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프라방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눈이 내렸다. 거대한 흰색 도화지 같은 세상에 소망하는 걸 맘껏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아침. 창을 여니 준비를 마친 아침 공기가 겨울 명찰을 달고 훅 날아들었다. 봄동 배추 위로 길게 늘어진 해의 그림자를 집어넣고 겉절이를 했다. 방금 부려 논 이삿짐처럼 제멋대로 흩어진 책들을 순서 없이 몇 줄 읽기도 했다. 그렇게 새 주소인 2013년이라는 시간으로 이사를 한 지 30일째 되던 날, 라오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소비되는 연료는 이륙에서 착륙까지 소모되는 전체 연료량의 50%~70%라고 한다. 사람도 비슷하리라.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처럼 청춘은 힘들고 아프다. 그러나 어디 청춘만 아프던가? 착륙 시점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고단하고 힘든 일이 끊이지 않으니 말이다. 비행기는 어느덧 궤도에 올라와 날고 있다. 어설프게 혼자 웃다가 책을 꺼냈다. 나는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잔다. 장거리든, 단거리든 예외 없다. 그러므로 가방에 한 두 권의 책을 챙기는 건 중요하다. 돈이 다 떨어지면 돌아온다는 결정 하에 여행을 떠난 <다카하시 아유무>의 책이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쓴 메모와 일기, 사진을 담은 <LOVE & FREE>는 포토 에세이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공항에서 산 쁘띠 치즈 롤을 꺼냈다. 옆자리 남자가 잠에서 깬 것을 보고 먹겠냐고 물었다. 남자는 큰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게 엿보였다. ‘감사합니다.’ ‘어! 한국말 하시네요?’ ‘네 조큼요’ 그렇게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2주 전에 한국 나이로 환갑이 되었다는 그의 이름은 ‘Carl’, 교수라고 했다. 여름휴가 때 보통은 보스턴에 계신 95세 되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고 겨울 휴가는 대부분 혼자 여행을 즐긴다고 했다. 강릉에 있는 대학에서 근무할 때 여행했던 설악산이며 속초 주문진, 동해 삼척이 있는 강원도가 좋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는 라오스 땅에 바퀴를 내리는 중이었다. 메일 주소를 적어주며 비행기에서 읽은 책을 그에게 주었다. 다 읽기도 했거니와 양쪽 페이지에 영문과 한글로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책을 종종 선물하곤 하지만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준 건 처음이다. 기분 좋은 넉넉함이 느껴지면서 왠지 그 여행이 흐르는 강물처럼 유연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수도 비엔티안의 호텔은 메콩 강을 바라보는 위치로 번화한 편이었다. 라오스 화폐 단위는 낍, 100달러를 건네니 790,000낍을 주었다. 마치 79만 원을 받은 듯 기분이 좋았다. 이미 늦은 밤이었음에도 숙소 옆 식당에서는 숯불에 구운 치킨을 팔고 있다. 30,000낍? 환산해 보니 4200원, 싸다. 매번 신용카드를 사용하다가 현금을 쓰니 그 맛이 제법 쏠쏠했다. 이튿날 잠에서 깨니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기온이며 공기가 몸과 맘을 편안하게 했다. 잔 꽃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며 메콩강변을 거닐었다. 방비엥으로 향하는 차량을 예약하고 시내 투어에 나섰다. 수도 비엔티안에는 수 십 개의 사원들이 있다. 사원들을 걸어서 돌기엔 시간이 부족했기에 툭툭을 이용했다. 석가모니의 머리카락과 사리 등을 보관하고 있는 탓 루앙, 탑을 세 바퀴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며 탑돌이를 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파투사이는 1960년대 라오스 전사를 기린 기념탑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라오스가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비슷한 형태의 문을 만들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우리를 태우고 다니던 뚝뚝 기사의 이름은 ‘더’, 그 청년은 우리가 사원을 돌고 나오면 언제나 해먹을 걸어놓고 새우잠을 자곤 해서 늘 깨워야 했다. 비가 내린 탓인지 사원엔 현지인도 여행자도 많지 않았다. 한적함은 오히려 화려한 건축 양식과 스님들의 주황색 가사를 돋보이게 했다. 비가 그치고 깨끗한 공기와 흐림이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라오스의 여행자 대부분은 루앙프라방, 방비엥, 비엔티안 3개 도시를 둘러본다고 한다. 비엔티안에서 방비엥 까지는 150킬로미터 정도지만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도착 시간은 그때그때 다르다고 한다. 루앙프라방까지 국내선을 타면 30분이면 충분하지만 방비엥에 들리려면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방비엥은 마을 전체를 돌아보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작은 도시지만, ‘소계림’이라고 불릴 정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방비엥으로 향하는 버스는 털털거리긴 했지만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정차하더니 꼼짝을 안 한다. 우려했던 게 현실로 나타난 것일까? 차창으로 내다보니 편도 1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이 양쪽 모두 꼼짝 못 하고 서 있다. 일행들이 갑갑한 마음에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100미터쯤 걸어가 보니 멀리 트럭 한 대가 진창에 빠져있는 게 보였다. 다른 트럭이 그 트랙에 와이어를 매달아 끌어낼 심산이다. 그때 거의 대부분이 외국인인 여행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고!, 고!, 고!, 고!’ 마치 응원하듯 리드미컬한 외침에 힘을 받은 듯 트럭은 성공적으로 빠져나왔다. 차들이 하나씩 차례로 움직였다. 그렇게 지체되고 늦어졌지만 누구 하나 불만하거나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한바탕 유쾌한 퍼포먼스를 벌인 양 ‘이런 게 여행의 묘미야’ 하듯 라오스에 몸을 맡겼다.
방비엥에 도착하니 툭툭 기사와 상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여행자들이 젊은 유러피언들이다.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에 발가락 슬리퍼와 배낭, 그들의 표정은 모두 행복하고 만족한 표정이다. 예약한 호텔은 예상했던 대로 열대수와 서양난이 여기저기 피어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지니고 있다. 안내받은 1층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놓고 발코니로 통하는 문을 연 순간 ‘아~~’ 숨이 멎을 듯했다. ‘리버사이드 뷰’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예약한 방이었다. 단순히 강이 보이는 쪽이거니 했었다. 그런데 그곳엔 순간 모든 게 정지해버린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을 듯한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산, 강 그리고 공기의 어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날의 여정이 가져다준 힘듦을 벗겨내듯 신비로웠다.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강을 따라 겹겹이 펼쳐진 절경은 방비엥에서 예정된 2박 3일을 짧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막 도착했을 뿐인데 떠나게 될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들며 초조해지는 거였다. 두 명이 겨우 타는 조붓한 조각배에 몸을 싣고 강줄기를 따라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선선한 강바람과 잔잔한 물살이 따스한 위로처럼 나의 호흡을 감싸 안았다.
방비엥은 작은 도시다. 느리게 걸어도 3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 도무지 바쁠 일이 없을 듯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행복한 게으름이다. 시골마을 같지만 중심가는 소박한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 레스토랑, 여행사, 마사지 숍이 즐비했다. 그런데 그곳엔 특이한 레스토랑들이 많았다. 보료 비슷한 걸 등받이 삼아 식사를 하거나 맥주를 마시며 비스듬히 기대어 TV를 시청하도록 만든 것이다. 눈이 마주친 라오 사람들에게 ‘싸바이디(안녕하세요)’ 하면 새색시 같이 수줍은 미소로 반가움을 나타냈다. 그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 인 양 우리와는 다른 오늘을 살고 있는 듯했다. 길거리엔 손수레에서 팬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상인이 즐비했다. 밀가루에 계란과 우유를 넣고 반죽하여 팬에 굽는 팬케이크와는 달랐다. 미리 만들어 놓은 반죽을 밤톨만큼 떼어 종이보다 더 얇게 손으로 늘어냈다. 마치 풍선껌처럼 찢어질 듯 얇게 펼치는 손놀림은 가히 예술이었다. 달군 팬에 버터를 듬뿍 녹인 후 지단처럼 부쳐 낸다. 그 위에 잘게 자른 바나나를 얹어 종잇장처럼 얇은 반죽을 착착 접어 바나나를 네모지게 싼 후, 땅콩버터를 바르거나 시나몬 또는 견과류 등을 뿌리고 먹기 좋게 칼로 잘랐다. 달콤하고 고소한 팬케이크는 10,000낍(1400원), 여인의 손가락은 길고 야위었다. 가무잡잡하지만 예쁜 얼굴이었다. 표정이 없어선지 뭔가 수심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꼽자이’(고맙습니다) 하며 값을 치렀을 뿐이었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가벼운 달콤함에 휩싸인 귀가 행복했다. 꽃을 베고 숲에서 자고 난 듯 몸이 맑았다. 새소리였다. 방비엥의 아침이다. 정신이 들자 불현듯 어제저녁에 본 산과 강의 아침은 어떤 얼굴일까 궁금했다. 발코니 문을 열었다. 아담하지만 뾰족한 봉우리를 갖고 있는 산의 겨드랑이와 허리 곳곳이 우윳빛 구름을 저고리처럼 입고 있다. 그 어떤 숄 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안개가 산과 강의 경계를 감고 있었다. 잔디 정원의 나무에 핀 참 파 꽃잎 위에 이슬이 맺혀있고 부겐빌레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꽃들이 선계처럼 펼쳐져 있다. 단지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품은 그림이었다. 나도 모르게 방을 나섰다. 몽유병의 여인처럼 말이다. 내 살갗은 안개가 되고 구름이 머리카락을 묶어주었으며 눈은 산에 잡히고 발은 강이 되었다. 노랑, 주황, 초록, 파랑, 보라색의 컬러풀한 카누들이 입을 다문 채 누워 있었다. 노천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선선한 강변 바람과 눈에 들어온 그 모든 자연들이 식사보다 더 맛있었다.
‘내일은 6시에 모닝콜합니다. 짐 챙겨 내려오셔서 7시까지 식사 끝내시고 7시 반 출발입니다.’ 하는 식의 가이드가 정한 시간표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이다.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방점 찍듯 인증 샷을 찍지 않아도 아쉬울 것 없는 여행이다. 집합하다 끝나 버리는 관광이 아니다. 관광은 일종의 채움이다. 그에 비하면 이 여행은 비움에 가까우니 머리가 가볍다. 가다가 쉬고 싶으면 멈추고, 내키면 또 가면 되는 여행이다. 느린 시계를 차고 다니듯 그곳의 여유는 위로였다. 그저 자연을 벗 삼아 라오스 토종 시누크 커피를 마신다거나 파파야 샐러드와 함께 라오 비어를 마시며 멍 때리기를 즐기면 되었다. 지친 여행자가 없어 보였다. 몸과 마음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어느덧 방비엥의 산과 쏭 강과 하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고, 발코니에 우두커니 앉아서 맑은 바람을 쐬면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는 실답게 웃음을 짓기도 했다. 마치 ‘왜 사냐 건 웃지요’(김상용)라고 하는 것처럼, ‘묻노니, 그대는 어이해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라고 이백이 ‘산중문답’ 하는 것처럼 말이다.
<블루 라군> 그곳이 궁금했다. ‘블루’라는 이름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에 끌리고 분위기에 약한 나의 성향 탓이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에서 옥을 녹인 듯 한 물에 타잔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 다이빙하는 젊음이 좋아 보였었다. 작은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 초소 같은 곳에서 사람이 나오더니 돈을 내라고 한다. 티켓을 끊어야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곳곳에 세워진 다리는 개인이 만든 사유이므로 통행료를 받는 것이었다. 통행료가 부담스러운 현지 주민들은 옷을 걷고 강물을 건너 다녔다. 이정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다 인적도 드물어 갈림길에선 직감으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초등학교 옆을 지나게 되었다. 라오스의 모든 학교는 말 그대로 천연 잔디 구장이었다. 낡고 초라한 가방을 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떤 아이들은 서너 살 밖에 안 되어 보일 정도로 왜소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교복 셔츠는 땟물이 꼬질꼬질 흐르고 맨발인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는 더 없이 천진하고 투명했다. 목이 컬컬하여 구멍가게에서 콜라를 사서 마시는데 조무래기들이 빤히 쳐다보았다. 먹고 싶은 맘이 얼굴 가득하다. 그러나 캄보디아나 인도에서 만난 아이들처럼 손을 내밀거나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손엔 장난감 대신 빈 PET병이나 빈 캔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한 아이에게 콜라를 사서 주니 곁에 있는 친구들의 빈 병에 조금씩 나눠 주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정경이었다.
비포장을 달려 다다른 블루 라군은 작은 시냇물이 모여 코발트빛 웅덩이를 이룬 젊은이들의 놀이터였다. 그곳 역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쏘피와 이바를 또 만났다. 비엔티안에서 방비엥 올 때 같은 버스를 탄 학생들이었는데 저녁 먹으러 시내 나갔다가 식당에서 마주쳤었다. 독일에서 온 그녀들을 자꾸 만나지는 게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무려 아홉 번이나 만나게 될 줄을,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청춘 남녀였으면 분명 일이 벌어질 터였다. 파란 물에 몸을 던지는 푸른 청춘들 때문에 블루 라군은 영원히 푸름을 간직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샌드위치를 먹었다. 닭 가슴살과 양상추, 토마토를 넣고 칠리소스를 끼얹은 바게트가 고소하고 맛있었다. 자유를 꿈꾸며 배낭 하나 메고 방비엥을 찾은 젊은이들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다이빙을 하거나 춤을 추었다. 카약을 하거나 튜브를 타고 강물을 동동 떠내려가는 튜빙을 했다. 튜브와 줄 하나에 의지해 동굴 속에 들어가는 동굴 탐험을 하고, 방비엥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열기구를 타는 등 다양한 레포츠를 즐겼다. 그러나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었다. 시간을 쪼개거나 나누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아니, 그래서 더 좋았다.
방비엥으로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스피커를 통해 아주 큰 소리의 음악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가보니 마을회관 같은 장소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겨울이라고는 해도 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검은색 가죽점퍼를 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행사 전문 MC 같았다. 대단한 아니 우쭐한 패션 감각을 가진 그 남자가 유일하게 영어를 조금 했다. 결혼식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남자는 사람들을 시켜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음식과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우린 졸지에 시골 마을 결혼식에 참여한 하객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쳐들어온 게스트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은 다소 어색해했다. 수줍고 쑥스러워하는 처녀 총각들의 어설픈 춤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도 인연인데 하며 축의금으로 10만 낍을 건네주었다. 깜짝 놀라며 손 사레를 치는 모습이 우리네 인정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떠남을 아쉬워하는듯한 표정과 고마움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연신 합장을 했다.
인도 식당 나짐에서 탄두리 치킨과 난, 카레 등으로 식사를 하고 라오스 전통 마사지를 받았다. 그녀들은 라오스 사람답지 않게 다들 훤칠하고 미인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걸걸한 게 뭔가 의심스러웠다. 혹시 트랜스젠더?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두컴컴한 방바닥에 깔린 허름하고 깨끗하지 않아 보이는 매트리스에 누워 약 한 시간쯤 마사지를 받았다. 프로다운 실력은 아닌 듯 꽤 시원하다거나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느낌이 없었다. 가격은 착했다. 팁을 포함해서 50,000낍(7,000원). 팬케이크를 사려고 어제저녁의 그 여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우수에 찬 표정의 그 젊은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공연히 궁금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과 동글동글 솟아있는 산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석양이다. 산과 강을 집어삼킬 듯 붉게 번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보트가 지나갔다. 강변 자갈길엔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들의 오토바이와 대바구니를 백 팩처럼 등에 진 여인들의 행복하고 조용한 발걸음이 보였다. 동그란 산봉우리 사이로 해가 지는 그 시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몸으로 느꼈다. 삶의 평온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잃은 대부분의 것들이 그 풍경 속에 있다는 것을…. 커튼을 여니 어느새 새벽이 벌써 저만큼이다. 방비엥의 두 밤이 모두 지나갔다.
다시 길을 나선다는 건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는 것, 그러나 방비엥을 떠나는 게 아쉬웠다. 언제나처럼 다시 오리라 위로의 다짐을 했다.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7시간여의 긴 행로는 울퉁불퉁 낭떠러지를 돌고 도는 산길이라 위험천만이라고 했다. 우기에 산사태가 나기라도 하면 언제 복구될지는 아무도 모를 정도로 험한 길이라고 했다. 촌스럽지만 멀미약을 챙겨 먹고 북부터미널로 향했다. 루앙프라방까지 타고 갈 차는 일명 VIP 버스, 그러나 내 좌석 의자는 등받이를 세워도 몸을 기대면 저절로 뒤로 젖혀지는 오토매틱이다. 게다가 출발 시각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떠날 기미가 없다. 알고 보니 여기저기 여행사에서 예약한 여행자들의 게스트 하우스들을 돌며 터미널까지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앗! 내가 타고 있는 버스에 쏘피와 이바가 타는 게 아닌가? 엊그제 그들 말로는 우리보다 방비엥에 하루 더 머물고 루앙프라방으로 간다고 했었다. 서로 반가워하며 물으니 일정을 바꿔 하루 일찍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길은 터널이 없다. 꼬불꼬불 산이 생긴 모양대로 길을 내고 길옆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아니라 산길 옆 오두막들이 이어졌다. 라오스엔 철로가 없다. 그러니 기차도 없다. 빨래하는 아줌마, 아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이를 잡는 엄마, 빈 깡통을 차고 노는 사내아이, 우두커니 길가 먼지를 맞으며 앉아 있는 노파 등, 보이는 대로라고 치면 그들의 삶의 무늬는 누추하고 빈한했다. 학교는 가는지? 버스는 타봤는지? 그 길을 연신 오가는 버스 속의 노랑머리 파란 눈의 여행자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마트도 슈퍼마켓도 없는데, 바다도 없는데, 냉장고도 없는데 저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먹고살까? 별 게 다 궁금하다. 이윽고 휴게실에 도착했는데 70년 대 쯤 볼 수 있던 작은 점방 스타일의 상점과 화장실이 전부다. 남자아이가 화장실 이용료로 2000낍(280원)을 받았다. 학교는 안 가나?
루앙프라방, 이 도시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읽은 최갑수 책 <목요일의 루앙프라방(산책과 낮잠과 위로에 대하여)> 때문이다. ‘루앙프라방’ 그 이름이 주는 독특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언젠가 루앙프라방에 꼭 가리라 생각했었다. 여장을 풀고 호텔의 미니버스를 타고 시가지로 나섰다. 포스트 오피스는 툭툭 이들과 여러 호텔의 차량들이 모여들어 사람들을 내려 주거나 태워가는 랜드 마크였다. 노점을 기웃거리며 군 바나나며 망고주스 등을 주전부리로 사 먹었다. 그렇게 해찰하며 놀다가 햇살이 설핏해질 무렵 100미터 남짓 된다는 푸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루앙프라방의 중심이다. 낮은 산이지만 328개의 계단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숨이 차고 또 찰 무렵 ‘신성한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루앙프라방 시내를 360도 돌아가며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잔잔히 흐르는 메콩 강으로 떨어지는 일몰은 시간의 두께 위로 찬란히 빛났다. 산이 작은 만큼 정상의 공간도 좁다. 그러나 루앙프라방의 석양을 보려고 몰려든 여행자들로 인산인해다. 무슨 콘테스트에 참여하는 양 저마다 지는 해를 향해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댔다. 여간 진지하지 않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한 법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에 속절없이 곁을 내주는 황금빛의 촘씨탑은 더욱 빛났다. 그렇게 도시는 다른 시계를 맞을 준비를 했다. 소박하고 천진한 루앙프라방에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어느새 차량 통행이 통제되고 500여 미터에 달하는 거리엔 몽족들의 봇짐들이 하나 둘 좌판에 풀어져 나이트 마켓으로 변해있다. 여행 중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가 시장 구경이다. 5시부터 10시까지 루앙프라방의 번화가 시사방봉 거리와 사카린 거리엔 야시장이 열린다. 그들은 한 달에 만 원도 채 안 되는 자릿세를 내고 매일매일 같은 자리에 정갈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그렇게 세상과 만난다. 나이트 마켓은 라오스 정부가 궁핍한 몽족을 위해 마련한 시장이다. 그러나 현재는 몽족과 루앙프라방 현지인들이 함께 어울려 장을 연다. 짐을 옮기는 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산을 내려와 강을 오가는 것도 번거로울 법한데 몽족들은 매일 루앙프라방으로 나와 몇 시간 동안 장사를 하고 돌아갈 뿐, 산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고 한다.
한 소녀가 형형색색의 손지갑들을 바둑판처럼 줄을 맞춰 정성스럽게 펼치기 시작했다. 베틀에 한 가닥 한 가닥 씨실과 날실이 든 북을 돌려가며 짠 색색의 스카프며, 동물 모양의 인형, 실을 꼬아 만든 팔찌, 수를 놓은 가방, 우산을 쓰고 가는 주황색의 승려나 독참파를 그린 그림, 거친 피륙을 끌어안고 몇 날 며칠 밤새워 만든 장신구 등을 펼쳐놓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그러나 호객행위는 없었다. 여기 좀 보라는 손짓도 없었다. 그저 봐주기를 기다리는 눈빛들이 고요하고 정직했다. 몽족의 전통 복장은 꽤 화려하다. 그래서인지 야시장에 나온 옷가지들도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물결이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백화점인 나이트 마켓의 상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곱게 앉아있는 몽족 여인의 주름진 얼굴에 띤 미소가 가슴 안쪽을 뻐근하게 했다. 밤은 그렇게 착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그곳이 루앙프라방이다.
루앙프라방에선 커피, 생과일 주스, 빵, 맥주, 프랑스식 음식, 이탈리아 음식, 타이 음식, 베트남 음식 수 십 가지의 종류를 한 레스토랑에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편리하다. 호텔이나 레스토랑엔 거의 가게마다 경쟁하듯 WIFI FREE를 써 붙이고 있다. 패스워드를 물으면 성냥개비처럼 작은 종이에 적힌 알파벳이나 숫자를 건네준다. 몇십 년의 시제가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루앙프라방 베이커리에서 저녁을 먹고 셔틀버스를 타러 우체국 앞으로 갔다.
호텔로 돌아오니 주변은 어둡고 조용했다. 2층으로 올라가려면 1층의 레스토랑을 거치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텅 빈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에 중년 남녀 한 쌍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하~~ 이’ 하며 인사를 거네니 ‘올라!’ 한다. 스페인 사람인가?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내가 ‘올라’ 하니 ‘위스키 샤워 (Whisky sour-cocktail) 마실래요?’ 하고 남자가 물었다. ‘사주겠다는 말인가? 무슨 소리지?’ 보아하니 서빙을 위해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라오 청년이 칵테일을 만들 수준으로 보이진 않았다. 내게 그는 거듭 물었다. ‘위스키 좋아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냉큼 남자의 옆에 앉았다. 그는 급히 작은 생수병에 위스키를 붓고 레몬 갈아놓은 걸 섞더니 그것을 마치 칵테일 쉐이커인 양, 두 손으로 마구 흔들었다. 그리곤 식당 진열장에서 와인글라스를 가져와 내게 따라주었다. 그는 칠레에서 온 페페라는 이름의 변호사였다. 자기가 위스키 샤워를 좋아하기 때문에 위스키와 레몬을 사서 직접 부카부카 갈아 갈아서 만들었노라고 마셔 보란다.
나는 칵테일보다 스트레이트를 즐기는 타입이지만 분위기 탓일까? 공짜라서? 입에 착 붙는 맛이 기막히게 근사했다. 소아과 의사인 마리는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면 코를 심하게 골아서 싫다고 했지만 꽤 정답고 유쾌해 보이는 부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클래식 음악 이야기가 나왔다. 페페와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칠레 사람이며, 첼리스트 요요마를 좋아한다고 했다. 또한 요즘은 소프라노 안나 넵트렙코를 즐겨 듣는다고 했다. 그녀의 미모 때문에 좋아하는 거라고 부인이 농담 어린 질투를 했다.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던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이 참 좋았다고 말했더니 페페가 대뜸 칵테일글라스를 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라 트라비아타의 대표곡인 <축배의 노래>였다. 나도 덩달아 잔을 들고 따라서 노래를 불렀다. 흡사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된 양 클라이맥스에선 잔을 부딪히기 까지 이르렀다. 구석에 앉아있는 라오 청년은 유일한 관중이었다. 우리의 모습이 유쾌해 보였는지 따라 웃을 뿐 박수를 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노래를 모르지 싶었다. 페페는 신나게 칵테일을 만들었고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맛있게 마셨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밤은 취해갔다. 함께 사진을 찍고 메일 주소를 주고받은 후 악수를 나누었다. 자정이 넘어 여행의 일정이 반으로 접히고 있었다.
새벽 5시. 루앙프라방은 채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점퍼를 꺼내 입었지만 새벽의 한기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짙게 파고들었다. 나이트 마켓이 열렸던 시사방봉 거리로 나갔다. 루앙프라방에서의 일정인 4박 중 첫 1박을 시내와 가까운 호텔로 잡은 이유가 탁발 참관 때문이었다.
매일 새벽, 그곳에선 비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채움과 나눔이 동시에 벌어진다. 해가 채 뜨기도 전 신도들은 길에서 무릎을 꿇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새벽 내음과 함께 다가오는 황갈색 장삼을 걸친 수도승들에게 미리 준비한 떡, 과일, 찰밥 등을 발우에 넣기 위함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그릇을 비우고 다른 이들을 채우는 것, 이것이 탁발이다. 라오스 인들에게 탁발은 매일 새벽 치르는 의식이자 생활이다. 수많은 사원에서 나온 승려들이 최고령 승려를 선두로 서열에 따라 한 줄로 걸어가며 공양을 받는다. 승려들에게는 그 날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는 시간이지만 여행자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나와 공양 준비를 마치고 맨발로 단정히 무릎을 꿇고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나 역시 얼떨결에 공양 음식을 샀다. 찰밥, 연잎에 싼 밥, 과자, 바나나 등이 담긴 바구니 두 개와 돗자리를 깔아주고 30,000낍(4,200원)을 받았다. 신발을 벗고 여인이 깔아준 자리에 어색하게 무릎을 꿇었다.
멀리 승려들이 어깨에 발우를 메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고요한 새벽 거리를 가르는 승려들 역시 맨발이었다. 찰밥을 손으로 떼어 발우에 넣었다. 손이 더러울 텐데, 세수도 안 했는데, 1회용 비닐장갑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빠르게 그리고 동시에 떠올랐다. 급히 나오느라, 아니 구경만 할 요량이었지 탁발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못한 터였다. 탁발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님들은 내 앞을 지나쳐갔다. 어떤 기대도 호기심도 없는 담담한 무욕의 얼굴을 하고 조용히 인간 세상과 조우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여행에서 무엇을 비우고, 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여행자의 눈에는 매우 진기한 풍경이지만 승려들과 현지인들에게는 일상생활이자 역사 깊은 종교의식이다. 행렬이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 셔터 소리만 들릴 뿐 주변은 조용했다. 주는 이가 받는 이가 되고, 받는 이가 주는 이가 된다. 받음이 추하지 않고, 베풂이 화려하지 않다. 가장 아름다운 손길, 가장 선한 눈길을 목도하는 새벽 탁발은 루앙프라방의 강렬한 메시지였다. 인구의 95%가 불교신자인 라오스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에선 아들이 출가를 한다. 우리나라의 병역 의무와 비슷한 것이다. 14세가 되면 사원으로 들어가 승려 수업을 받는데 짧게는 1~2년, 길게는 십 수년, 혹은 평생을 절에서 보낸다. 라오스인의 공양은 간절한 불자의 마음이요, 아들을 먹이려는 어미의 심정인 것이다. 승려 수업을 마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 과정에서 절에 남아 진짜 승려가 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탁발 공양에 나온 승려들도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쳤다. 그들이 거친 과정은 바로 견딤이다.
호텔의 여사장 아들 ‘퍼’는 그야말로 전공이 <명랑 쾌활 상냥과>였다. 라오스에 머무는 동안 만난 현지인 중 가장 잘 웃고 제일 친절한 총각이었다. 손님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엄마 몰래 특별히 업그레이드하여 큰 방을 주어 기분 좋게 하더니 우리가 옮겨갈 호텔에 연락하여 셔틀버스를 보내와 체크아웃과 동시에 그쪽으로 이동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루앙프라방에서의 마지막 사흘 밤을 묵을 곳은 시내와는 좀 떨어진 외곽의 올드 브리지 옆에 있는 리조트였다. 방갈로이니 당연히 1층이다. 발코니로 나가니 바로 앞에 바나나 나무며 망고나무 파파야 나무에 과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앞으로는 남칸 강이 흐르고 푸르게 가꾸어져 있는 잔디 위엔 하얀 베드 소파와 파라솔이 영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했다. 그러나 라오스는 모든 면에서 실망스럽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검색하고 부킹 한 호텔들이었지만 모두 만족스러웠다. 4일간 머물 방이니 대략 짐을 정리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세상에~~, 변기 안에 장미 꽃잎이 가득 뿌려져 있어 물이 보이지 않았다. 꽃 위에 일을 보라고? 행복한 게 아니라 대략 난감했다.
루앙프라방은 방콕의 여행자 거리 카오산 로드와 비슷한 시사방봉 로드가 걷기의 출발점이다. 제법 세련된 카페며 빵집들이 즐비하다. 루앙프라방 최고의 번화가지만 그리 번잡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조용하기까지 하다. 현지인보다 여행자가 많긴 하지만 그들은 귀뚜라미처럼 가만가만 얘기하는지 좀처럼 말소리가 잘 안 들린다. 루앙프라방을 걷는 일은 동양과 서양의 조화 속으로 걸어가는 일이었다. 라오스 최초의 통일 왕국 란쌍 왕조의 수도였기에 서른 개도 넘는 사원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프랑스식 건물들도 어긋나지 않는 얼굴로 살아있었다. 어느 레스토랑이든, 카페든 거의 모든 테이블엔 비어라오가 보인다. 하이네켄이나 밀러, 기네스 같은 수입 맥주가 있음에도 모든 여행자들은 라오스 맥주인 비어라오만을 마신다. 왜? 맛이 좋으니까. 사람들이 비어라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나는 날 알았다. 비엔티안 국제공항 내에 있는 딱 하나의 면세점에 포장된 비어라오 캔 박스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비어라오를 사가는 여행자들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의 공항 면세점에서 맥주를 박스로 포장해서 파는가? 라오스의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30도가 넘는 라오스의 강렬한 태양을 피하려면 선글라스는 필수. 그러나 라오 승려들은 선글라스 대신 주황색 승복과 대조되는 검은 우산을 쓰고 슬리퍼를 신는다. 자전거를 탄 여학생들의 손에도 우산이 들려있다. 회색 승복에 고무신을 신은 다소 엄격해 보이는 우리나라 스님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소년 또는 청년 스님들과 지나치게 되어 인사를 건네거나 사진을 찍으면 쑥스러워 간지러운 듯 말갛게 웃는 모습에 따라서 웃게 된다. 라오스의 집들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다. 문은 물론 창도 마찬가지다. 간판도 나무로 만들었다. 밥을 주문하면 대나무로 짠 나무 밥통에 담아 준다. 골목을 밝히는 조명등이나 울타리도 대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요구르트를 담은 글라스는 바나나 잎으로 고깔을 만들어 덮어둔다. 찰밥은 연잎에 싸거나 대나무 통에 넣어 찐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른바 친환경이라고 한다. 오가닉이라는 이름을 붙여 비싼 값을 매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게 자연친화적이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으니 경제적이기도 하고 편리하기도 하니 그 일석이조인 셈이다.
꽝시 폭포로 가는 길은 오전임에도 태양이 너무 뜨거웠다. 조그만 가판에서 아이들이 장사를 하고 있어 구경도 할 겸 잠시 쉬었다. 그런데 저쪽 원두막 지붕 같은 곳에 뭔가 조그만 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쥐들이 거꾸로 매달린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들쥐는 그들의 영양식이란다. 구워 먹으면 맛도 좋단다.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와는 대조적인 간식이다.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 아이들이 손으로 만든 지갑이며 머리띠들을 팔고 있었다. 컬러가 화려하고 질이 떨어지는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작은 지갑을 하나 샀다. 꼽짜이를 연발한다. 그 모습이 어여뻤다.
쾅시 폭포는 코발트빛 담수를 층층이 선사하는 곳이었다. 갈수기지만 옥류가 계단 모양으로 층층이 흘러내렸다. 숲 속으로 한 겹 더 걸어 올라가니 푸른 보석을 쏟아 놓은 듯한 큰 폭포가 비단결처럼 곱게 떨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순간에 머무르기 위하여 현재를 떠난다. 그리고 떠나간 곳에서조차 다시 찰나를 아쉬워한다. 그러나 루앙프라방에서만큼은 아쉬워하지 않게 된다. 어디를 가든 조금 전에 느낀 그 희열을 다시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앙프라방에서는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그곳에서 여행자들은 진정한 치유를 받는다. 켜켜이 겹쳐진 산과 그 속을 흐르는 물줄기 속으로 들어가니 물소리는 어느덧 위로의 말처럼,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흘렀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채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정오가 되자 병아리들이 잘게 천둥 치듯 노랑노랑 한다. 뱃살을 길게 늘어뜨리고 누운 햇빛 한 토막을 베어 조각하고 싶다. 천장에 매달려 느리게 돌아가고 있는 팬의 날개를 바라보다 까무룩 잠에 들어갔다 나오니 사위가 어둑어둑하다. 새벽인가? 문을 여니 강가엔 흰 구름이 와 있었다. 별처럼 박혀 영영 빠져나올 것 같지 않던 귀여운 햇빛들은 밀물 같은 저녁이 오자 투명인간처럼 자취를 감추고 있다. 거기 어제가 있었나? 지금은 어제의 내일이 된 것인가? 산의 테두리와 강의 가장자리, 그곳엔 아직 저녁의 멜로디가 남아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아직 오늘이군요.’ 여행지에서의 낮잠이라니, 아직 오늘이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부스스한 채 모자만 눌러쓰고 슬리퍼를 신은 채 고요 속으로 느리게 걸어 나갔다. 싸바이디~. 조용한 눈매로 누군가 내게 인사를 건넨다. 여기가 어딘가? 화요일의 루앙프라방이구나. 조르지오 모란디의 정물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그렇게라도 따뜻함을 열고 들어가 잠을 청할 수 있다면 샴페인처럼 웃을 텐데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난 이미 그 정물화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림 속이 아닌 살아있는 정물 속의 소재로 숨 쉬고 있었다.
슬로 보트를 타고 왕복 3시간이 걸린다는 빡우 동굴엔 크고 작은 불상들 4,000여 개가 있다고 한다. 배를 타는 것도 무섭고 동굴도 내키지 않았다. 메콩 강변을 걷는 쪽을 택했다. 올드 브릿지를 건너 시사방봉까지 대략 3-4km쯤 될까? 모양이 아름다운 지붕과 오래된 나무 창틀과 파스텔컬러인 강변 호텔들을 구경하며 꽃 걸음처럼 시속 1킬로미터로 걸었다.
선선한 바람과 구름이 가려 준 태양 덕에 스카프를 목에 둘러야 했다. 강변으론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길 건너편엔 게스트 하우스와 호텔들이 이어졌다. 걷고 또 걸어도 지겹지 않았다. 새하얀 벽에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 창이 아름다운 호텔 앞에서 발을 멈췄다. ‘커피를 마실까?’ 연 베이지 파라솔이 펼쳐 있는 카페 의자에 앉았다. 강물 위로 슬로 보트들이 느릿느릿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풍경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외국인들이 혼자 또는 둘이 앉아있었다. 전 날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조마 베이커리에서 산 초코 칩 쿠키를 곁들여 카푸치노를 마셨다. 살아오면서 행복함을 느꼈던 시간은 많았으리라. 그러나 그 시간 나는 더 없는 안도와 여유와 기쁨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충만했다. 뇌의 심오한 회로들이 사드락 사드락 몽롱해지는 듯했다.
배낭 속에서 이병률의 <끌림>을 꺼냈다. 여러 번 읽었지만 여전히 갖고 다니는 책이다. 그러니,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다. 마치 루앙프라방의 여행을 닮은 그런 책이었다. 강물 한 번 쳐다보고, 차 한 모금 마시고, 몇 줄 읽고, 쿠키 먹고, 하늘 한 번, 나무 한 번 바라보고 그랬다. 그냥 그랬다. 그게 너무 좋았다.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카페였기에 화장실은 로비로 들어가야 했다. 세면대 옆엔 초록색 수건 열댓 개가 동그랗게 말린 모양으로 바구니에 놓여있다. 손을 닦은 후 바구니에 던져 넣으면 되는 것이다. 유럽풍이다. 서구 문명이 순수하고 수줍은 그곳 사람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변할 것이다. 호객을 하고 바가지를 씌우고 당연한 듯 팁을 받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혼자 보낸 여섯 시간이 기분 좋은 꿈처럼 휘리릭 순간처럼 지나갔다. 일행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루앙프라방 베이커리로 갔다. 그곳엔 오전에 카페에서 보았던 흰 셔츠를 입은 스페인 부인이 앉아있었다. 그렇다. 여행자들은 각각에게 전혀 다른 시간이 고여 있다. 루앙프라방이라는 한 우물에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비는 더욱 특별하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비, 수요일의 루앙프라방은 잠깐의 비를 선사하였다. 이슬 같은 빗방울들이 길쭉한 돛단배 같은 바나나 잎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렸다. 현악기처럼 가늘고 까칠하게 떠는 소리들을 바위의 안쪽처럼 어둡게 되받고 있었다. 비는 그늘 밑을 통과하고, 나는 남은 안주처럼 쓸쓸히 늘러 붙어 문과 나무 사이를 오가곤 했다. 지나간 달력엔 밤과 낮이 동시에 있다. 그러나 남은 여행의 내일엔 밤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끝남에 대한 일종의 초조함이다. 긴 터널에 들어간 듯, 여기와 거기에 있던 시간이 쉼표와 쉼표처럼 느린듯했으나 빠르게 지나갔다. 달이 빚은 술, 햇빛이 담근 차, 구름이 품은 비, 그렇게 루앙프라방은 내게 음악이며 사랑이고 행복이었다. 막차처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지막 밤은, 구름의 운전을 보고 해처럼 지는 달을 사선으로 그으며 결코 닿지 않은 계절에게 가듯 그렇게 가고 있었다.
메콩 강과 칸 강을 양 팔처럼 늘인 키다리 아저씨처럼 누워 있는 루앙프라방.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독참파, 올망졸망 잇닿은 골목들, 자잘한 아이들의 황토 빛 웃음까지 욕심 없는 풍경으로 그득했다. 거리에는 툭툭이들이 털털대며 달리고 있고 번쩍거리는 요란함은 한 움큼도 주울 수가 없었다. 시속 1km의 느림이 넘실대는 그곳의 미학은 빛바랜 간판을 내건 카페, 갤러리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느린 시곗바늘로 마음을 스케치하는 시간이요,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 평화로운 여백이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다닌 흔적도, 별다른 에피소드도 없다. 그저 느리게 산책하고 머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여행은 일상에서 영원히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새로워진 나를 만나는 통로이다. 넓어진 시야와 마인드, 그리고 충전된 에너지를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탁발 나온 스님들이 맨발로 걷는 소리, 국숫집 할머니가 냄비 뚜껑 여닫는 소리, 툭툭 출발하는 소리, 저녁 무렵 스님들 책 읽는 소리, 향기 그윽한 독참파 떨어지는 소리, 비 내리기 직전 풍경 소리, 양철 지붕 위로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 모두 모두 하나하나 소중한 그리움이다. 바다가 없는 나라, 기차가 없고 터널이 없는 나라, 교회가 없는 나라,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은 고요한 나라, 그곳은 무엇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 무엇을 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반드시 봐야만 하는 유적지가 있는 곳이 아니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다. 그래서 마음이 느긋해지는 곳이다. 흙먼지 폴폴 날리는 황톳길을 달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메콩강변을 걷는데 그냥 실실 웃음이 나왔다. 늘 바삐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던 여행에서 벗어나 달콤한 낮잠을 자기도 했다. 발코니에 놓여 있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행복했다. 자연의 시계에 맞춰 깨어나고 잠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 단아한 여인의 손 자수 같기도 하고 점잖은 선비의 붓글씨 같기도 한 루앙프라방에서 내 마음이 단정해졌음을 느꼈다. 본다고 다 느낄 수는 없다. 눈꺼풀을 깜박이는 순간 카메라 셔터처럼 이미지를 머리에 순간 저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가슴은 그렇지 않다. 본 것과 생각을 느리게 반죽하고 찬찬히 숙성시켜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여행은 속도와 반비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느림의 흐름이었던 이번 여행으로 인해, 너무 흔해서 그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던 단어와 사물과 마음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루앙프라방은 느림으로 화음을 연주하는 곳이었다. 어느 날, 루앙프라방 메콩 강변 노천카페에 고요히 앉아있을 나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