에서 벗어나 다시 평화로운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걷지 않고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웅장한 자연,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보드카는 신이 러시아에 내린 세 가지 축복이라고 한다. 보드카는 추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 러시아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다. 우리나라 소주와 같은 의미이다. 보통 사람 입맛에 딱 맞는 도수는 40도인데 냉동실에 하루 이상 넣어, 병에 차갑게 성에가 낀 술을, 훈제연어나 햄, 치즈 등을 곁들여 마시면 끝내준다고 한다. 10년 전 겨울, 친구 초청으로 시카고에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친구의 남편은 이고르라는 이름의 러시아 사람이다. 그는 내가 머무는 20일 동안 거의 매일 밤, 깔루아와 보드카를 섞어 만든 칵테일 ‘블랙 러시안’을 만들어 주곤 했다. 그 맛이 일품이었다. 싸락 싸락 내리는 눈을 보며 보드카를 마시노라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라는 시가 떠오르곤 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후략.』보드카를 마시는 밤이 그야말로 하얗게 지나갔다. 


  잠자리에 드는 시각은 대략 밤 1시 전후, 그러나 4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방이 서향이기에 새벽에 해가 내리 꽂히는 것도 아니건만 왜 그런지 모르겠다. 호텔 창밖엔 현대식 건물의 지붕이 보인다. 그러나 지붕은 경사져있다. 아마도 눈이 많이 내리는 이유일 터다. 그런데 건물은 대리석으로 지었어도 지붕은 함석? 알루미늄 같은 것으로 덮여 있다. 빛이 비치는 낮에 보면 꼭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인다. 의문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여행을 하다 보면 평소의 식사량보다 훨씬 많이 먹게 된다. 빵 한쪽과 우유 한 잔 마시던  아침식사는 상상할 수가 없다. 영양소 따져가며 산뜻한 화장실 출입을 위하여 요구르트까지 잊지 않고 챙겨 먹는다. 살찌겠다. 이삭 성당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갔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 네프스키 대로는 휑하다. 차가 없다. 간간히 승용차나 관광객을 태운 전세 버스만 오갈 뿐 조용하다. 남자의 말대로 금요일뿐 아니라 토요일에도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날씨도 청명하고 그리 멀지 않으니 걷기로 했다. 차를 타고 10을 볼 수 있다면 걸을 때는 50은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이 좋지 아니한가 하며….



  성 이삭의 날인 5월 30일에 태어난 표트르 대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이삭 성당은 프랑스 건축가 몽페랑이 40년 간(1818~1858) 설계, 건축, 감독을 하였다. 그는 러시아 최고의 성당을 만든 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러시아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약 30층짜리 건물과 맞먹는 돔의 규모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기 때문에 파리의 에펠탑처럼 어느 곳에서든 눈에 쉽게 띄는 랜드 마크이다. 만 4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이 성당은 설계된 후 40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에는 대리석과 반암, 벽옥 등의 다양한 돌과 보석이 사용되었다. 꼭대기의 원형 돔은 약 100Kg의 금으로 도금되었고 동상도 수없이 많다. 


  상트는 습지에 세운 도시이기 때문에 큰 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하게 해야만 했다. 기존의 있던 만 개의 말뚝에 6미터의 자작나무 말뚝을 만 3천 개나 더 박고 그 위에 화강암과 석회암을 깔았다. 어마어마하게 큰 문은 10톤짜리 강철인데 그걸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한다. 성당 내부는 성인과 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러시아 화가들의 회화와 조각품,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금색, 초록색, 붉은색 등 색색의 천연 대리석이 호화찬란하다. 신권이 얼마나 강했었는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일맥상통하는 반달 모양의 그림이 눈높이로 그려져 있는 게 이채로웠다. 러시아 정교의 십자가는 성당이 어느 방향으로 지어졌든지 간에 무조건 동쪽을 향하고 있다. 높은 천장과 벽체의 그림을 잠시 올려다보며 구경하는 것도 목이 아프다. 기둥에 잠시 기대어 그림들을 쳐다보자니 선인들의 지혜와 장인 정신에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꼈다. 성당이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성당을 나와 종탑에 올라갔다. 265개의 달팽이 같은 계단을 오르는데 빙글빙글 어지럽다. 꼭대기에 오르니 바다 같은 네바 강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인다. 성당 앞 광장에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청동 기마상이 있다. 이것은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대제 지배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여인은 모두 니콜라이 1세의 딸들이다. 그녀들은 지혜를 나타내는 창, 용기를 의미하는 칼,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거울, 믿음을 뜻하는 십자가를 각각 들고 있다. 기마상 뒤에는 니콜라이 1세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지었다고 하는 건물이 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거기서 사는 걸 거부했다고 한다. 이유인 즉,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기마상 말 엉덩이가 정면으로 보여서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고 하니, 복에 겨운 소리…



  마린스키 극장장이자 러시아 음악 황제, 그의 이름은 발레리 게르기에프다. 그의 내한 공연 때 몇 차례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 명성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성으로만 따지자면 훌륭한 연주자와 지휘자는 너무 많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므로 심포니는 지휘자의 몫이 8할이 넘는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해석의 지휘와 완성도 높은 연주라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에 관심이 있다면 게르기에프와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5,6번을 권하고 싶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음악과 지휘를 배운 사람들 중 유럽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한 지휘자는 독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마리스 얀손스와 발레리 게르기예프이다. 물론 얀손스와 게르기예프는 매우 다른 타입의 지휘자이다. 얀손스의 지휘는 콤팩트 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타격감이 좋은 경량급 복서 같다. 하나하나 따져가며 치밀한 음악을 만들고 그 결과를 조금씩 발전시키는 타입이다. 그러나 게르기예프는 직관에 의존하여 변화무쌍한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얀손스를 수재형 모범생이라고 한다면 게르기예프는 껄렁껄렁한 천재라고 할 수 있겠다.  


  마린스키 둘째 날은 친구들과 각각 다른 공연을 보았다. 나는 5월에 새롭게 개관한 1200석의 현대식 극장 마린스키Ⅱ에서 신작 오페라 <Left hander>를, 친구들은 구관에서 발레 <해적>을 보기로 한 것이다. 내가 볼 공연은 5시, 그들은 8시라 내가 먼저 출발했다. 걸어서 오갈 작정이다. 지도를 보니 마린스키까지 수로 옆길을 따라가면 될 듯했다. 이삭 성당의 기마 광장 쪽으로 가다가 좌회전 한 번, 우회전 한 번 하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듯 보였다. 따가운 햇살을 머리에 얹고 수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가끔씩 운하의 물을 내려다보았다.    


  음악은 물의 속성을 닮았다. 변화무쌍한 표정, 흘러가는 선율, 넘실대는 리듬,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하나로 만드는 화성,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음색, 눈앞에 실재하는 것이면서도 정작 손에 쥐면 빠져나가는 것까지 음악은 물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술은 어떤가? 술 또한 물이다. 서서히 도취되어 가는 것 하며 평화와 유희, 분노와 위기가 있고 슬픔과 회한이 아련하게 스며드는 게 술이고 음악이다. 그런 생뚱맞은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마린스키가 보인다. 불과 20여 분 걸었을 뿐인데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운 줄도 모르고…


  마린스키Ⅱ는 마린스키 뒤쪽에 건축되었다. 두 건물 사이에도 수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옥상 발코니에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호화로운 의상을 입은 러시아 미녀들과 신사들이 로비를 채우고 있었다. 외벽은 보석인 호박을 박아 놓은 듯한 노란색 대리석이 곡선을 이루며 매끄럽게 굴려있고 천장엔 수없이 많은 크리스털이 아주 긴 귀걸이처럼 치렁치렁 매달려 있다. 백색의 호접란이 키가 큰 유리 받침대 위에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드문드문 서 있다. 그 사이로 연회색 의자들이 조화를 이루며 놓여있다. 아트 숍을 둘러보고 입구와 좌석 위치를 확인한 후 2층으로 올라가는데 오픈 형 유리 계단이다. 유리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가 사뿐사뿐 지르밟아야 할 것 같아 약간 긴장되었다. 2층 한쪽엔 오페라와 발레에 사용되었던 의상과 장신구들이 유리 상자에 진열되어 있다.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 역시 투명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 층 버튼을 눌렀다. 옥상 발코니로 나가려는데 티켓을 내라고 한다. 공연 티켓을 보여주니 발코니 티켓을 따로 구매해야 한다고 한다. 포기하고 1층 로비로 다시 내려와 어떤 부인에게 기념사진을 부탁했다. 카메라를 받은 부인 왈 여긴 아트홀이니 아티스트 같은 포즈를 취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쪽 팔을 올리고는 발레리나 자세를 취한다. 아름답다. 하지만 쑥스러운 김선경, 웃음으로 손 사례를 치며 두 손을 모아 얌전한 자세를 취했다.          

  오픈된 지하층은 거의 전체가 의상 보관소이다. 유럽 공연장에는 외투를 입고 객석에 들어갈 수 없다. 한겨울에도 모피 속에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공연장을 찾는 그네들의 문화엔 필수 공간이다. 더구나 러시아는 겨울이 길다. 거의 모든 관람객들이 콘서트 시즌인 겨울에 털 코트와 털 부츠를 맡기자면 엄청 넓은 물품보관소는 필수인 것이다. 카메라와 모자를 맡기겠다고 하니 보관원이 새로 개관한 홀인데 카메라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친절하게 물었다. 나는 상관없다고 말하고 보관증을 받았다.


  신작 오페라 <Left hander>는 초연이기 때문에 정보가 전무하다. 프로그램을 읽어보니 러시아의 19세기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쓴 러시아의 전통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올해 나이 80세인 작곡가 로드리 온 셰드린 역시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화성이나 멜로디가 극히 현대적이다. 다양한 색채감을 가진 조성과 민요적인 요소가 참 아름다웠다. 물론 거기엔 완벽한 연주자 게르기에프와 출연자들의 수준 높은 연기나 노래가 가세하였지만 전날 들었던 피가로와는 비교할 정도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대적인 무대는 장면에 따라 움직이며 특별한 요소들을 많이 보였는데 배를 타는 장면에선 파도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의상이나 조명, 연출 또한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게 발휘되었다. 2회의 인터미션 끝에 오페라는 3시간이 훌쩍 넘어서 끝이 났다. 청중들과 더불어 나 또한 기립했고 무대 인사를 마친 출연자들은 커튼콜을 거듭해야만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얼굴과도 같은 겨울궁전은 우리나라의 경복궁 같은 곳이다. 바로 이 겨울궁전을 개조한 것이 에르미타주 국립박물관이다. 에르미타주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담녹색 외관에 흰 기둥, 황금색 포인트 장식이 잘 어울리는 로코코 양식의 건물이다. 에르미타주는 우선 외관에서 풍기는 느낌이 우아하면서 대단히 지적이고 품위 있다. 1,056개의 방과 117개의 계단, 2,000여 개가 넘는 창문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장방형의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8시 30분, 놀랍게도 우리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광장에 주저앉아 에르미타주 화집을 보았다. 9시 30분이 되니 정문 개방, 정원으로 들어가 10시가 되니 본관 문이 열리고 줄 선 사람들이 서둘러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티켓을 사고 카메라 피 내고, 백 팩은 보관소에 맡기고 검색대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 오디오 가이드를 렌트하니 거의 11시에 가까웠다. 놀랍게도 한국어로 쓰인 관람 지도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었다. 



  전시실을 모두 돌아보는 건 불가능하다. 효과적으로 보려면 플랜을 짜야한다. 1층의 이집트와 그리스 문화 예술은 패스, 2층은 관람 지도에서 추천하는 하이라이트 작품만 찾아서 보고, 3층의 19~20세기 프랑스와 서유럽 작품을 본격적으로 보기로 했다. 방 번호가 써진 관람 지도가 있지만 수 백 개의 방을 겹치지 않고 찾아다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작정 다니다 보면 갔던 방을 또 가는 건 일도 아니다. 어떤 그림 찾으려다 보면 지나간 방들 또 지나가기 마련이다. 루브르나 대영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역시 그랬다. 방이 많다 보니 나중엔 출구나 계단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이번엔 작품을 감상한 방의 번호를 관람 지도에 체크하면서 다니니 헤매지 않고 좋았다.       

  

  웅장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거대한 샹들리에로 장식된 으리으리한 대접견실이 나온다. 경이로운 미술품과 골동품으로 가득한 회랑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에르미타주를 완공한 에카테리나 2세(1762~1796년 재위)가 1764년 서구로부터 226점의 회화를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현재 300만 점이 넘는 회화 · 조각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작품을 한 점당 1분씩만 본다고 해도 총 관람시간이 5년 이상 걸린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여걸 예카테리나 2세 여제는 독일 귀족 출신이다. 16세가 되던 1745년, 표트르 대제의 손자 표트르 3세와 결혼했다. 당시 표트르 3세는 왕위 계승권자였고, 예카테리나의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재위 중이었다. 결혼 첫날밤부터 그들은 이미 예사롭지 않았다. 원치 않은 결혼이라며 같은 침실 쓰기를 거부한 표트르에 상심한 예카테리나는 다른 남자들과의 과감한 애정 행각을 시작했다. 그녀의 첫 상대는 체리니 쇼프 공작. 그와의 애정행각이 발각되어 국외로 추방되자 그의 두 형제들에게 큐피드의 화살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종국에는  체르니쇼프 형제들 모두가 감옥에 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예카테리나는 그들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는 등의 아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니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르니쇼프 형제 또한 국외로 추방당하자 러시아 주재 스웨덴 대사 폴렌 베르그를 침실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또 다른 애인인 살티코프와의 사이에서는 아들까지 출산했다. 시어머니 엘리자베타는 그녀를 압박했지만 그녀의 애정행각은 끊이지 않았었다. 이윽고 며느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시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남편 표트르 3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녀는 때는 이때다 하며 수많은 애인들과 공모하여 침실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죽이는 데 성공, 마침내 러시아 최고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애정행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영토를 최대로 확대하는데 기여한 황제로서 표트르 대제와 함께 <The Great>라는 칭호를 받는 여제가 되었다.


  르누아르 방을 지나면 세잔느의 방, 그리고 고갱과 고흐의 방을 만나게 된다. 피카소의 <수녀와 창녀>, 고갱의 <기적의 샘물>, 고흐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오두막집>과 <아를의 여인들>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수두룩하다. 사람의 감각이라는 게 참 그렇다. 눈이든, 입이든, 귀든 어느 한 가지가 즐거우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눈이 즐거우니 아무 생각도 없다. 간결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가 맘에 드는 화가의 방에 이르렀다. 


‘나는 사물을 그리지 않는다. 오직 사물 간의 차이점을 그린다’라는 말을 한 프랑스의 앙리 마티스다. <댄스>와 <음악>이란 그림이 서로 마주 보고 걸려있다. 책에서 여러 번 보아왔지만 그림의 크기가 아주 큰 것에 일단 놀랐다. 


   <댄스>에는 다섯 명의 여자가 등장하고, <음악>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보라색에 가까운 파란 하늘에 대지를 나타내는 녹색의 구도도 비슷하다. 다섯 명의 사람들도 모두 붉은색이다. 원근법을 무시한 상태에서 <춤>은 다섯 명의 여자들이, <음악은> 은 다섯 명의 남자가 나체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세 사람은 앉은 상태에서 평화롭게 노래한다. 이미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라 우연히 마음이 맞은 즉흥 연주를 하는 느낌이다. <춤>은 마티스가 삶의 기쁨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새로운 무게를 부여한 작품이다. 무희들은 손을 맞잡고 역동적인 원을 그린다. 더 빨리 춤출수록 발뒤꿈치가 높이 들린다. 오른쪽으로 기운 타원형은 시계방향의 움직임을 말해주며 춤의 불규칙한 에너지를 강조한다. 전면 왼쪽에 있는 두 댄서의 손은 완전히 맞닿지 않았다. 그 틈은 내가 닫아주어야 한다. 춤의 역동적인 리듬 때문에 인체가 뒤틀릴 지경이지만 그 때문에 표현력이 더해진다. <음악>도 요소를 채택한다. 초록색 언덕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다섯 개의 인체가 등장한다. <음악>에 나오는 남성 인체들은 <춤>의 타원형 모티프와 같은 동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은 고립되어 있고 음표처럼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그 외에도 <화가의 가족들>, <붉은 방>, <푸른 식탁보>, <대화>등이 한 방에 걸려 있다. 행복한 향기가 나는 그 방에 한 동안 앉아 있었다. 에르미타주는 렘브란트와 마티스의 작품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컬렉션을 갖추고 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며 르누아르의 <잔느 사마리의 초상화> 같은 작품은 시각과 지식, 눈의 촉각으로 느끼는 세계, 그림자의 중요성 등을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에르미타주는 회화 전시실로 쓰기에는 창문이 너무 많다. 게다가 그 많은 유리창에는 흰색의 얇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무늬만 커튼인 하얀 천을 그대로 통과한 햇빛은 그림에 화살이 꽂힌 듯 반사되었다. 빛을 피해보려고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바꿔보았지만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작품을 손상시키지 않을까도 염려되었다. 자연 채광에서 그림을 볼 수 있는 건 대단히 값진 경험이나 빛의 반사로 인해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소용없는 일 아닌가 싶다.  

 그림에 골똘하다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되었다. 요기를 하려고 박물관 내의 카페로 내려갔다. 진열장에 샌드위치나 케이크가 있다. 치즈 샌드위치와 쇼콜라 케이크를 고르고 커피를  주문하려고 줄을 서는데 한국말이 들렸다. 

“아줌마, 우리가 먼저 왔어요, 뒤로 가세요.” 

돌아보니 스무 살이나 됐을까? 아주 앳돼 보이는 학생 둘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서있었다. 순간 뭔가로 한 대 세게 맞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빵을 고르는 동안 그 아이들이 온 걸 모르고 선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러나 사람이 아주 길게 늘어선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꼭 그래야만 하는가? 만일 한국인이 아니고 외국인이었더라도 그렇게 똑같이 말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같은 나라에 여행 온 한국인으로 그 정도의 양보의 미덕도 베풀지 못하고 각박한, 아니 이기적인 그 아이들의 한 마디에 기분이 우울했다. 

 에르미타주 앞의 궁전 광장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광장의 중앙에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세워진 알렉산더 원기둥(Alexander Column)이 높게 서 있다. 기둥 꼭대기에는 한 장의 화강암으로 만든 십자가를 안은 천사상이 있다. 1905년 빵을 달라는 노동자들에게 니콜라이 황제가 발포명령을 하여 눈 덮인 광장이 피로 물들었던 그곳에 엄청난 음량의 앰프를 통해 전자 기타를 퉁기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이 있었다. 100년이 지나면 그 광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상상할 수 없다. 시간이란?


  에르미타주 박물관 근처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강변 양쪽에 로스트랄 등대가 있다. 등대 원주에는 해전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뱃머리를 떼어다 붙인 조각들이 달려있어 특이하다. 배를 타고 네바 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약 40분 후 여름궁전에 도착했다.  40km쯤 떨어진 핀란드만 연안에 표트르 대제가 조성한 궁전이다.

“이게 강 맞아?, 바다 같은데”

친구가 강인지 바다인지 모를 물가로 내려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간을 보더니 소리친다.

“강 맞아”

그렇게 강인지 호수인지 바다인지 알기 위해 물맛을 보는 일은 헬싱키에서도 계속되었다.

 여름 정원이 <러시아의 베르사유> 거나 <분수 정원>으로 불리는 이유는 100개가 넘는 분수와 그리스 로마 신화 황금 조각상들이 위용을 떨치고 있어서이다. 맑은 태양 아래 물감을 풀어놓은 듯 관광객의 옷들은 울긋불긋하고 비누 방울 같은 미소가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잘 가꾸어진 가로수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예쁜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소 분수대와 조각상, 바로크식 소 궁전들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또한 자작나무, 홍송, 가문비나무가 눈길을 끈다. 분수공원의 핵심은 삼손이 사자의 입을 찢고 있는 황금 조각상이다. 사자의 입을 찢는 삼손은 표트르 황제를 의미한다. 사자는 스웨덴을 상징하는데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지금이야 별 것 아니겠지만 18세기 초에 자연 수압으로 130m 높이로 물을 뿜어내게 했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을까 생각했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거리마다 각종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밟힐 정도로 많다는 걸 알게 된다. 호텔에 비치된 지도에도 민속춤과 발레 광고 천지다. 맘만 있으면 얼마든지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일정 중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마린스키에서 보지 못한 백조를 현매 해서 보자는 의견에 일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찾아 나섰다. 짙은 노란색 건물 벽에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모습의 포스터가 걸려 있는 극장을 발견했다. 마침 공연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밖에 나와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곳은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이었다. 바렌보임의 공연은 9월 일정이었다. 


  아쉽게 발을 돌리는데 동상이 있다. 사실 여기저기 워낙 동상이 많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른쪽 팔을 쭉 펴고 고개는 반대쪽을 바라보는 그의 팔에 비둘기들이 쪼르르 앉아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보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던 푸슈킨이었다. 그의 말처럼 푸슈킨은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았을까? 그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와 결투 끝에 짧은 생애를 마감한 러시아의 국민시인이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16세의 미녀 나탈리야를 처음 만났다.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빠져 들었다. 얼굴은 절세미인이나 나탈리야는 허영심이 많고 속물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푸슈킨은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매력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위선적이고 천박한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겨우 약혼을 승낙받은 푸슈킨은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가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연년생의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나탈리야는 남편의 문학은 관심도 없고 이해도 못했으며 사치만 일삼았다. 가정은 내 팽개치고 부부간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아내 때문에 재산은 동나고 귀중품은 모두 전당포에 잡혀야 했다. 그러므로 푸슈킨의 왕성한 문필활동과는 달리 가정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드디어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한 궁정 행사에 참석한 나탈리야는 급기야 황제의 눈에 들게 된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황제는 그녀를 자주 볼 수 있도록 푸슈킨을 시종보에 임명한다. 그러나 나탈리야는 황제의 사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염문을 뿌린다. 잘생긴 용모로 페테르부르크의 살롱 계를 휘젓던 프랑스의 단테스가 나탈리야에 까지 접근하 것이다. 아내의 불륜을 암시하는 익명의 투서가 푸슈킨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푸슈킨의 진보적인 사상을 미워한 세력가들의 음모라는 말도 있고, 나탈리야와 황제 간의 불륜을 덮어두기 위한 계책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에 참지 못한 푸슈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청하게 된다. 그러나 푸슈킨은 단테스의 총에 맞아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는 죽기 직전 아내의 무고함을 믿는다며 오히려 나탈리야를 위로하곤 자신의 장례를 투르게네프에게 부탁하며 숨을 거두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평범한 어휘로 써진 그의 시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는 나탈리야에게 쓴 사랑의 고백 이리라.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말도 없이 희망도 없이 때론 수줍음에 때론 질투심에 가슴 에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그토록 진실하게 그토록 다정하게…’ 후략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찾기까지 숱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아야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한 아가씨는 어디 어디로 어떻게 가면 노랑과 연두색 빌딩 사이에 있는 회색 건물이라고 했다.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칼과 검정 슈트가 어울리는 신사에게 지도를 들이대고 물어보니 그 방향이 아니다, 길 건너서 해군성 지나면 흰 건물이 있다. 그래서 가보면 거기도 아니었다. 그렇게 네프스키 대로의 이쪽저쪽을 헤매다가 음악사를 발견했다. 마침 러시아 민요나 전통음악 CD를 구입하려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음반을 구입하고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고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드디어 찾았다. 연노랑과 흰색이 주조를 이룬 건물이다. 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서있고 건물 위쪽엔 아폴론 전차를 끄는 말들이 곧 달려갈 기세로 우뚝 서 있는 우아한 건축물이다. 티켓 오피스에서 가격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티켓은 최고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어렵게 찾아간 극장이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프스키 대로를 걷다 보면 눈에 확 띄는 건축물이 있다. 마치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같다. 100개가 넘는 코린트식 기둥에 둘러싸인 카잔 성당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입구가 네프스키 대로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에 생각을 해 낸 것이 대리석 기둥으로 성당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반원형의 회랑이 생겨난 것이다. 내부는 화강암 한 장으로 조각한 기둥, 다색의 대리석을 붙인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었다.   


  입구 왼쪽에는 프랑스를 물리친 러시아의 위대한 쿠투조프(Kutuzov) 장군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다. 전시용 케이스에는 나폴레옹 휘하 군사들의 유품도 전시되어 있다. 카잔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는 의미이다. 성당에서 나오니 주변에 한 외국인 관광객 무리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친구 R이 그들 사이에 끼어서 한참 동안 진지하게 듣고 있다. 그리고 설명이 끝났는지 그네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물었다.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했어?”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말한다. 

“저게 어느 나라 말이야?” $%%&^*~ "



  상트에 일주일간 묵었던 호텔 방은 서향이다. 오후가 되면 사금파리 같은 햇살이 방안 깊숙이 들어와 종교적인 신념처럼 이글거린다. 하지만 햇살에게 투정하지 않았다. 하늘 때문이다. 분명 한 밤중이라 할 만한 시각인데 초저녁 같은 얼굴이다. 보랏빛이 감도는 푸르스름한 구름이 태양의 옷을 입고 짙푸른 잎사귀 사이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한다. 그 속에 빠진 내 눈은 압생트라도 한 잔 걸친 듯 황홀해져서 행복이라는 사소함에 대해 거듭거듭 감사했다. 저무는 햇살은 마지막까지 여운처럼 머물다 녹듯이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쪽물을 풀어놓은 듯 깊고 푸른 어둠이 내리는 것이다. 


  오늘은 라비올리를 먹을까? 페투치네를 먹어볼까? 하는 즐거운 고민으로 멋진 레스토랑을 기웃거리던 시간, 타락한 귀족처럼 건들대며 걷던 네프스키 밤거리, 거침없이 보드카 잔을 거침없이 연거푸 비워내던 밤, 운하를 배경으로 모델 흉내를 내면서 사진 찍던 시간,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돌며 사람들에게 손 흔들던 시간들이 모두 지나갔다. 모든 건 지나간다. 그것이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의 것이든, 회환과 슬픔과 고통의 것이든 말이다. 


  러시아의 기차역 이름은 특이하다. 출발지가 아닌 종착역 기준이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려면 레닌그라드(상트의 옛 이름) 역에서 타야 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에 가려면 모스크바 역에서 타야 하는 식이다. 그러니 핀란드 헬싱키로 가야 하는 우리는 핀란디아 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상트에 도착할 때부터 택시 때문에 고생을 한 터라 리셉션에 부탁해 콜택시를 예약했다. 호텔에서 준비해 준 밀 박스를 챙겨서 신 새벽, 매너 있는 기사가 운전하는 콜택시를 타고 역에 갔다. 기차 이름은 <알레그로>. 음악 용어로 ‘빠르게’라는 뜻의 고속열차이다. 기차 이름처럼 상트의 일주일이 알레그로 지나갔다. 마지막 여행지 헬싱키의 무늬와 컬러는 어떤 것일까? 하며 음악과 그림과 문학과 운하가 아름다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ㅡ 숲과 호수로 디자인한 라이브러리, 헬싱키



  헬싱키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핀란드의 이미지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햇살조차 차가운 도시, 공기에 색이 있다면 청색과 회색 그 중간쯤 될 것 같은 도시. 모던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이방인을 기꺼이 품어주지 않을 것 같은 무정한 도시. 그러나 헬싱키는 추측과 상상 속에서 존재했던 모습과 달랐다. 핑크빛 화강암과 민트색 둥근 지붕으로 단장한 헬싱키 중앙역의 우아한 자태를 보았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다른 모습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풍만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헬싱키의 매력을 곳곳에서 느끼게 되었다.  


  핀란드에는 18만 8천 개의 호수와 17만 9천 개의 섬이 있다. 몰랐다. 인구 100명당 호수 1개씩 갖고 있는 꼴이니 정말 놀랄 만하다. 숲과 호수의 나라, 산타클로스와 자일리톨, 핀란드 사우나, 그리고 한때 휴대폰의 대명사였던 노키아의 본고장, 디자인이 발달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과거 600여 년 간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다가 그 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통치 아래 다시 100여 년을 지낸 후 1917년 독립을 선포하였는데 강대국 사이에 끼여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온 게 어쩌면 우리나라와 처지가 비슷하였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로서 행복과 여유를 갖고 사는 그네들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헬싱키 중앙역에 도착하니 아침 10시가 채 안 되었다. 첫날, 반타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와 트램을 갈아타던 날은 비가 내려서일까? 그날의 기억과는 느낌이 아주 다르다. 티끌 하나 없을 듯한 햇빛과 색종이 조각을 뿌린 듯 심어진 꽃, 그리고 온화한 컬러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 모든 게 새로웠다. 트램과 버스의 집합소이며 여행의 중심지인 중앙역은 시간이나 경비를 경제적이고 전략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점이다. 그러므로 헬싱키에서의 호텔의 입지는 중앙역 부근이 최고다. 걸어서 5분 만에 어렵지 않게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주변엔 대형 마켓을 갖고 있는 백화점 소코스, 시외버스 터미널과 지하철이 연결되는 깜피, 마리메꼬, 이딸랴 등 세계적인 디자인 숍들이 가득한 포룸 등의 대형 상가와 레스토랑들이 인접해 있다.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위치다. 체크인은 했지만 입실할 수 없는 시간이라, 캐리어를 맡기고 다시 중앙역으로 나왔다. 인포에서 지도를 챙기는 게 먼저다. 항구 옆에 있는 마켓 광장을 둘러보고 수오멘린나 섬으로 가기로 했다. 



  헬싱키 중심가에서 불과 10분쯤 걸었을까? 거짓말처럼 항구가 나온다. 탈린과 스톡홀름 행 페리가 정박하는 국제 항구, 이스트 하버이다. 항구의 정적을 깨는 건 카우 파토리(Kauppatori)라 불리는 마켓 광장이다. 제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자두, 버섯, 당근, 딸기, 사과 등이 시장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마사코의 여행 가방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색 살구 버섯도 있다. 과일과 채소를 판매하는 노점상 옆으로는 털실로 만든 아기용 옷과 모자를 판매하는 사람, 아기자기한 수제 액세서리를 선보이는 사람들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핀란드의 별식을 맛보고 커피와 미트 파이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여행자들도 많았다. 연어와 캐비아 그리고 가재 속살을 얹은 샌드위치가 쉴 새 없이 팔려나갔다. 일종의 포장마차에서는 빛깔 고운 먹거리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다. 연어 구이와 껍질콩과 당근 등을 볶아 만든 야채, 소시지와 감자구이, 그리고 작은 생선을 튀긴 핀란드 전통 요리 무이꾸로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다. 


  수오멘린나는 페리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섬이다. 갑판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해안선 근처의 집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과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손 닿을 듯 낮게 내려와 있었다. 수오멘린나는 다섯 개의 섬을 다리로 연결한 대규모의 해군기지이자 요새이다. 과거에는 전쟁의 중요한 무대였지만, 현재는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헬싱키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수오멘린나 요새는 핀란드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시절 스웨덴 사람인 Augustin Ehrensvärd 에 의해 지어졌다는데 그 사람의 무덤도 있었다. 요새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1차 대전 당시의 잠수함도 전시되어 있다. 요새 내부는 수많은 통로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 나라 땅에서 다른 나라들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보는 핀란드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싶었다. 씁쓸한 역사가 배어 있는 섬이 그토록 평화로운 풍경으로 살아남은 것이 참으로 애틋했다. 요새가 아니라 잘 정돈된 유원지처럼 나무와 잔디, 꽃들이 평화롭게 자라고 있다. 물안개 피는 새벽의 그곳은 어떨까 궁금했다. 잠시 카페에 들려 커피와 빵을 주문하니 핀란드의 그 유명한 파제르 초콜릿을 함께 주었다.   



  호텔로 돌아와 방을 배정받고 올라갔다. 6층 끝 방이라 각을 끼고 있어 좀 넓은 게 장점이었다. 더구나 벽면 하나가 몽땅 유리로 되어 있는 널따란 통 창이 아주 맘에 들었다. 가방을 열어 옷가지를 꺼내려고 하는데 바닥에 뭉텅이로 굴러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일주일을 살아야 되는 방이니만큼 리셉션에 전화를 걸었다. 방이 너무 더러우니 와서 확인해 보라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다른 방 키를 가진 직원이 바로 올라왔다. 8층으로 옮겼다. 그곳 역시 썩 깨끗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컴플레인이 계속될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핀란드인들에게 ‘벗고’ ‘젖는’ 일은 삶의 한 부분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우나에서 씻기고, 죽으면 사우나에서 염을 한다. 핀란드인의 삶 속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우나를 빼놓곤 말할 수 없다. 그들에게 사우나는 휴식이요, 레저이면서 생활이다. 호텔방에도 개인 사우나가 설치된 곳이 많다.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 쇠로 만든 스토브에 달궈진 돌에다 이따금씩 물을 뿌리는 방식이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도 사우나가 있다. 호텔방 욕실에도 전기가 들어오는 스테인리스 봉이 가로로 여러 줄 설치되어 있어 들어가면 따뜻했다. 우리는 사우나와는 별개로 빨래 건조용으로 사용했다.  

 

  트리플 룸의 단점은 한 사람이 엑스트라 베드를 이용해야 하는 거다. 이번엔 내 차례다. 그러나 너무 만족스럽다. 내가 사용할 침대가 유리창 옆에 있기 때문이다. 헬싱키에 머무는 내내 나는 하늘을 통 째 안고 잠들었으며 하늘이 웃는 소리에 잠 깨곤 했다. 능소화 닮은 주황색이나 오래 묵은 크림색 같은 구름이 이벤트처럼 짜잔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음악의 테마처럼 끊임없이 변주되는 구름의 색과 모양이 황홀했다. 그 낯설고 새로운 공간이 주는 시간들이 왜 그리 쉽게 내 것이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레이스 한 필을 풀어놓은 것 같이 줄지어 날아가는 새떼들 때문에 가슴 한편이 서늘하기도 했다. 붉은 해가 짠! 하고 떠오르는 날은 없었다. 그저 은근한 얼굴로 말없이 찾아오곤 했다. 연청의 하늘이 열리는 새벽, 널찍한 통유리 쪽으로 몸을 돌릴 때마다 출렁이는 구름을 바라보는 일은 갓 구운 빵 냄새처럼 기분이 고소해지곤 했다. 


  헬싱키의 날씨는 하루에도 여러 번 변한다. 아침엔 바람이 차고 구름이 가득한 날이 많다. 그러다가 해가 쨍하고 비치면 따끈따끈하다. 간혹 비가 부슬부슬 내려도 대부분 잠깐이기 때문에 우산을 쓰는 대신 겉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 배낭에 여분의 옷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헬싱키의 교통카드는 버스, 트램, 지하철 등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1일권이든 3일권이든 처음 개시할 때만 리더기에 찍으면 만료가 되는 시점까지 언제든 어디든 무한정 타고 다닐 수 있다. 대부분 기사가 문을 열어 주지만 탈 때 문 옆에 있는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린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동행한 사람은 무료로 승차할 수 있다. 도로에서 한 발만 올려놓으면 될 정도로 낮기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인도 노 프라블럼이다. 상트에서 거의 걸어 다니다가 트램을 타니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풍경을 감상하기 좋게 느릿느릿 다니는데다가 대부분 앉을 좌석까지 있으니 딱 좋다. 출발지부터 종착지까지 무작정 타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다가 맘에 들면 내리고, 내려서 걷다가 또 타면 되는 참으로 편리한 이동수단이다. 물론 헬싱키라는 도시가 아주 작아서 상트처럼 걸어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교통 카드도 샀으니 최대한 트램을 이용하여 다리 좀 쉬게 하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트램 3T(헬싱키 주요 관광지를 가장 많이 다니는 노선)를 탔다. 내부 전광판에 스웨덴어와 핀란드어로 정차할 역을 알려준다. 언덕길을 조금 오르니 돌을 쌓아놓은 듯한 건물이 보인다.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Temppeliaukionkirkko>다. 우산을 쓴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10여분 쯤 지나자 문이 열렸다. 입구엔 여러 나라 문자로 당부의 글이 쓰여있다. 한글도 있다 <실내에서 조용히 해주세요>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어떤 남자가 연주를 한다. 루빈스타인의 F멜로디. 사진을 찍는 사람, 분주히 오가며 구경하는 사람, 이야기 나누는 사람, 가지각색이다. 웅성웅성 시끄럽다. 음향이 좋은 곳은 말소리도 울리게 한다.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수준급 연주였다. 한 곡이 끝나자 이윽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역시나 조용히 해 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와글와글. 이어서 만국 공통어가 흘러나왔다. ‘쉬~~~, 쉬~~~’ 그러자 갑자기 실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쇼팽과 리스트가 이어졌다. 그냥 그대로 앉아있고 싶었다. 예상치 않게 듣게 된 피아노 음악으로 하여금 맘 한 구석이 짠해졌다. 왜 좋은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글썽거려지는지…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는 암석을 쪼아내어 만든 공간이다. 좌석도 원형으로 배치했다. 암석을 파내어 만들면서 생긴 바위 일부가 자연 그대로 내부 벽이 되었다. 불규칙한 돌의 거친 표면이 아름다움을 배가 시키고 있다. 바위틈으로 물이 흐르고 이끼가 자란다. 이끼는 그 자리에 영원히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영원한 삶에 대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들려주는 듯하다. 그곳은 성당인 동시에 자연이고 생명이다. 구리로 만든 돔 모양의 천장은 콘크리트 들보로 바위와 연결되어 있다. 구리 천장과 바위 외벽 사이의 공간은 투명한 유리로 이어서 햇빛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음향 전문가와 지휘자가 건축 설계에 참여하여 음악회가 자주 열릴 정도로 뛰어난 음향을 갖게 된 것이다. 마치 땅속에서 솟은 듯 보이는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는 아주 오래된 핀란드의 숲을 연상시켰다.


  중앙역 인포에서 가져온 트램의 노선 지도는 아주 편리했다. 3T 트램을 타고 OOPPERA 정류장에 하차했다. 오페라 하우스는 첨단장비를 자랑하며 소극장 2개도 운영하는데 여름 시즌에는 공연이 없다고 한다. 아트 숍에서 간단한 기념품을 사가지고 밖으로 나가니 공원과 호수가 보인다. 산책로(Hesperianpuisto)는 호수를 끼고 쭉 이어져 핀란디아 홀까지 연결되었다. 호수에 비가 내리는 정경이 고요하고 차분했다. 호수를 낀 산책로엔 비를 흠뻑 맞으며 조깅하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내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이라는 그 사소함이 왠지 서글펐다.  


  알바 알토가 설계한 핀란디아 홀은 콘서트홀 겸 회의장이다. 도로변 담장에 흰 글씨로 커다랗게 FINLANDIA라고 쓰여있다. 그곳은 밖에 걸린 조명의 모양 조차 화음이나 멜로디를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멀리서 봐도 순백의 건물이 매력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외벽의 텍스쳐가 재미있다. 단순함과 고요함이 평화로움을 선사하는 디자인이다. 

 호텔에 들어가니 이게 무슨 일인가? 침대 시트만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을 뿐 사용한 타월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아수라장이다. 욕실도 마찬가지 상태였다. 다시 또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당자가 왔다. 

“왜 우리 방 청소를 하지 않았죠?” 

“모르겠어요. 아무튼 미안합니다. 지금 바닥을 닦아도 될까요?” 

하며 난처한 표정이다. 들어보니 이유인 즉 그 방 청소는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니 자기가 대신 청소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잠시 로비로 내려갔다 돌아가니 방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하루는 콘센트에 드라이어를 꽂는데 퍽 하고 스파크가 일며 전기가 다운되었다. 깜짝 놀라 또 전화를 했다. 직원이 올라오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방구석에 있는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소소한 여러 일을 겪게 해서일까? 아침마다  침대 머리에 놓아두는 팁을 처음엔 챙기더니 며칠 동안 그대로 놓여 있었다. 체크아웃하던 날, 모아두었던 팁을 모두 놓고 나왔다. 메이드의 소소한 실수는 있었지만 무사히 여행을 마친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R은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우체국엘 간다. 그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사진엽서를 사고 아름다운 우표를 붙여 지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손 편지를 쓰지 않은 지 오래된 세상이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무료로 카톡을 하고 화상 통화도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손 편지를 쓴다. 그리고 엽서를 받고 즐거워할 지인 생각에 더 행복해한다. 그게 그녀가 여행을 하면서 꼭 해야 하는 필수 요소이다. 탈린에서도 상트에서도 부지런히 우체국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마치 즐거운 숙제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우체통이 다 빨간 것은 아니다. 헬싱키의 우체국은 중앙역 근처였는데 핀란드어로 POSTI다. 우체통은 노란색과 파란색이다. 이국에서 날아든 엽서를 받을 그 사람이 부러웠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건 그 어떤 비싼 선물보다 마음이라는 데 동의하며 우체국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사진을 찍어주었다. 멋진 사진은 좋은 카메라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생각과 좋은 눈이 만들어 내는 것, 아름다운 컷이 되리라 생각했다. 


  중앙역 맞은편에 아테네움 미술관이 있다. 자유여행의 장점 중 한 가지는 미술관과 공연장에 마음껏 다닐 수 있다는 데 있다.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민족의식 고양 운동의 결정체인 아테네움 미술관은 1887년에 완성되었다. 그전에도 예술협회에서 다수의 미술품을 수집했으나 아테네움 미술관이 완성될 때까지는 시내 곳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 1세와 시민들에게 다수의 작품을 기증받아 최대의 미술관이자 미술계의 중추적인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테네움 미술관의 이름은 그리스 여신 아테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유럽의 미술관은 백 팩이나 외투는 맡겨야 한다. 사람이 직접 맡아주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라커를 이용한다. 문을 열고 문 안쪽에 1유로를 넣어야 잠긴다. 나중에 물건을 꺼내면  1유로가 다시 반납된다. 헬싱키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입장료를 내면 동그란 스티커를 주는데 옷이나 신체에 붙이면 된다. 미술관 입구엔 관람객들이 나오면서 스티커를 붙여 놓은 장소들이 있다. 이를테면 근처 쓰레기통이나 전봇대 같은, 그런데 그 조차 무슨 설치예술처럼 근사해 보인다. 


  그림은 이야기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보이고 들린다. 구도며 색채의 조화며 화풍을 따져가며 미술 사조를 읊조리는 것은 전문가가 할 몫이다. 서정적인 마을의 풍경화를 보며,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뒤편으로 희미하게 그려진 진열장의 접시들을 보며,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며 스토리를 떠올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테네움은 18세기 로코코 미술부터 1960년 대 실험적인 미술까지 핀란드 예술가들의 주요 작품을 다양하게 소장하고 있다. 핀란드 예술가들의 작품 외에 19세기부터 20세기의 해외 작가들의 일부 소장하고 있었다. 고흐, 고갱, 뭉크, 모딜리아니 등의 작품이 소소하게 전시되어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가 소장한 작품에 비하면 그 양이나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림의 배치나 조명, 동선들이 훌륭했다. 관람객의 수도 적절하여 선적인 감상을 할 수 있어 피곤하지 않았다. 아트 숍과 카페 또한 모던한 소규모 갤러리 같아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또한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공간이었다.


  헬싱키의 최고 관광 명소는 헬싱키 대성당이다. 꼭대기에 옥색 돔이 올려진 하얀색 성당은 한마디로 기품 있는 귀부인의 모습 바로 그거다. 서유럽의 거대하고 높은 성당처럼 압도하는 힘 대신 온화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성당과 색 맞춤이라도 하듯 순백의 갈매기들이 허공을 가르는 모습이 이국적이다. 헬싱키 성당에는 오전에, 저녁 무렵에, 이른 아침 한 번, 그렇게 세 번 갔다. 그때마다 성당 계단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눈 내린 겨울을 상상해보았다. 성당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계단에 앉아 멀리 발트 해를 바라보는 일이 선택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중앙 돔은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며, 옥색으로 만들어진 지붕 위에는 예수의 12 제자 동상이 있다. 이 성당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 한층 아름답다. 수오멘린나로 가는 페리에서 그 모습에 반해 사진을 찍었는데 가까이서 보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이다. 헬싱키 대성당은 핀란드답다.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게 내부도 깔끔하고 단순하다. 모자이크 화도 천장 화도 없다. 성화가 그려진 배경으로 제단이 있고 파이프 오르간과 촛불을 밝히는 둥근 촛대뿐이다. 화려한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는 없지만 왠지 더 경건한 마음이 드는 공간이었다.  


  계단 아래는 수 만개의 화강암이 깔려 있는 원로원 광장(Senaatintori)이다. 광장 중앙에는 헬싱키를 핀란드의 새 수도로 정한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이 있다. 원로원 광장은 헬싱키의 배꼽인 셈이다. 광장 오른편에 헬싱키 대학이,왼편에는 의회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헬싱키에서 러시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헬싱키를 설계할 당시 모델로 삼은 도시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였기 때문이다. 그 덕에 러시아와 앙숙이던 미국이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한 영화 <닥터 지바고〉를 헬싱키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헬싱키 시내를 걷다 보면 현란한 글씨와 밝은 컬러의 그림이 그려진 버스를 볼 수 있다. <Hop-on, Hop-off> 헬싱키의 시티 사이팅 버스(City Sighting Bus), 즉 투어버스다. 이것은 세계 주요 관광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복층 버스로 2층은 오픈된 형태이다. 단 시간에 주요 관광지만 돌아보고 떠나야 하는 사람, 시간은 있는데 일일이 걸어 다니며 보기 싫은 사람, 어린아이를 대동한 부모, 또는 걷고 싶어도 무릎 아파서 못 걷는 노인들이 애용하는 버스이다. 인포에서 가져온 시티 사이팅 버스 코스를 보니 대략 봐야 할 코스를 알 것 같다. 헬싱키에서는 이 버스가 조금은 무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트램 덕이다. 

 투르쿠로 가는 고속열차를 예매하러 중앙역으로 갔다. 자동 발권기가 있었다. 

“이거 한 번 해 보자” 

국제선인지 국내선인지 클릭, 행선지, 날짜, 시간, 인원, 2층 칸, 좌석 지정까지 하나하나 여러 단계를 거쳐 드디어 발권 전 단계까지 갔다. 

“어머,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됐다 됐어”, 

하며 신기해하던 흥분도 잠시, 기계는 신용카드만 가능했다. 모니터에만 집중하다 보니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공동 경비인 캐시를 사용해야 한다. 할 수 없이 오피스에 들어가 티켓을 사기 위해 번호표를 뽑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니 역이 아닌 것 같다. 오픈된 데스크마다 노란색 스탠드가 은은하게 켜져 있어 온화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고급 호텔 같다. 전광판에 수시로 바뀌는 번호를 보면 은행 같기도 하다. 흰색으로 조각된 아치형 벽면에 붙어 있는 시계를 보면 박물관 같기도 하다.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돌아가는 헬싱키 중앙역에 앉아있는 시간이 색다르고 편안했다.


   ‘DISIGN MUSEO’ 영어가 아니지만 단어들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10번 트램을 타고 내렸을 때 뾰족한 첨탑이 몇 개 달려 있는 붉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건물 외벽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디자인 박물관이 틀림없었다. 그곳 역시 입구에 스티커로 도배가 된 기둥이 보였다. 그곳은 가전제품부터 주방용품, 가구, 의상 등 핀란드 디자인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것이 아쉬울 정도로 멋진 물건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근간의 것이 아니고 수 십 년 전에 만들어진, 그러니까 일종의 골동품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플하고 모던하며 컬러도 뛰어났다. 역시 북유럽 디자인의 대표 도시답다. 박물관을 나오며 사람들이 도배를 해 논 기둥에 나도 스티커를 붙였다.


  24번 버스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부탁했다. 

“시벨리우스 파크 가려고 하는데요. 내려야 하는 곳에서 알려주세요.” 그는 끄떡했다. 트램은 정류장 이름이 전광판에 표시되지만 버스는 안내 방송도 전광판도 없다. 그래서 기사에게 부탁한 것인데 몇 정거장 지나더니 여기사와 교대를 하곤 내려버렸다. 기사님만 믿고 앉아있었는데 어느덧 종점인 듯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여기가 시벨리우스 공원인가요?” 

검은색 니트 이너웨어에 골드 체인 목걸이를 걸고 흰색 니트 카디건을 걸친 은발의 할머니는 기품이 줄줄 흘러넘쳤다. 할머니는 요것, 조것 자세히 설명하셨다. 친절하게 아주 친절하게 그러면서 잘 모르는 것은 옆에 계신 친구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 말씀하신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시벨리우스 파크에 가려다가 잘못 간 곳은 세우라사리 야외 민속박물관으로 일종의 민속촌이었다. ‘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다’고, 사실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할머니의 설명인즉슨 세우라사리는 섬의 숲에 핀란드 각지의 농가와 가옥 등을 그대로 옮겨와 보존한 곳이다. 숲을 거닐며 산림욕도 할 수 있다. 뭐 그런 뜻인 듯했다. 그냥 지나는 여행자에게 단순히 길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거의 강연 수준이다. 하지만 지적인 외모만큼 아는 것도 많은 분 같다.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하며 나도 저렇게 곱게 늙으면 좋겠다고 했다. 섬까지는 하얀 나무다리로 연결되어있다. 군데군데 지붕 달린 나무문이 서있는데 나무로 조각된 처마가 레이스 단처럼 아름답다. 갈매기며, 오리, 크고 작은 새들이 내려앉아 에스코트하듯 나와 함께 걷는다. 사진을 찍어도 도망도 안 간다. 



  티켓을 사니 안내 지도를 준다. 가옥의 위치가 번호로 표시되어 있는데 약 40여 채나 되었다. 중요 표시가 있는 주택만 돌아보기로 했다. 울창한 녹음 사이로 북유럽 특유의 청량한 공기가 좋다. 갈대숲 사이엔 나무 데크로 만든 길이 있다. 섬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핀란드 각지에서 운반된 18~19세기의 가옥과 교회 등의 건축물의 전시되어 있다. 각각의 집 현관 앞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언니들이 한 명씩 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수를 놓고 있다. 핀란드의 옛날 가옥은 우리네 옛집처럼 방도 작고 천장도 낮으며 대체로 규모가 작았다. 당시 핀란드 인들의 생활상을 짐작케 해주는 장식품, 민예품, 벽난로 등 각종 도구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마구간, 대장간들도 보였다. 

  세우라사리에서 나와 지도를 봤다. 어떤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아낸 후 버스에 탔다. 몇 정류장 가지 않아 버스에서 내려 전방을 보니 도로변에 관광버스가 몇 대 서 있었다. 시벨리우스를 기리는 호수 공원이다.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 때 만들어졌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600개의 파이프가 서 있다. 길이와 굵기는 물론 파이프에 새겨진 무늬까지 각기 다른 은색의 강철 파이프이다. 무려 24톤이나 된다고 한다. 파이프 구조물은 파이프 오르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악보의 높고 낮은 많은 음표를 상징한다고 한다.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는 민중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작곡되었는데  핀란드 사람들이 국가처럼 사랑하는 음악이다. 시벨리우스의 초상 오브제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놓여 있다. 파이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반장이라도 되는 듯한 오리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 수십 마리의 오리들이 질서 정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하나 둘, 하나 둘, 박자를 맞추듯 리드미컬하게 말이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마냥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높은 곳에 있어 우뚝 솟아 있어 눈에 띄는 건물. 붉은 벽돌의 외벽과 청동 지붕이 얹힌  북유럽 최대의 러시아 정교 교회 우스펜스키 사원이다. 겉모습과 달리 내부가 무척 화려하다. 옥색의 중앙 돔 안쪽으로 별이 그려져 있다. 12 사도의 이콘이 금색 장식에 의해 둘러쳐져 있다. 처음 우스펜스키 사원을 찾아갔던 날과 달리 그날은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카펠라로 성가를 노래하는데 뛰어난 울림과 절묘한 화음이 교회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화려한 제사복을 입은 사제들이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은 가운데 서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미사를 경청하는 여행자들을 지나 초를 사고 불을 밝혔다. 성당을 나오는데 문 옆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자 눈이 번쩍 뜨였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어린이 아카펠라 합창단인 <타피올라 콰이어>의 공연 포스터이다. 그런데 연주는 내가 헬싱키를 떠난 다음 날이다. 일정과 어긋나는 공연들이 모두 아쉬웠다. 타피올라가 노래한 <도나 도나 도나>를 흥얼거리며 성당에서 내려왔다.





 ㅡ 숲과 호수, 누크시오



 어디서나 구름을 수면 위로 찍어내는 그림 같은 호수들을 만날 수 있는 핀란드, 이런 경관은 시내 곳곳에서도 많다. 그러나 숲과 호수를 오롯 즐기기 위해 헬싱키 인근의 누크시오 국립공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공원 안에는 완만한 구릉에 거미줄처럼 여러 개의 트레킹 코스가 연결돼 있다. 가장 짧은 것이 3.5km 정도였는데 코스마다 이름이 있고 올레길처럼 표식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넓은 국립공원엔 인적이 거의 없어 약간 겁이 나기도 했다. 바위와 습지, 호수 등 빙식 지형과 그 주변에 형성된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인데 소나무와 낙엽송, 자작나무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고, 낙엽송 밑 낙엽더미로 이뤄진 거대한 개미집, 갖가지 야생화들과 나무 밑동에 깔린 이끼류도 아름다웠다. 길섶에 야생 블루베리를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상트 에서처럼 헬싱키에서도 매일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면 소코스 백화점 지하에 있는 마켓에 들려 간식거리와 물을 챙기곤 했다. 첫날 유리 진열대를 둘러보며 주문할 먹거리를 고르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숫자가 프린트된 종이쪽지를 보여주시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신다. 샐러드 코너는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서 주문하는 방식이었다.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려주는 친절함을 여러 번 경험하다 보니 수준 높은 국민의식은 과연 다르구나 했다. 크루아상과 바나나가 특히 맛있었는데 상트와는 달리 비닐 백 값을 따로 받는다. 매일 들르다 보니 물가 비싼 헬싱키에선 그것도 아까웠다. 그래서 전날 구입했던 비닐 백을 챙겨서 가져가곤 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알뜰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 여행자들이다. 헬싱키는 유독 일본 사람들이 많은데 그네들은 아예 천으로 만든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큰 마켓에 와인이 없다. 물어보니 술은 판매하지 않는단다. 밖으로 나와 거리에서 물어보니 근처에 ALKO라는 곳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저마다 문화는 다른 법이지만 주류 전문 판매장이 따로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인도 역시 그랬지만 그 나라에서는 이해가 되던 것이 헬싱키라는 도시에서는 왜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코냑을, 친구는 와인과 맥주를 골랐다. 사긴 했지만 오프너가 없어서 문제였다.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남자는 병을 보더니 마개를 그냥 빙그르르 돌려 따버리곤 씽긋 웃는다. 코르크 마개 없는 싸구려 와인이다. 민망함을 미소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카모메 식당>이라는 일본 영화는 헬싱키가 배경이다. 영화 덕에 일본 관광객이 줄을 잇는 특수를 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제목인 카모메 식당은 물론 주인공이 장을 보던 시장이며 카페, 그리고 수영장, 서점 등은 이미 명소가 되었다. 나 또한 그 영화를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터라 카모네 식당에 찾아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헬싱키에는 카모메라는 이름을 지닌 식당은 없다. 카모메는 영화 속 이름일 뿐이고 진짜 상호는 카하빌라 수오미(Kahvila Suomi)이다. 트램을 타고 사거리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여기 그 레스토랑이 있는 거 맞아? 할 정도로 도무지 음식점이 있을 법하지 않은 동네였다. 그때 목발을 짚은 아가씨가 지나갔다. 



  “카하빌라 수오미 아세요?” 

모른다고 하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목발을 길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검색을 해서 알려주려는 듯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친절한 마음 씀씀이가 감동적이었다.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사진을 보여주니 대뜸 알아보았다. 그리고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하면서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웬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했다. 

“더 무비?” 

“예스” 

“오버 데어”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마도 그 부근에서 얼쩡대는 관광객 대부분이 그 식당을 찾아간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그때 파란색 글씨의 카하빌라 수오미가 보였다. 영화에서 보았던 그 외관이다. 식당은 아주 작았고 발코니에는 두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밖에서 먹으려고 하니 주문과 계산은 안쪽에서 하라고 했다. 런치를 주문하면, 샐러드 바와 빵, 음료를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순록 스테이크, 연어 스테이크, 그리고 가지와 파프리카를 이용한 음식을 주문했다. 빵과 우유, 샐러드를 가져다 먹는데 음식이 나왔다. 빨갛고 노란 색깔이 미각을 자극했는데 음식의 양이 상당히 푸짐하다. 그러나 기대치가 커서인지 맛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내친김에 그날은 영화 <카모메 식당>의 촬영지를 따라가기로 했다. 우르슬라는 해안가를 향해 가오리 모양의 아이보리 색 천막이 쳐 있는 카페이다. 영화에서 네 명의 여인들이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한껏 치장을 한 채 비치 베드에 앉아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를 부리던 곳이다. 헬싱키에서도 전망 좋은 카페로 유명하다고 한다. 트램에서 내려 바닷가로 향하는데 바다처럼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카이보푸이스토(kaivopuisto)공원이다. 군데군데 벤치가 한가롭게 놓여있다. 전망 좋은 곳에 멋진 외관의 주택들이 드문드문 서있는데 알고 보니 대사관이었다.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번지 점프하는 사람, 요트 타는 사람, 모두 행복해 보인다. 저들의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영화처럼 노천 테이블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자리가 없다. 바닷가 돌담에 앉아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ㅡ 고성이 아름다운 투르쿠(Turku) 



   날씨가 흐리다. 기차 위층에 앉으니 풍경 보는 일이 더 쉽다. 승객은 많지 않다. 내가 앉은 좌석의 통로 건너편에 딸과 부부가 앉아 있다. 아빠는 책을 보고, 모녀는 과일을 먹는다.  

“여긴 하늘이 참 낮아 보여” 

“저기 바다 보인다”

“아냐 하늘이야, 음~ 듣고 보니 바다 같기도 하네…”

뭐에 홀린 듯하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얇은 얼음이 끼어있는 듯 어디까지 하늘이고 어디부터 바다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지평선 위의 하늘에 히끄므레한 아니 푸르스름하기도 한 구름이 펼쳐졌다. 태양의 행로를 따라 두꺼운 구름의 푸른 기운이 잉크를 엎지른 것처럼 번져나갔다. 모든 풍경은 비장하고 장엄했으며 한편으로는 몽환적이었다. 낯설다. 믿을 수 없는 풍경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으로 오래 간직해 둘 것이었다. 결국 알아내지 못한 그 기이한 풍경은 계속되었다. 바다 같아 보이는 하늘, 구름이 만들어 놓은 하늘이 바다 같은 환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투르쿠에 도착하니 거의 모든 상가와 레스토랑이 문을 닫아 거리가 한적하다. 일요일인 까닭이다. 오픈하지 않은 마켓 광장 역시 텅 비었다. 아우라(Aura) 강이 시내 중심가를 흐르고 있다.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투르쿠는 1812년까지 핀란드의 수도였다. 아우라(Aura) 강의 상류 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핀란드의 마라톤 선수 파보 누르미 동상과 칼을 찬 사람의 동상이 있었다. 몇 걸음 옮기니 강 건너편에 투르쿠 대성당(Turku Cathedral)이 보였다. 고딕 양식의 석조건물이다. 화려 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투박하고 검소한 모습이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지나치던 수녀님께서 오래전부터 알아온 지인에게 하듯이 미소로 목례를 하신다. 마음이 환해진다. 미소는 가장 쉽고 간단하면서 모든 소통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메시지다. 


  성당 안의 쉼표, 고요, 그리고 기도, 그 순간 착한 사람이 된다. 촛불을 밝히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소원하는 걸 위해서가 아니다. 그 순간 그래야 할 것 같은 강한 메시지가 내게 전달되었다. 가늘고 긴 초를 사서 불을 켰다. 마음이 편하다.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작은 파이프 오르간과 단아하고 소박한 성상들을 바라보며 의자에 잠시 앉았다. 성당은 언제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성당 근처 강변 레스토랑으로 갔다. 아이보리색 파라솔과 꽃들이 고상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메뉴가 적당치 않다. 골목 안에 있는 다른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쪽엔 꽤 많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투르쿠 주민들 같아 보였다.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음식, 친절한 서빙 등으로 식사가 즐거웠다. 광장에서 1번 버스를 타면 투르쿠 성에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걷기로 했다. 대로변에 도서관이 있다.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 유리와 건물 외관이 디자인 하우스처럼 멋스럽다. 공부를 한다는 의미보다는 바캉스를 즐기는 분위기이다. 좋아 보인다. 갈수록 강폭이 넓어지면서 한쪽엔 휴양 리조트들이, 강엔 유람선, 선상 카페 들이 보기 좋게 흩어져 있다.  벤치엔 노인들이 한가하게 앉아 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친 할머니께 우리말로 ‘안녕하세요?’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니 할머니 역시 인사를 받아 끄떡하신다. 웃는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강을 따라 계속 직진하다 보니 군함이 보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거대한 데이지 꽃이 떡 하니 누워있다. 



   거의 다 왔겠다 싶은데 비가 후드득 내린다. 그때 고성이 보였다. 베이지 컬러의 성곽은 군데군데 갈색 돌이 박혀있어 닥종이 같은 따스함을 전해 주었다. 잠시 성문에서 비를 피하고 안으로 들어가 티켓을 샀다. 성이 아니라 오래된 수도원 같은 분위기이다. 미로 찾기 게임을 하듯 방은 단 하나의 통로와 계단으로만 연결되어 있다. 최초 건립 연대는 1280년, 성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화려 함이라거나 큰 규모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소박한 멋을 풍긴다. 맨 위층의 무도회장에는 화려한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 전시되어 있는 물품들은 과거 수세기 동안의 의상, 생활풍습, 건물 내부 장식 양식들로 투르쿠와 핀란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1960년부터 매년 8월에 열리는 투르쿠 뮤직 페스티벌은 국제적인 음악축제이다. 약 10일 동안 세계 각국에서 참여하는 다양한 음악 공연이 투르쿠 시내 곳곳의 공연장에서 열린다. 

투르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핀란드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세계적인 관현악단의 공연이 열린다. 그런데 다음 날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이끄는 연주가 예정되어 있었다. 연주를 보고 싶지만 그러자면 투르쿠에서 숙박을 해야 하고 다른 일정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막히게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ㅡ 헬싱키의 속살



  다음 날 헬싱키를 떠나는 비행기는 오후 5시 30분. 하루하고 한나절이 남았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각자 보내는데 동의했다. 가고 싶은 데를 찾아가거나, 호텔에 남아 쉬거나, 온종일 트램을 타거나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누가 하늘을 파랗다고 했을까. 그런 파랑을 본 적이 없다. 아침 9시 30분, 스톡만 앞 벤치에서 바라본 하늘이 그랬다. 지도를 보고 행선지의 위치를 확인하며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스톡만(STOCKANN)은 1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핀란드 최대의 백화점이다. 핀란드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스토어들이 입점해있어서 여행자라면 반드시 방문하게 된다. 주요 대중교통이 지나는 곳일 뿐 아니라, 대부분 관광지의 출발점이 되는 등 여행자에겐 랜드마크가 되어주는 곳이다. 가고 싶은 장소를 하나하나 메모하고 트램의 노선을 확인했다. 아카데미아 서점, 키아즈마 미술관, 카펠리, 아라비아 팩토리, 벼룩시장까지 갔다가 시간이 된다면 우르슬라에 한 번 더 가자는 계획이다. 우선 거기서 가장 가까운 아카데미아 서점에 가야지 하며 고개를 드는데 바로 눈앞에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Akateeminen Kirgakauppa라는 간판이 보였다. 신기했다.  



  스페인에 가우디가 있다면 핀란드엔 알바 알토(Alvar Aalto)가 있다. 그는 핀란드의 호수와 청명한 공기, 숲과 나무를 공간과 가구 속에 구현하며 핀란드 디자인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자작나무를 부드럽게 구부려 만든 휜 의자, 호수의 부드러운 곡선과 투명한 햇살을 그대로 빼닮은 꽃병들은 핀란드를 갖는 일이나 진배없다. 북유럽 최대 규모의 아카 데미안 서점은 지상 3층짜리 건물인데 위로 향할수록 점점 넓어지는 독특한 구조이다. 천장으로 나 있는 천창은 책을 펼쳐놓은 모양인데 그곳으로 핀란드의 맑은 햇살이 맘껏 쏟아져 내린다. 호텔로 가는 길에 매일 지나치는 독특한 외관의 키아즈마 미술관과 핀란디아 홀, 디자인 미술관과 아테네움 미술관의 카페, 등 그의 디자인은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서점을 둘러보니 인테리어 사진집과 아트 북 등 탐나는 책이 많았다. 그러나 컬러를 담은 무거운 지질의 책은 여행자에게 감당 못할 무게라 선뜻 살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서점 내 2층에 핀란드에서 유일하게 알토(Aalto)의 이름을 딴 카페가 있다. 알바 알토의 초심을 느낄 수 있는 초기 디자인의 조명, 의자, 테이블로 꾸며져 있다. 카페엔 한 사람의 손님만 있었다. ㄱ자 벽면에 걸려 있는 인도 사람들의 사진을 둘러보고 알토 의자에 앉아 시나몬 롤과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12.7유로니까 약 19,000원 헬싱키답게 무척 비싸다. 하지만 맛은 있었다. 


  서점에서 나와 에스플라나디 거리를 걸었다. 중앙역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로 나란히 뻗어 있는 에스플라나디 거리는 헬싱키에서 봐야 할 가장 기본적인 볼거리를 대부분 품고 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값 비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헬싱키의 비싼 물가가 부담스러운 여행자들은 샌드위치 한 조각을 사 들고 에스플라나디 공원의 우거진 나무들과 꽃길 사이의 벤치를 찾으면 된다. 핀란드의 동화 아저씨로 잘 알려진 토펠리우스 와 그 외 다른 사람의 동상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동상 꼭대기엔 마치 조형물처럼 갈매기들이 올라서 있다. 그곳이 제 집인 양 갈 때마다 갈매기를 볼 수 있었다. 근처에 줄지어있는 마리메꼬(Marimekko), 이딸라(Ittala), 아리카(Aarikka)와 같은 핀란드의 대표적인 브랜드 숍들도 눈을 즐겁게 한다. 초콜릿과 동의어인 의미인 파제르(Fazer)는 핀란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초콜릿이다. 에스플라나디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는 초콜릿뿐 아니라, 음료와 베이커리 등도 판매한다. 10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내린 오래된 카페와 유서 깊은 레스토랑 카펠리는 양치기가 우유를 팔던 데서 출발해 1865년부터 식당으로 운영되어 온 곳이다. 건물 외관이 유리로 되어 있어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곳 역시 가격이 너무 비싸서 나와야만 했다. 대신 가격이 저렴하고 맛있는 레스토랑 레오나르도와 다빈치를 번갈아가며 이용했다. 하루는 레오나르도, 하루는 다빈치, 마치 이탈리아에 간 것처럼…. 


  잠시 벤치에 앉아 있는데 낯익은 사람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6일 전 상트에서 헬싱키로 올 때 기차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러시아인 부부였다. 샛노란 티셔츠에 긴 구슬 목걸이, 그리고 짧게 컷트한 은발의 퉁퉁한 아주머니와 아주 키가 크고 우람한 체구의 아저씨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하며 나를 기억하냐고 하니 대뜸 ‘아! 알레그로’ 기차 이름을 말씀하셨다. 두 분은 헬싱키가 참 마음에 든다고, 그런데 내일 상트로 떠난다고 하신다. 나 또한 내일 헬싱키를 떠나는데 언젠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시며 다시 오면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사진을 함께 찍고 스마트 폰으로 전송하겠다고 하니 스마트폰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 E메일로 보내겠다고 하니 컴퓨터가 없다고 하셨다. 친구들은 어디 있냐? 곧 비가 내릴 것 같으니 서둘러라, 등등 당부를 잊지 않으시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또한 정겹고 따스한 기억들이다. 

 6번 트램을 타고 아라비아 팩토리로 가는 도중이었다. 광장에 시장이 열린 걸 발견했다. 하까니에미(Hakaniemen Kauppahalli) 벼룩시장이다. 수공예품, 접시와 컵 등 디자인 제품, 옷, 구두, 가방, 동전, 책, 어린이 용품 등 다양한 제품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부분 현지인이고 여행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 군데서 가격을 물어보니 천차만별, 천지차이였다. 물론 똑같은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물건의 수준에 비추어 볼 때 말이다. 


  괜찮은 가죽점퍼가 눈에 띄어 주인 할머니께 물었다. 

“입어 봐도 돼요?” 

“그럼 되고 말고” 사이즈는 잘 맞았다. 그러나 어울리는지 어떤지 궁금해서 물었다. 

“거울은 어디 있나요?” 

“거울은 없는데…” 

그때 지나가던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할머니 역시 웃으며 좋아 보인다 라고 하신다. 

“얼마죠?” 

“10!” 

“네? 얼마라고요?” 

이번엔 손가락을 펴 보이며 10유로라고 했다. 그럴 리가 없어하면서 나는 거듭 

“리, 얼, 리?” 했다. 이제 더 이상 묻기도 미안했다. 

“살게요” 100유로를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닐까? 의문하며 10유로를 내밀었다. 

“고맙수” 

진짜네!!! 10년 전, 독일에서 5유로 주고 샀던 가죽 배낭을 아직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건 싸도 너무 싸다. 벼룩시장에서 로또 당첨된 기분이다. 

“화장실이 어디 있어요?”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있는데 1유로를 넣어야 해, 동전 있어?” 하신다. 

마침 1유로짜리는 없고 2유로가 있어서 할머니께 바꿔달라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1유로 를 내게 주시며 한사코 그냥 가지라고 하신다. 양가죽 점퍼를 15,000원에 샀는데 보너스로 화장실 코인 까지 주시다니….        



  다시 트램을 타고 2,30분 정도 갔을까? 거의 종점에 아라비아 팩토리가 있다. 그릇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북유럽 그릇 마니아라면 정말이지 숨이 탁 막힐 것 같은 곳이 아닐까 싶다. 아라비아 팩토리에 가득 찬 그릇들, 테이블 매트, 식기, 쿠션, 커튼, 화려한 패브릭까지 화사하고 아름다운 제품들이 가득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아라비아 팩토리엔 알토 대학교 도서관이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꽤 자주 도서관에 간다. 72퍼센트 이상의 국민이 1년에 한 번 이상 도서관을 방문한다고 한다. 유럽 내에서 국민 1인당 도서관 이용률이 1위다. 도서관 강국답게 시스템과 시설, 각종 문화 프로그램과 강좌 커리큘럼이 잘 갖춰져 있다. 알토가 디자인한 아르텍 체어들이 도서관 곳곳에 무심하게 놓여 있다. 예술과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 매우 권위 높은 알토 대학교 학생들의 작품도 비정기적으로 전시된다고 한다. 일반인 출입도 가능하지만 선뜻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유리창을 통해 책을 읽는 사람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다 내려왔다. 


   핀란드 디자인의 특징은 단순, 절제, 자연, 실용 등으로 설명된다. 복잡한 장식은 그곳 디자인의 관심사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자꾸 덧칠해서 화려하게 꾸미는 덧셈의 디자인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는 뺄셈의 디자인이다. 칼은 짧을수록 위험하고 풍경은 단순할수록 매혹적이라고 했던가? 꾸밈음을 자꾸 집어넣어 화려하게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담백하게 부르는 아카펠라와 같은 거다. 변화구가 아닌 직구다. 덧셈이 아닌 뺄셈의 원리이며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수묵 담채화에 비유할 수 있다. 심플하면서도 미니멀함은 그 어떤 디자인보다 세련됐다. 특정한 모습을 입체감 있게 예술적으로 형상하여 표현하는 아름다움인 조형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자연미도 빼어나다. 목재를 이용한 가구는 나무의 결과 색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핵심적인 기능을 강조한 제품들은 내구성 또한 뛰어난 것이 나의 취향과 들어맞았다.


  헬싱키의 헤이리 마을이라 할 수 있는 카펠리로 갔다. 헤이리 마을이 탁 트인 전원에 만들어진 예술인 마을인데 비해 공장 건물 안에 모여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통신기기 제조 회사인 노키아가 사용하던 공장 건물을 재활용한 일종의 아트 밸리로 갤러리, 개인 작업실, 스튜디오, 미술 교육기관, 공연장 등이 들어서 있다. 시 정부는 예술가들의 창작열을 북돋우고 안정적인 작업 활동을 돕기 위해 저렴한 가격에 공간을 임대하고 있다. 갤러리와 무도장이 있고, 전시회와 이벤트가 수시로 열린다. 건물 1층에는 히마 & 살리(Hima & Sali)라고 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었다. 공장 내부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인테리어와 널찍한 테이블이 눈길을 끌었다. 건물 밖에 있는 빨간 의자가 예뻐서 길가는 아가씨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가까이, 멀리 여러 컷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워한다. 따스한 사람들이다.



  핀란드는 종착지라는 느낌이 든다. 여행의 종착지이자 인생의 종착지. 단조로움은 이 나라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감각이라는 건 학습하거나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헬싱키라는 도시가 그걸 알게 했다. 심미안과 여유를 갖춘 사람들, 적정한 인구와 조화로운 시스템, 게다가 맑고 깨끗한 자연에 평화로움까지 흠이라고는 찾기 힘든 아름다운 나라이다. 헬싱키를 거니는 느낌은 완벽한 작품에 무임승차하는 기분이다. 하늘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지만 그 하늘조차 예사롭지 않다. 아침이면 청소차가 거리마다 말끔히 물청소를 하니 먼지가 없다. 매연을 뿜어대는 자동차보다 트램이 많으니 공기가 쾌적하다. 아침마다 화단의 풀과 시든 잎을 정리하고 물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ㅣ 에필로그



여행지에서 떠나는 날의 오후는 등기로 부쳐온 이별 서류처럼 낯설고 무겁다.


  때로는 보고 있어도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붉은색과 먹색과 푸름이 함께 뒤범벅된  백야가 그랬다. 밤을 도둑맞았다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낮을 선사받았다 생각하면 하루가 선물이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벌써 몇 시간째 노을이 번지고 있다. 붉은 기운을 담은 하늘이 푸른빛으로, 이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구름 뒤 어디쯤에 해가 있는 것 같았다. 갈매기들은 보랏빛 창공을 가르며 날아다녔다. 오후 11시쯤 설핏 기우는 듯했던 해는 지평선 저쪽을 따라 수평으로 이동했다. 해가 막 떠오를 무렵의 창백한 보랏빛은 밤이 되는 시간 역시 계속되었다. 커튼을 열고 내다본 텅 빈 도시의 모습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누구나 맛보는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과는 전혀 다른 낯선 풍경이다. 하늘을 담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호수, 그리고 거대한 바다처럼 펼쳐진 자작나무와 전나무, 가문비나무의 숲이 또 그랬다. 그곳의 밤들은 기나 긴 청춘이었다. 


  두근거림이 없다면 여행은 무의미하다. 설렘으로 걷는다. 여기가 어딘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문득 하나라도 더 보려는 나를 발견했다. 돌아보니 일상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여행을 하는 시간조차도 여유라는 것이 며칠 빌려 입은 옷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기분 좋은 우울함이 엄습했다. 일상과 일탈은 한 글자 차이다. 틈과 틀은 자음 하나 차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른가? 타이트한 일상에서 느슨한 일탈로, 타이트한 틀에서 헐렁한 틈으로, 그게 여행이다.


  조금은 천천히, 조금은 느리게 그러므로 조금 게을러져도 좋을 것이 여행이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보다 낯선 것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 또한 매력이다. 잘 짜진 계획표에서 벗어났을 때 맛보는 의외의 기쁨은 또 어떤가? 여행에서 자유를 빼면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날 붙들어 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이번 여행의 기쁨이었다.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그 비어있음이다. 


  여행지에서 떠나는 날의 오후는 등기로 부쳐온 이별 서류처럼 낯설고 무겁다. 한 줌 불어오는 바람에 눈물을 안으로 접어 넣는다. 비 오는 일요일, 옷장 속에 오래도록 걸려 있던 옷처럼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던 호수, 자작나무 이파리들의 바스락거리던 결, 에릭 사티의 고독하고 투명한 피아노처럼 푸르던 하늘, 그 모두가 내 마음의 곳간을 채우는 순간이요, 마음속에 괄호 하나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 또 다른 여행의 지도 속을 거닐고 있다. 그런 내 인생의 3악장 53마디가 아름다울 걸 믿는다.


호수가… 

쇼팽 같았어. 

호수 앞에 섰을 때 하루는 흐렸고, 하루는 비가 내렸거든. 

그런데 거기서 녹턴이 비를 맞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빗물인지 눈물인지 차가운 게 흘러내렸어.

그게 발라드처럼 기분 좋더라.

아름다운 추억은 죽지 않아. 

영원히 그 기억은 살아있을 거야.

호수 앞에서 녹턴이 비 맞던 소리를…. 


누크시오 국립공원의 필자



매거진의 이전글 아슬아슬 인디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