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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2. 2016

신이 그어놓은 테두리 같은 나라

스페인, 포르투갈








프롤로그


  여행지를 정하는 일은 기분 좋은 어려움이다. 가고 싶은 곳은 많고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너무 좋으면 한숨이 나오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동안 한숨을 쉬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하늘이다’를 외치듯 스페인의 하늘은 젊디 젊었고 지진과 홍수를 버텨낸 중세 도시들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정겹고 포근하게 다가왔다. 느낌이 머무는 거리를 거니는 일은 언제나 색다르고 행복하다. 따뜻함, 정열, 슬픔과 한, 아름다운 색깔은 감정을 흔들었고 회화, 건축, 음악, 춤, 영화 등 예술의 면면들은 내 핏줄 속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스페인은 나의 우뇌를 지배했다. 누군가 그랬다. ‘여행자의 마지막 안식처가 인도라면, 예술가의 마지막 안식처는 스페인’이라고. 지난여름엔 인도를, 그리고 이번에 스페인을 다녀왔으니 나는 여행자와 예술가의 안식처를 모두 접한 셈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태양의 나라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햇살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엔 예술을 사랑하고 창조해낸 흔적이 햇살처럼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영광과 상처가 뒤범벅된 역사의 굴곡마저도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그저 한 줌의 모래처럼 아득했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의 정열과, 대항해 시대를 이끈 나라의 꼿꼿한 자존감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선명했다. 같은 태양 아래 역사의 굽이마다 얼기설기 맞물렸으며, 때론 티격태격 부딪히던 두 나라를 가로지르는 여행은 흥미로웠고 값졌다.  아! 기막히게 아름다워서 감탄사를 소리 내고 나면 더 이상 꽉 차오른 감정을 비집고 들어갈 그 어떤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유럽은 오히려 슬픈 곳이다. 그 아름다운 슬픔의 나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인간의 슬픔을 가장 기막히게 표현한 노래 파두(Fado)’

話頭?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도 상관없다. 왜? 그 아슬아슬함이 여행의 매력이요, 벗어남의 특권이며 인생의 플러스 요인이니까. 리스본의 골목을 걷다가 조그만 바에 들러보고 싶었다. 가슴을 후비듯 애잔하고 서정적인 파두를 들으며 독한 술 한 잔 마시는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처럼 검은 옷을 입고 말이다. 이처럼 파두는 내게 있어 포르투갈에 대한 일종의 화두(話頭)였다. 27번 트램을 타고 7개 언덕을 오르내리며 타일 벽화 아줄레주를 머릿속에 복사하듯 새기고 싶었다. 마음의 현을 요동치게 만드는 슬픈 노래 파두의 나라, 독하고 달콤한 포트와인의 나라, 대항해의 시대를 열어 16세기의 슈퍼파워였던 나라로의 여행은 자유롭게 흘러갔다.      


  12줄의 현악기인 기따라(기타의 일종)의 애조 띤 반주에 구슬픈 멜로디가 창자를 쥐어짜듯 고통스럽게 뱉어내는 노래 파두(Fado)는 소태처럼 쓰고 처연하다. 파두는 숙명이란 뜻을 지닌 포르투갈의 전통음악으로 리스본 선창가 카페에서 불리던 노래였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부른 ‘검은 돛배(Barco Negro)’는 배를 타고 나간 연인을 그리다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돛의 환영에 미쳐버리는 여인을 노래한 것이다. 하지만 노래의 끝자락에 다가서면 슬픔을 내뱉는 그 거친 목소리에서 묘하게도 삶의 용기가 읽힌다. 파두라는 장르 자체가 절망과 희망이 섞인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식을 갖춰 나간 까닭일 터다. 지구의 가장 서쪽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은 자원도, 사람도 부족한 나라였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남자 나이 열 너 댓 살만 되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연인을 기다리며 여인들이 부둣가에 주저앉아 부른 노래 파두.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타계하자 정부가 사흘간의 애도기간을 두었다 하니 그녀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음악은 삶을 대변하는 예술이다. 아르헨티나 국민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삶에 감사하며’, 쿠바 재즈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꽃들의 침묵’,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이상한 삶의 방정식’, 또는 맨발로 노래하는 아프리카의 디바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를 들어보라. 뜻은 알 수 없지만 가슴 뭉클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험의 세기는 끝나고 포르투갈은 화려한 무대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포르투갈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동화를 만날 수 있었다. 낭만과 재치가 넘치는 이상한 도시가 펼쳐지는 가운데 이어폰에선 파두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는 세비야


  스페인의 하늘은 유난히 파랬다. 그리고 넓었다. 그 하늘 한 조각 오려내어 가지고 싶었다. 여행 내내 그랬다. 물론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기막히게 맑고 따뜻하며 건조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유난히 파란 하늘에 대한 느낌이 더 강렬했던 것은 높은 산이 거의 없고 평야와 낮은 구릉이 많은 이유였다. 지평선에서 일출을 볼 수 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몇 시간을 달려도 평지는 계속되었다. 넓은 차창으로 하늘을 통 채로 껴안는 느낌과 감동은 특별했다. 안달루시아의 야트막한 구릉엔 올리브 나무가 몽실몽실, 하얀 구름은 파란 도화지에 나비가 되어 나풀거렸다. 평화로운 들녘은 햇살을 온몸으로 가득 받아 마시며 수줍게 미소를 띠고 있다. 가로수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 향기가 둥글게 굴러다니는 세비야의 아침은 그 샛노란 과일만큼 환하고 상큼하며 싱싱했다. 작지만 화려한 도시 세비야에는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페인의 다른 이름은 열정이다. 열정의 다른 이름은 세비야다. 하늘땅 바람 물 공기 사람 모두가 열정으로 빛남을 느낄 수 있는 세비야는 투우와 카르멘으로 유명하다. 어디선가 오페라가 흘러나올 것 같고 여유로운 미소가 넘치는 곳이었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비제의 카르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이렇듯 여러 오페라의 배경이 된 도시가 또 어디 있을까?

200여 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세비야 대성당이 오렌지 나무 가로수 사이로 보였다. 세계 3대 성당이라는 명성답게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푸르다 못해 눈부신 하늘 아래 그림처럼 서 있었다. 엄숙한 성당 안에는 전성기의 스페인을 상징하는 황금 벽과 황금으로 만든 공예품, 대가들의 그림들이 있었다.



  무려 7,000개의 파이프가 달린 엄청난 크기의 바로크 양식 오르간이 눈을 현혹했다. 성당이 무너질까 봐 한번에 20% 정도만 사용한다는 파이프오르간이었다. 여러 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는데 파이프의 모양과 장식이 하나하나 다르면서 모두 아름다웠다. 악기라고 하기보다는 건축의 일부이며 예술작품이었다. 소년합창단이 부르는 미사곡에 색을 입혔을 오르간의 소리가 소용돌이치듯 느껴졌다. 하지만 그 황금의 유물들을 착취당했던 원주민들의 피눈물을 생각하면 화려함에만 마냥 취해 감탄할 일이 아니었다. 성당은 고딕 양식이지만 모스크였던 시절의 자취들을 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히랄다 탑이다. 탑에 오르는 길은 계단이 아닌 나선형 도로 형태였는데 왕이 말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헉헉대며 34개의 계단참을 거쳐 꼭대기에 다다르니 기도시간을 알리는 28개의 크고 작은 종들이 달려 있다. 종탑에 오르니 갑자기 뜬금없이 노트르 담 드 파리의 종지기 콰지모도가 생각났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비야의 풍경은 상큼하면서도 노곤했다. 강한 햇빛에 아른아른 펼쳐진 도시엔 소인국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고물고물 움직이고 있었다.                                                            

  

  투우는 경기장의 빛과 그늘이 반으로 나누어지는 저녁 무렵에 시작된다. 스페인에선 투우도 예술이다. 소든 투우사든,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쇼가 투우다. 그러나 긴박한 상황에서도 투우사의 몸짓은 우아하기만 하다. 투우사의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다고 한다. 투우사는 그 임무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뉜다. 즉 가장 먼저 등장해서 창으로 투우 목을 찌르는 <피카도르>, 투창으로 멋진 솜씨를 보이는 <반데릴레로>, 그리고 마지막에 소 숨통을 끊는 <마타도르>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 단연 마타도르를 최고 투우사로 손꼽는다.


 


  스페인 영화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최고작으로 뽑히는 작품 중 하나가 <그녀에게>이다. 이 영화는 피나 바우쉬의 <까페 뮐러>로 시작하여 <쿠쿠루쿠쿠 라 팔로마>,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피나 바위쉬의 <마주르카 포고>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수작이며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슬픔의 미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럽도록 아름답기 때문이다. 서럽도록 아름답다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다. 그저 느낌일 뿐이다. 수 천 만원을 호가한다는 투우사의 복장은 단순히 의상이라기보다 장인의 수공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소설을 바탕으로 비제(Georges Bizet)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은 질투와 사랑이 소용돌이치는 이야기다. 주인공 카르멘은 강렬하고 변덕스러우며 광기에 가까운 정열을 가진 여인이다. 오페라는 현재 세비야대학교가 된 담배공장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19세기, 유럽 전체 담배의 4분의3을 생산하던 그곳은 여공들만 무려 만 명에 달했다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옛날 담배공장엔 왜 여공이 많았을까? 그건 바로 부드러운 여성의 손가락과 입술과 침, 아가씨의 연하고 뽀얀 허벅지에 담배를 말아야 좋은 품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털이 숭숭 난 남자의 허벅지에 말아 만든 시가라면?

세비야 대학과 투우장 사이에 투우사의 청동 입상이 있다.  돌출된 물건의 위치가 어느 쪽에 있어야 하는지 관심 없는 것처럼 세비야 사람들은 카르멘이 실존인물인지, 담배공장에 다녔는지 안 다녔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춘향이나 황진이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나쁜 남자 돈 주앙과 심성 나쁜 여자 카르멘의 무대가 세비야라는 것에 묘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돈 주앙과 카르멘이라는 인물 때문에 세비야는 바람난 도시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개의치 않는다. 그건 세비야 사람들이 플라멩코와 투우에 열광하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고 열정적으로 사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손가락엔 캐스터네츠를 끼고 하얀 물방울무늬의 붉은색 드레스, 올백으로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엔 빨간 꽃을 꽂고 구두 뒷굽을 딱딱거리며 신나게 추는 춤, 내가 상상하던 플라멩코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플라멩코는 오디오 의미는 전혀 입력되어 있지 않은 채 비디오 요소만 저장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니 세비야에서 만난 플라멩코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화려하고 정열적인 춤에 비해 음악은 영 다른 얼굴이던 것이다. 빠르지만 단조의 멜랑코리한 선율은 슬픔과 한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바로 소외와 박해를 거듭 당해온 집시의 역사가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포르투갈의 파두 역시 느리지 않지만 어둠이 가득한 노래였는데 느낌이 비슷했다. 플라멩코는 춤(바일레 플라멩코)뿐 아니라 노래(칸테 플라멩코)와 기타(토케 플라멩코)를 포함했다.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의외로 칸테 플라멩코. 그러니까 화려한 춤보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에 귀가 먼저 가는 것이었다. 집시들의 슬픔과 죽음, 좌절 등을 주제로 삼기도 하고 사랑과 정열을 표현한다고 한다. 검은 셔츠에 헤어 젤을 발라 번들거리는 고수머리 남자의 춤은 대단히 파워풀했다. 마룻바닥을 향해 내리치는 구두 굽 소리는 심장을 후려치며 거친 호흡이 객석까지 전달되어 뜨거웠다. 플라멩코는 춤을 추는 사람뿐만 아니라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이 모두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그 예술적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추임새처럼 올레를 외치면서 무대와 하나가 되었다. 기쁨과 슬픔의 노래와 춤, 기타와 캐스터네츠, 어찌해도 따라 하기 어려운 손뼉 리듬에 쥐어짜는 표정, 폭풍처럼 몰아치는 발놀림에 빠져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정열적이고 농염한 춤은 그렇게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바쁘게 몰아치는 하루 여정의 피곤함으로 이미 상기된 얼굴은 플라멩코 리듬에 취하고 상그리아(sangria) 한 잔에 더욱 붉게 물들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다. 하지만 ‘카사노바’와 함께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돈 주앙을 세비야의 여자들은 왜 미워하지 않았을까? 재력과 권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숨 막히게 뜨거운 태양을 잠시 쉬게 하는 바람처럼, 돈 주앙은 전통이라는 틀에 갇혀 사는 여자들에게 자유라는 달콤한 휴식을 선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바람둥이는 단순히 나쁜 남자로 치부하기에는 매력이 너무 많다. 사실 그가 좇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복이다. 직업과 외모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하고 차 버리다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 몰리에르의 <돈 주앙>,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바이런의 <돈 주앙>,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주앙> 등 성격도 천변만화하듯 현대판 돈 주앙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절벽 위의 론다돈 미구엘의 에스프레소


  안달루시아의 새하얀 집들을 보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새털구름 한 톨 없이 여전히 새파란 하늘과 진초록 바다에 진주처럼 부서지는 햇살을 보며, 아름다움이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버스가 달리는 중에도 해안에 자리한 예쁜 마을들을 카메라에 담는 시간이 즐거웠다. 조롱조롱 오렌지가 달린 나무들, 제라늄 화분을 걸어 논 하얀 벽과 붉은 지붕들이 너무 예뻤다. 깨끗하고, 밝고 화사한 마을에 고즈넉한 평화스러움까지 더해진 그곳에 살면 마음 역시 아름답고 평화로워질 것 같았다.


  

  론다에 다다랐을 때, 부드러운 빛을 띠는 해가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첫 눈에 아름다운 마을임이 느껴져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암절벽이 사방에 둘러져 있고 협곡을 이은 누에보 다리가 관문처럼 마을 입구에 자리 잡았다. 감탄은 급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발걸음은 빨라졌다. 겨울이지만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라 꽃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복숭아꽃을 닮은 분홍 꽃을 본 순간 고흐의 그림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생각났다. 그리곤 내 맘대로 정해버렸다. 저건 복숭아가 아니라 분명 아몬드 나무일 거야 라고…. 협곡 위에 미니어처 같이 작고 오밀조밀한 집들이 들어선 론다는 드넓은 평원이 둘러져 더 앙증맞았다. 소박한 시골 마을 론다는 이상한 사랑의 족쇄를 채운 양 빨려 들어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곳 역시 대부분 새하얀 집들이지만 가끔은 허리에 분홍 한 필, 가슴에 노랑 반 필 걸친 낭랑 십팔 세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컬러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집들도 있었다. 다리 위에서 절벽을 내려다보니 저절로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바라보는 풍경이 평화롭고 아늑하기 때문일까. 이내 긴장이 풀어지고 편해졌다. 누에보 다리 바로 옆 깎아지른 듯한 절벽 옆에 있는 매력적인 카페 ‘DON MIGUEL’에 들어갔다. 수 백 년을 변함없이 비쳐온 햇살의 샤워를 받으며 아기 손톱처럼 앙증맞은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아늑함이 온몸을 감쌌다. 론다에서 선물 받은 시간은 마치 깨기 싫은 꿈처럼 지나갔다. 









언덕 위의 하얀 집 미하스와 지중해 말라가


  ‘안달루시아의 에센스’라 불리는 미하스는 특별한 관광 명소는 아니지만 마을 자체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산 중턱이 온통 하얀 건물로 가득 찬 것이 그리스가 연상되었다. 마치 영화 맘마미아의 메릴 스트립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메라 프레임으로 보이는 골목이나 담장, 집, 상점 모두 엽서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 지중해가 보이는 하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미하스(Mijas)는 기와를 빼놓고는 모든 건물들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주민들의 차도 대부분 흰색이다. 드레스 코드가 화이트로 지정된 파티 같다. 어느 골목에서나 지중해가 보인다. 빠른 삶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움, 그 자체가 미하스다. 아프리카에서는 흰색이 신의 색이라고 하였는데, 미하스는 흡사 권력에 관심이 없는 신들이 세상에 내려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느낌이었다. 미하스에 도착했을 때는 해의 꼬리가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아있어 맘이 급했다. 그러나 때마침 붉은 노을이 하얀 벽에 가로등과 나무의 그림자를 미묘한 색으로 칠하며 움직였다. 그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숨이 나왔다. 미하스 사람들은 1년에 두 번 주민들이 직접 하얀 페인트칠을 한단다.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법, 하지만 그들은 페인트칠마저도 즐거운 놀이처럼 여기리라 생각되었다. 한 바퀴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 마을에 사는 건 또 어떤 색의 행복일까 궁금해하며 미하스를 떠났다.


  

  프랑스 남부에 코트다쥐르가 있다면 스페인 남부에는 코스타 델 솔이 있다. 코스타 델 솔은 지중해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해안 지역을 말한다. 유럽 겨울은 대체로 흐리고 싸늘하지만, 코스타 델 솔은 겨울에도 쾌청할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인기 있는 휴양지로 꼽힌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말라가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가장 풍성한 말라가는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바다를 찾아 나섰다.  호텔 네임카드를 챙긴 후 도로를 몇 번 건너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바다가 보였다. 지중해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군들이 발과 손을 담갔을 그 바다였다. 바닷가엔 인적이 거의 없고 불 켜진 레스토랑은 두어 개뿐이었다. 펍에 들어가 맥주라도 한 잔 할까? 하며 유리창을 들여다보니 남자들만 몇 사람 있었다. 10년 전 유럽에 처음 갔을 때는 밤거리를 걷다가 자연스레 바에 들어가곤 했었다. 도시 곳곳에서였고 물론 혼자였다. 그러나 그날 나는 펍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침에 다시 와서 사진이나 찍자고 생각하곤 발길을 돌렸다. 나이가 이런 거구나 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술래잡이 하듯 바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쉬웠다. 그런데 비는 금세 구름에게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하지만 버스는 이미 도시를 떠나고 있었고 그렇게 지중해는 씀바귀처럼 씁쓸하게 멀어져 갔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물이 되는 발자국, 선으로 태어나 동그라미로 죽는 비 그림을 좋아한다. 그러나 스페인의 태양과 하늘은 비를 그리워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파티오의 꽃들이 손짓하는 좁은 길코르도바


  코르도바로 가는 길은 내내 황무지였다. 강한 햇빛을 벗 삼은 올리브 나무가 복권처럼 메마른 대지를 위로하고 있었다. 갑자기 스페인 사람들이 왜 열정적인가 하는 의문이 풀렸다. 그들은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나 올리브를 먹는다. 거의 모든 요리에 올리브기름이 들어간다. 강렬한 태양의 빛을 머금고 메마른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인 올리브를 먹으면서, 춤을 추고 손뼉을 치는 삶을 살고 있다. 열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르도바 역시 세비야처럼 싱그러운 오렌지 나무들이 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고풍스러운 도시의 외관 때문이었을까? 왠지 사람들에게서 심오한 철학과 지성이 느껴졌다. 화무십일홍이라는 옛말처럼 찬란한 코르도바의 향기는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러나 천 년 전의 향기를 맡으려는 관광객들이 그곳을 찾는다. 옛 명성이 일장춘몽처럼 느껴질 정도로 도시의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다. 가뭄으로 시들었던 꽃에 물을 뿌린 느낌이었지만 오밀조밀한 거리와 소박한 건물들이 다정했다. 메스키타 주변에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하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유대인 거리 후데리아가 있다. 골목은 좁은데다 미로였다. 다양한 장식의 파티오엔 형형색색의 화분들이 걸려 있어 향기로웠다. 스페인은 오감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를 가졌다. 광장 한편에 앉아 간간히 날리는 오렌지 내음을 맡고 싶었다. 햇살을 덮고 시집을 뒤적이면서 여행의 피로를 달래고 싶었다.  여행은 떠나고 싶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도 여전히 ‘싶음’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싶음의 진행형은 여행이 끝나도 계속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짧으나마 그 속에 내 발자국으로 그림자 그림을 그리던 시간이 행복했다.    


 






싸이프러스 타오르는 소박한 옛 도시 그라나다


  엄지로 저음 현을 한번 퉁기고 약지-중지-검지 순으로 음을 반복해서  따라라라라라라라라… 하는 트레몰로 주법으로 시작하는 기타 음악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곡을 작곡한 타레가(Francisco Tárrega, 1852~1909)는 제자의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했고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여행을 떠났다. 그런 처지의 그가, 달빛 드리워진 알람브라 궁전에서 분수의 물소리를 듣고 착안하여 작곡한 음악이다. 대학 새내기 시절 어느 날, 연습실에 들어서는데 귀에 착 감기는 피아노 소리가 있었다. 바흐도 베토벤도 쇼팽도 아닌 다름, 뭔가 목가적이며 동양적인 느낌으로 마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곡이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음악에 이끌려 연습실로 들어갔다. 친구가 연습하던 그 곡은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의 <오리엔탈>이라는 곡이었다. 에스파냐 무곡 op.37중 2번으로 사라센 문명에 대한 추억을 그린 작품이다. 그때 악보를 복사해서 한동안 연습했던 기억이 있다. 알베니즈(Albéniz, Isaac Manuel Francisco 1860 - 1909)의 그라나다, 카탈루냐, 세비야, 까디즈를 주제로 하는 <스페인 모음곡>도 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되는 음악이다.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테너 플라치도 도밍고는 ‘미스터 그라나다’로 불릴 정도로 <그라나다>라는 노래를 잘 부른다. 작곡가 라라가 1932년에 그라나다를 방문하고 만들었는데 대중음악 사상 가장 많이 리바이벌된 노래로 사랑받고 있다. 음악도 한몫하는 멋진 나라, 스페인이다.


 

   <싸이프러스 나무>, <두 그루의 싸이프러스>, <싸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 <싸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싸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등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그림에는 싸이프러스 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알람브라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하늘을 향해 불타오르듯 피노키오 코처럼 길쭉한 싸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있다. 나무들을 보는 순간 고흐의 그림들이 오버랩되었다. 그러나 일부 나무들은 사면체 모양으로 전지 하거나 터널처럼 깎아 놓았다. 깔끔하지만 자연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게 내 마음엔 꺼림칙했다.

알람브라 궁전은 겉보기는 수수했지만 안으로 들어설수록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로 인도했다. 알람브라는 일출과 일몰,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달빛에 따라서 궁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타지마할과 같은 이치다. 인도가 타지마할을 지을 때 아주 큰 영향을 준 것이 알람브라 궁전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가장 뛰어난 중정으로 손꼽히는 안뜰은 완벽한 대칭구조이다. 중앙에 있는 사각형의 연못은 거울처럼 주위의 건축물들과 하늘의 풍경을 잡아내는 스크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방이 막혀있는 정원은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어 외부와의 소통을 이루어내는 듯하였다. 정원에 있는 분수는 동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자연 수압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만든 것이라니 지혜가 놀랄만하다.



  역사를 떠나서 도시를 이해할 수 없다. 지난 700여 년간 이베리아 반도는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포르투갈 네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역대 그 어떤 왕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낸 여인이 있었다. 바로 이사벨 1세 여왕이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서쪽으로 나아가 황금을 찾아오겠다고 떠들고 다녔을 때 이웃나라 왕들은 코웃음 치며 그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그러나 이사벨 여왕은 그에게 막대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탐험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에 그녀의 모험은 포르투갈과 쌍벽을 이룬 에스파냐의 대항해시대를 열어 세계에 군림하는 제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세계사에서 다시 한 번 더 입지전적인 여왕으로 등극한 셈이다. 이사벨 1세는 스페인을 완벽한 천주교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자면 이슬람인 알람브라 궁전을 함락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알람브라 궁전은 입구조차 찾을 수 없는 최대 요새였다. 여왕의 비책은 식량 보급로 차단이었는데 그 작전은 주효했고 알람브라는 그녀의 것이 되었다.



  조건 없는 용서는 없다. 노력 없는 대가도 없다. 이사벨은 소원대로 그라나다에 묻혔다. 그런데 그녀의 유언장이 근사하다. 수의는 수수하게 하고 남은 비용은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에 기부하라고 했다. 자신의 시신은 알람브라 궁전의 발길 뜸한 곳에 묻어줄 것과 작은 묘석 하나만 남겨달라고 썼다. 그러므로 그녀는 알람브라 궁전 교회 지하에 묻혔다. 그리고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작은 대리석 묘비가 정원 구석에 쓸쓸히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랬다. 이교도라면 무조건 종교재판과 처형을 일삼았던 회한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속죄가 필요했으리라. 다행히 알람브라를 사랑했던 이사벨은 궁전을 뜯어고치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슬람의 무어인이 북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상륙한 지 어언 800년 동안 어느 왕도 건드리지 못했던 이슬람의 마지막 보루 알람브라 궁전을 함락시킨 이사벨 1세 여왕, 그 피비린내 나는 가톨릭과 이슬람의 종교전쟁을 고스란히 목격한 궁전은 여전히 말이 없다. 다만 이슬람의 영광을 지키지도, 세인들과 어울리지도 못한 알람브라 궁전의 회한이 오늘날 사람들을 불러 허물없이 대하고 혼을 빼놓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워할 수 없는 남자 돈키호테의 마을라만차 콘수에그라


  전 세계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스페인 사람은 누구일까?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돈키호테를 꼽을 것이다. 비쩍 마른 애마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가 긴 창을 들고 라만차 지방의 풍차와 싸우는 장면은 쓴웃음을 자아낸다.


  

  아라비아어로 ‘건조한 땅’을 뜻하는 라만차는 카스티야 지방에 속한 불모의 고원지대이다. 라만차의 황량한 들판에선 올리브와 밀을 경작했다. 지금도 그곳을 늠름하게 지키고 서있는 11개의 풍차는 밀을 빻기 위한 방앗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풍차가 돌던 대부분의 언덕에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다. 풍차는 언덕을 캔버스로 삼은 거대한 유화 같아 보였다. 고깔콘을 닮은 원뿔형 지붕에 4개의 날개가 달린 풍차가 돈키호테에게는 괴물처럼 보였음 직도 하다. 각각의 풍차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화려한 글씨체가 예뻤다. 긴 세월 바람에 깎인 풍차의 몸통은 칠이 바라고 떨어져 나갔지만 커다란 골동품 인양 정겨워 안아주고 싶었다. 언덕 아래로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빛나게 만들었던 금빛 밀밭은 휑하니 적갈색 흙만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돈키호테가 먼지를 풀썩 대며 로시난테를 타고 지났을 길이었다. 평야가 바다처럼 넓어서인지 등을 기대고 선 풍차가 등대같이 느껴졌다. 바람의 길과 시간의 길을 안내하려고 서 있는 등대 말이다. 너무나 평온한 공간에 서 있던 까닭일까. 때론 돈키호테처럼 가끔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돈키호테 마을은 지붕이나 벽에 흰색과 푸른 칠이 많았는데 파란 하늘과 그지없이 어울려 청량해 보였다. 마당 한쪽에 철로 만든 빈약한 돈키호테가 서 있다. 과대망상에 걸린 볼품없는 기사가 긴 창과 방패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중세 귀족이 되어 걷고 싶은 미궁의 고도 톨레도


  땅보다 낮지 않고 하늘보다 높지 않은 톨레도, 허허벌판의 언덕 위로 삐쭉삐쭉한 탑들이 나타났다. 여과장치 없이 뿜어내는 태양의 에너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중세로의 시간여행을 허락하는 것 같았다. 마드리드가 수도가 되기 전 천여 년 동안 스페인의 중심지였던 톨레도에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각종 종교 시설이나 박물관은 물론 일반 가정집까지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톨레도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신의 은총이 어떤 색인지 알게 했고, 호두나무로 만든 성가대 의자에서는 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중세부터 이어진 도로는 작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데 그나마 군데군데 통행을 가로막는 쇠기둥이 있었다. 통행카드를 인식시키면 쇠기둥이 땅 밑으로 내려가고 자동차가 지나가도록 만들어졌다. 멋쟁이가 되려면 추워도 참고 더워도 참아야 하는 법, 중세풍 도시를 유지하려면 불편해도 참아야 하는 법이다. 마차가 또각또각 운치 있게 지나다녔을 돌길로 자동차가 지나갔다. 


  

  또 하루가 지났다. 여행지의 하루는 유난히 빠르다. 지는 해가 술잔과 음식,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붉게 칠했다. 술자리는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행복한 색깔이다. 하늘이 강물이나 땅과 집을 하나의 색으로 만든 것처럼, 석양은 술잔도, 음식도, 여행자의 얼굴도 하나의 색으로 물들였다. 행복이란 모두가 같아지기를 바라는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 즉 똘레랑스인 것이다. 노인의 피부처럼 주름졌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색을 품고 있는 톨레도는 그렇게 다른 시간을 품고 사는 도시였다.   

  







예술의 보물창고 마드리드


  마드리드는 펠리페 2세가 수도로 결정한 이후 스페인의 중심이 된 도시이다. 중심가에 위치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는 여행자들과 마드리드 시민들, 그보다 더 많은 비둘기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광장 이름인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라는 뜻인데 예전에 태양을 새긴 문이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중세 유럽 정취가 물씬 풍기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니 마요르 광장이다. 4층짜리 건물에 둘러싸인 스퀘어 광장인데 종교재판, 화형식, 투우 등이 열렸던 곳이란다. 한가운데에는 스페인 왕이었던 펠리페 3세 기마상이 세워져 있고 건물 가장자리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대부분 오래된 우표와 화폐, 체스 등이었다. 지푸라기 끈에 노란색과 연두색의 원석을 꿴 특이한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파는 이는 영어를 모르고, 나는 스페인어를 모르는 터라 흥정이 어려웠다. 그곳을 지나던 한 신사의 도움으로 10유로를 싸게 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라시아스~~


 

 건축, 영화, 음악, 미술, 춤 할 것 없이 스페인은 예술에 능통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1904~1989),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엘 그레코(El Greco, 541~1614),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등 이름만 들어도 그림 서너 점의 그림이 금방  떠오르는 세계적인 화가들이 수두룩하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엔 미술관과 박물관이 수 백 개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 속에 큐브 맞추듯 진행되는 여행이다 보니 그림의 떡이다. 프랑스 니스에 갔을 때도,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화가 샤갈과 마티스 미술관에도 가지 못했다.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서처럼 스페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행복한 사람은 감탄을 잘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감탄사를 날리는지도 모른다. 마드리드는 미술의 도시며, 감탄의 도시였다. 마드리드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270 여개나 있고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프라도 미술관엔 3만 점 이상의 작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프라도에서 주어진 시간은 고작 1시간 30분, 화장실 갈 시간조차 생략해야 했다. 팸플릿에 소개된 대표작의 제목과 화가를 안내하는 방 번호를 보고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야,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등의 그림들을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난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다음은 고야의 옷 벗은 마야와 옷 입은 마야였다.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고 했다. 모든 그림에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에도 사연이 있다. 1652년, 오스트리아 왕자인 12살의 레오폴트 1세는 스페인으로 시집간 누나의 딸인 스페인 공주 마가리타 테레사와 약혼한다. 실제로 마가리타 공주의 아버지인 펠리페 4세 역시 왕가의 대를 잇기 위해 조카뻘인 마리안느 공주와 결혼했었다. 당시 왕실에서의 근친혼은 권력의 분배를 막기 위해 필수, 당시 고작 두 살이었던 마가리타 공주는 외삼촌과 결혼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레오폴트 1세는 공주가 혼기가 될 때까지 그녀를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 혼담을 유지하기 위해 스페인에서는 공주의 초상화를 오스트리아로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에는 왕실의 총애를 받는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Velázquez. 1599~1660]라는 궁정화가가 있었다. 국왕은 벨라스케스를 시켜 마가리타 공주의 커가는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게 한 것이다. 화가 벨라스케스는 국왕과 인간적으로도 깊이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딸인 마가리타 공주를 딸처럼 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대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혼 때문에 심한 주걱턱이 대대로 유전되었고, 마가리타 공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장하면서 점점 공주의 주걱턱은 심해졌다. 그는 마가리타 공주를 어떻게든 예쁘게 그려주고 싶어서, 점점 한쪽으로 치우친 각도로 공주를 그렸다고 한다. 초상화로나마 신부의 모습을 만나왔던 레오폴트 1세는 드디어 15살의 마가리타 공주를 오스트리아로 데려와 결혼한다. 26살의 황제와 15살의 공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다. 마가리타 공주는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숨을 거두고 만다. 공주의 나이는 겨우 22살이었다. 사인이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 때문이었는지, 난산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겨우 22살에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 사망한 마가리타는 비운의 공주로 기록되었다. 예술사의 걸작들이 대접받는 비밀은 바로 감정의 연쇄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에는 알 수 없는 애잔함과 연민이 스며있다. 프랑스 작곡가 라벨도 그 그림을 보고 느린 2박자의 춤곡을 작곡했다. 피아노곡의 제목이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인 것을 보면 그림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있음이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인 고야, 피카소, 달리 역시 <시녀들>에 나타난 공주가 등장하는 모작을 탄생시켰다. 음악보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을 기억할 거다. 박민규의 소설 역시 이런 예술사의 곡절들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지중해의 아름다움을 품은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니 섭씨 23도. 지중해성이라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해서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냥 눌러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포트 올림픽 항구에서 현지식 파에야를 먹고 해변을 산책했다. 반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이 배구를 하고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이 조깅을 한다. 백 여척이 넘는 요트들이 떠 있었다. 제각각 모양과 크기가 다르지만 색깔은 모두 화이트, 그런데 요트의 한 달 정박료가 800만 원이라니 1년이면 1억?


  “선생님, 이제 당신은 95세나 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건 내 연주 실력이 아직도 조금씩 향상되고 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는 파블로 카잘스는 첼로의 성서라 할 만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발견한 사람이다. 작곡된 지 20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건 어쩌면 카잘스에게 운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13세 생일을 맞이한 날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풀사이즈의 첼로를 사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부둣가의 오래된 악보 상점에 들렀다. 많은 악보들을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우연히 낡고 색이 바랜 한 묶음의 스코어를 발견했다. 아, 그것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 나는 말로써는 다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연습을 시작했다. 12년간 매일 밤 그 곡을 연구하고 연습했지만 그중 한 곡이라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 부둣가가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곡선의 미’에 취한다. 육감적인 플라멩코 무희의 허리가 아니더라도 건축에서 유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라는 건축가의 작품들이 도시의 풍경을 바꿔놓은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아름다운 건물에 중독되었고, 그 지독한 중독의 중심에는 가우디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가우디의 여섯 개 건물들이 바르셀로나의 인상을 바꾸고 있었다. 구엘 공원은 색색의 타일 조각, 독특한 기둥과 화려한 천정, 모자이크 분수, 뱀처럼 길게 구불거리는 모양의 벤치 등, 말 그대로 가우디 월드였다.

“나는 꽃,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닭 울음소리, 새들의 지저귐, 곤충들의 날갯소리를 들으며 프라데스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스승인 자연의 순수함을 통해 상쾌한 이미지를 얻는다.” 생전에 즐겨했던 가우디의 말에서 가우디의 건축 모태가 자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단테, 갈릴레오,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처럼, 가우디에게도 이상적인 후원자가 있었다. 가우디의 순수성을 캐내 그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렸던 스승이자 후원자는 가우디보다 6살 위인 에우세비 구엘 남작(Eusebi Guel 1846~1918)이다. 구엘은 직물업계의 거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우디가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투자했다. 구엘은 자신의 저택을 지을 때 자금에 구애받지 않도록 배려했다. 설계자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아치형 천장과 장식으로 가득 찬 독창적인 방, 조각 타일로 만들어진 굴뚝 지붕은 당시 건축의 기본 틀을 바꾸어 버릴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14년간의 공사기간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결국 구엘이 죽은 뒤 그의 가족이 시에 땅을 기증하면서 구엘 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86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있는 콜로네이드 홀은 그리스 극장이라는 중앙광장의 반을 떠받치고 있다. 깨진 도자기 파편으로 만든 천장 장식이 천국의 크리스털인 양 아름답다. 타일 벤치에 손을 짚고 내려다보면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의 집을 연상시키는 물결모양의 집이 보인다. 자연석을 쌓아 올려 야자수를 닮은 돌기둥을 만들고, 유약을 발라 구운 모자이크 타일과 석고 틀을 떠서 만들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 등, 100년 전에 만들어졌음이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소하게 아름다웠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는 건축에 문외한이어도 일단 눈이 현혹된다. ‘카사 밀라’는 ‘밀라네 집’이라는 뜻으로 집주인 아내의 이름, 1800년 후반에 건축되었는데 아파트 내부에 마차 길을 만들어 마차가 옥상에 주차할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주차 빌딩 개념인 셈이다. 건축은 자연의 일부여야 한다는 가우디의 신념을 담아 석회암 건물의 창과 벽에 바다와 파도의 굴곡을 실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며 곡선은 신의 선이다’고 한 가우디의 정신이 잘 녹아들었다. 가우디가 보기에 신이 만든 것 중 어느 것도 직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곡선만을 이용해서 지었다는 것이다. 피카소, 미로 등도 이 중독의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지만 그 이름의 꼭짓점에는 가우디라는 천재 건축가의 삶과 열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아직도 크고 있는 1882년생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가우디 사후 100주년인 2026년이면 완공될 것으로 보는 가우디의 평생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그 미완의 명작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성당 외벽에 조각된 인물상들은 피카소나 마티스의 영향을 받은 듯 입체적이고 각이 정교했다. 성당 앞면의 조각들은 예수님의 출생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들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입이 딱 벌어진다. 가지가 뻗어나간 하얀 기둥들은 꿈에도 못 본 환상의 숲처럼 아름다웠고, 각 각각의 색채를 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은 성스러운 기품이 있었다. 

지하 전시실에는 건축 초기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수많은 모형들이 있었다. 실에 납을 추로 매달아 내려뜨려서 형태를 만들고 아래에 놓인 거울에 비추어 입체적 형상을 보면서 돔의 높이와 넓이를 조절했다는 가우디의 유물이 있었다. 그건 마치 100년 전에 만든 3D처럼 근사하고 놀라웠다.

 

  


  수도자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전차에 치인 지 3일 만에 7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행색이 너무 초라했던 가우디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겼기에 목숨을 건질 수 없었다고 한다. 가우디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전 재산을 사그리다 파밀리아의 건축을 위해 기부했다. 31세부터 40여 년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 작업에 몰두한 가우디는 자신의 분신 같은 미완의 성당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우아하지만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축에 적용했다. 가우디는 벽과 천장의 곡선미를 살리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를 사용했다.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는 괴테의 말처럼 가우디는 색감을 중시했다. 그는 “건축은 색깔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형태와 부피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색깔은 형태를 보완해주는 동시에 가장 분명하게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은 벽에 걸어두고 보는 그림이나, 음반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러나 가우디의 건축물은 피카소의 그림처럼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에필로그


가고 싶었다. 

떠나고 싶었다.

나를 느끼고 싶었다. 

게으른 평화를 껴안고 싶었다.

그렇게 선 하나를 긋고 떠난 여행이었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루 24시간,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다. 

하지만 공평하게 누리지 못하는 것 역시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간다. 

아니 벌써? 하다가도 어찌 생각하면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나의 시간 방울은 금방울도 아니요, 은방울도 아닌 향기로운 방울이길 소망한다.


무희와 관객이 서로의 주연이던 플라멩코,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지 않은 도시 톨레도, 

무거운 꽃처럼 서있는 가우디, 

열정에서 유연한 나른함까지 담아낸 그라나다, 

눈물의 빛과 바람의 멍이어도 좋을 슬픔으로 휘몰아치는 파두, 

폭발하는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태양, 

푸른 다리미로 다림질한 하늘, 

레이스처럼 섬세한 빛과 소리를 따라 걷던 그 모든 시간들은 스페인을 짜 맞추는 조각 퍼즐이었다. 


삶이 즐거운 곳, 눈이 맛있는 땅, 

태양이 자라는 나라, 

참을 수 없는 유혹의 지중해, 

줄 없는 노트 같은 이번 여행은 모든 푸름에 나를 맡기는 시간이었고 가슴에 창을 내어 바람을 맞는 것이었다. 비어있는 기억의 프레임에 마음의 풍경을 담는 것이요, 액자에 넣어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제 내게 스페인의 서랍이 몇 칸 생겼다. 

첫 째 칸엔 파란 노래를 부르며 자라는 하늘이, 

두 번째 서랍엔 피아노 같은 하늘에 바이올린 선율 같은 태양이,

맨 마지막 칸엔 스페인 하늘을 걷고 있는 내가 들어있다. 

그렇게 스페인 태양 아래 나는 예뻤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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