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기억의 온도 1 (베네치아)
기억의 온도가 한 옥타브의 음계로 치자면 ‘라’ 정도? 간혹 ‘시’의 소리를 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 아니, ‘레’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습관처럼 기억이 퇴장하고 있음이다. 삭제라는 날개에 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진 찍듯, 그림 그리듯, 소리를 저장하듯, 기억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여행의 무늬를 쓰는 것은 떨어진 단풍잎을 책갈피에 끼워 넣는 일처럼 지나간 시간을 날아가지 않게 붙들어 매는 의미에 있다. 그러나 뭔가를 쓴다는 일은 다분히 매혹적이기도 하다.
“우리 이탈리아로 여행 갈까?”
“좋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게 내 남편이다. 나의 여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재밌게 잘 갔다 와’, 또는 ‘기회가 좋네! 갔다 와’ 하면 그뿐이다. 여행 시점 6개월 전, 루프트한자에서 일주일간 프로모션으로 실시하는 <크레이지 얼리 버드>라는 이름의 반값 항공권을 잡았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과감하고 거침없는 내 성정과 까다롭지 않은 남자의 유함이 더해지니 그냥 떠나면 될 일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친절한 책과 착한 지도, 굳은 의지와 튼튼한 두 다리를 믿을 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제대로 된 영어 회화 실력도, 전문 가이드도 없이 오롯 둘이서 이태리의 도시들을 둘러보겠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물론 자유여행의 경험은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훌륭한 파트너들이 내 오목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말하고 듣고 찾아가고 티켓 사고 음식 주문하고 계산하고 사진 찍고 가방 챙기고 그 모든 것을 모두 나 혼자 해야 한다. 이자도 붙지 않는 시간은 차곡차곡 잘도 지나갔다. 어느 도시들을 가는지, 호텔은 예약했는지, 날씨는 어떤지 도무지 궁금한 게 없는 사람이 출발 1주일 전 넌지시 물었다.
“밥은 굶지 않고 다닐 수 있겠지?”
그제서 나는 17일 동안 이어질 여행에 필요한 바우처, 그러니까 항공 E 티켓, 5개 도시의 호텔 예약서, 오페라 예약 티켓, 도시 간 이동 기차 패스, 바티칸 1일 투어 신청서들이 빼곡하게 끼워진 파일 한 권을 내밀었다.
“수고했네 허허허…”
그건 믿음이다. 무겁기로 치자면 한없는 그 무관심한 믿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그저 신이 났다. 여행은 그저 하얀 캔버스 같은 마음 한 장이면 족하다. 준비가 많을수록 설렘은 물론이요, 느낌과 감흥은 반으로 접히기 때문이다. 여행은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살아보지 못한 다른 세계에서의 시간은 새로운 의미가 된다. 여행은 리허설이 없다. 연습도 없다. 오직 겁 없고, 배짱 좋고, 체력 좋고, 추진력과 결단력이 빠른 자신을 믿을 뿐이다.
북쪽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내려가자 라는 생각에 베니스 인, 로마 아웃의 항공 스케줄을 잡았다. 단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승하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을 것을 고려했다. 성질 급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펑크가 나기 마련이다. 결재를 하고 E-티켓을 출력해서 뿌듯하게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베니스의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하는 시각이 밤 11시 25분. 물론 도착 시각이 늦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예약한 호텔이 베니스 본 섬 안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밤에 본 섬 까지 무슨 수로 들어가지?’
갑자기 있지도 않은 딸을 잃어버린 듯 캄캄했다. 그렇다. 베니스는 수상도시다. 자정에 본 섬까지 들어갈 일이 막막했다. 이탈리아에 발을 내딛는 첫날부터 노숙자 신세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예약한 호텔로 급히 문의 메일을 보냈다. 영작이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틀렸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내겐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친절한 답변이 바로 날아왔다.
『공항에서 본 섬까지 운항하는 마지막 <알리라구나> 수상버스가 12시 20분에 있어요. 그걸 타고 ‘산 자카리아’에서 하선하면 바로 앞이 호텔입니다. 리셉션에는 24시간 사람이 있으니 늦더라도 염려 마세요. 그럼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이렇게 깔끔할 수가 있나? 할렐루야! 복 받을 지어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나는 동안거에 든 수행자처럼 최면을 건다. 안전벨트를 한 채 규칙적으로 빼곡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상자에 든 과자 같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베니스는 바다에 별을 심어 놓은 듯 아름다웠다. 촘촘한 불빛으로 물길이 가늠되었다. 짐을 찾고 공항 밖으로 황급히 나와 <알리라구나> 라는 표지판을 찾았으나 승선장도 매표소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외국인이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모를 땐 묻는 게 최고다.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매표소는 공항 내에 있었다. 티켓을 사고 인적 드문 공항을 빠져나왔다. 너무 어두운 탓에 어느 쪽이 바다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인적도 드물다. 어찌어찌 승선장을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다. 아드리아 해에 떠 있는 갈매기들과 우리 둘뿐이다. <알리라구나 블루 라인> 선착장과 내부에 부착된 노선도에서 ‘산 자카리아’라는 글씨를 확인했다. 그러나 배를 타고자 하는 사람도, 배를 운항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살짝 불안한 감이 드는 순간 한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머리엔 무스를 발랐는지 번들번들, 낡은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은 모습이 현지인인 듯싶었다. 낯선 곳에선 사람이 무섭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법이다. 그가 나타나니 아무도 없었을 때보다 더 무섭다. 배가 출항할 시각이 가까워지자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옌 일곱 명 모여들었다. 이윽고 항해사와 조수가 나타났다. 영화 <투어리스트>에서 앤젤리나 졸리가 타고 나왔던 그런 배였다.
동력을 이용하고 있지만 속도는 느렸다. 섬의 얼굴을 숨기고 있는 밤바다를 달리는 마음이 휑휑했다. 지루하리라 생각했던 뱃길은 물살에 차곡차곡 떠밀려가고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산 자카리아 페르마타에 도착했다.
‘페르마타?’
페르마타는 음표나 쉼표 위에 표시되어 있는 기호로 2-3배 길게 연주하거나 2-3배 길게 쉬라는 뜻의 음악 용어이다.
‘아~ 페르마타가 정류장이라는 뜻이구나, 그럴듯한데! 호텔이 바로 앞이라고 했으니 이 근처 어디일 텐데…’ 하며 고개를 약 38도쯤 회전하는 순간 <호텔 파가 넬리>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 순간 모든 걱정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잘 생긴 호텔 매니저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마담 킴?’ 하며 달콤 쌉쌀한 초콜릿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졸지에 도라지 위스키 팔러 파가넬리 다방에 스카우트돼서 부임하는 마담 같은 달근한 미소로
“맞아, 내가 김 마담 이야.”
빠르고 강한 이탈리아 억양의 영어가 깊은 골짜기를 넘나들 듯 쏟아져 나왔다. 조식 시간이며 바포레토(수상버스) 노선, 그리고 지도에 호텔의 위치와 중요 관광지까지 표시해 준 다음 방으로 안내했다. 석호(라군 :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 방향으로 예약된 방은 상상보다 훨씬 훌륭했다. 일단 높다란 천장이 맘에 들었다. 긴 통나무가 방을 세로로 가로질러 받치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기와집 서까래 같았다. 커튼을 걷고 창을 열었다. 그믐달이 뜬 하늘과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청동 기마상이 서있는 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 좋은 방>이라는 이탈리아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가끔 내가 내게 고마울 때가 있다. 그때 내 맘이 그랬다. 내가 내게 한 없이 고마웠다.
유럽을 여행할 때 호텔을 고르는 기준은 첫 번째는 위치이다. 되도록 현대식 빌딩은 배제시킨다. 낡고 오래되었으며 작아야 좋다. 그 도시에 걸맞는 유서 깊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일수록 더욱 좋다. 호텔 <파가넬리>는 베니스에 딱 어울리는 멋진 곳이었다. 그 푸른 밤바다가 보여줄 아침은 어떤 것일지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짐을 대략 풀고 씻고 나니 새벽 3시, 오랜 비행에 지칠 만도 한데 잠이 들까 싶었다.
한 두 시간 잤을까? 뭔가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 가볍지 않았다. 두께감이 느껴지는 둔탁한 울림이다. 불규칙하지만 나름의 운율과 정돈 감이 느껴졌다. 떡메를 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북소리 같기도 했다. 그 불투명한 소리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창문을 열었다. 아직 검푸른 바다와 잉크처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매어 있는 검은색 곤돌라들이 바닷물에 부딪치며 짓는 소리였다. 태어나서 많은 소리들을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찰진 자연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즉흥곡보다 믿음이 가는 음악이었다.
호텔은 3층 건물로 스무 개쯤의 객실을 갖고 있다. 호텔 밖으로 나가 10m쯤 걸어가면 별채의 레스토랑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중년 여인이 기호처럼 무뚝뚝하게 ‘본 조르노’ 하곤 룸 넘버를 묻는다. 도무지 웃을 줄 모르는 듯한 인상이다.
“저 아줌마 얼굴이 생강 잘라놓은 것 같네, 많이 먹으면 한 대 얻어맞겠어”
그럴 때 외국인이어서 좋은 점은 우리말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거다. 거꾸로 그들이 내 흉을 봐도 물론 나는 알지 못하니 기분 나쁠 리 없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말이다. 여타 호텔들처럼 조식은 비슷했다. 뚱뚱한 초승달 모양의 고소한 크루아상과 커피, 오렌지주스, 에멘탈 치즈와 살라미 햄 한 장, 요구르트와 파란 사과 한 개를 든든하게 먹었다.
호텔은 좋은 전망 말고도 지리적 위치까지 탁월했다. 산마르코 광장과 산마르코 성당, 대 종루, 코렐 박물관, 두칼레 궁전, 탄식의 다리들이 5분 거리에 포진해있다. 사진이나 TV 프로그램에서 익히 보아왔던 산마르코 광장은 이미 와본 듯 눈에 익숙했다. 아쉽게 성당의 전면 일부가 보수 중이다. 깁스하듯 철제 봉을 세워놓고 포장을 쳐 논 것이 꼭 반창고 붙여 놓은 것 같아 마뜩지 않았다. 광장엔 일명 닭둘기로 불리는 뚱뚱한 비둘기들이 뒤뚱거리며 여행자 사이를 걸어 다녔다. 1720년 문을 연 이래 지속되는 카페 플로리안과 광장의 여타 카페들의 노랗고 빨간 의자들이 카드 섹션 하듯 늘어서 있다. 카페 플로리안은 괴테, 바이런, 바그너, 니체, 나폴레옹 등이 사랑한 카페로 유명하다. 카사노바가 선수 기질을 유감없이 벌이며 작업한 곳이다. 멧 데이먼과 주 드로가 열연한 영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태양은 가득히’를 리메이크 한 영화)를 촬영한 카페이기도 하다. 아름다울 터였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자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상상의 아름다움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다시 베니스를 찾아 올 날을 기대하는 마음이었을 거다.
베니스의 중심부에 자리한 산마르코 성당은 9세기에 두 명의 상인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성 마르코의 유골을 모시면서 세워진 납골당에서 비롯했다. 그 후 성 마르코는 베니스의 수호자가 되었다. 11세기에 산마르코 성당이 재건되면서부터 동방을 침략할 때 가져온 그리스 시대의 조각 등 여러 장식품들이 성당에 가득하다. 그러니 성당의 나이는 1,000살이 넘을 터였다. 산마르코 성당의 장식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정면에 있는 날개 달린 황금사자 상일 것이다. 배우 강수연과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로 기억되는 베니스 영화제의 최고상이 황금사자상이다.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가장 큰 상도 황금사자상이다. 그렇듯 산마르코 성당은 성당 외관에 붙어있는 모자이크 화도 황금빛이다. 이미 예고했듯 성당 안쪽에도 금의 기운이 가득하다. 온통 금칠이니 공기에서 금 맛이 느껴질 정도이다.
산마르코 성당에선 비발디의 아버지와 비발디가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를 했다. 지금도 가끔 음악회가 있다는데 아쉽게도 접할 수 없었다. 1678년, 베니스의 밝은 빛을 받고 태어난 비발디는 25세 때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그는 <피에타 여자 양육원>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불륜 관계로 태어난 아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버린 소녀들을 양육하던 고아원이 <피에타 여자 양육원>이다. 거기서 비발디는 어린 고아 소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오케스트라의 명성이 전 유럽에 퍼질 정도로 유명했다.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던 두칼레 궁전. 흰색과 분홍빛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건물의 회랑은 수 십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9번, 10번째 기둥엔 아직도 핏빛이 남아있다. 그곳에서 교수형이 치러진 이유다. 두칼레 궁전의 재판소에서 소 운하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건너면 교도소이다. 그 교도소에서 탈출한 유일한 사람이 있다. 여러 여인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유영하던 카사노바는 탈출하여 카페 플로리안에서 유유자적 커피를 마시곤 사라졌다는 후문이다. 재판을 받은 죄수들이 교도소로 옮겨가는 중 다리에 서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기 때문에 ‘탄식의 다리’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자연의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돌로 만들어진 한 평 남짓한 좁은 골방들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미로 같은 길을 계속 따라 들어갔다. 어딘가 출구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르락내리락 좁은 통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다 보니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따로 출구가 없다. 몇몇 외국인들도 우리처럼 헤매는 듯 보였다. 출구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그렇다며 우리는 함께 씁쓸하게 웃었다.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들었다. 탄식의 다리에 다다르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마터면 영영 그 다리를 다시 건너오지 못할 뻔했다.
베니스는 골목이 거미줄처럼 이어지기 때문에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미 작정하고 나선 터였다. 길을 잃을수록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길을 잃어도 아름다운 골목과 다리가 무시로 나타날 테고 즐거움은 이어지려니 했다. 그러나 건물 벽 곳곳에는 명소를 알리는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올레길이나 순례자의 길처럼 규칙적이지는 않아도 나름 도움이 된다. 리알토 다리, 산 로코 스칼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박물관을 지나 로마 광장과 산타 루치아 역에 이르기까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번도 똑같지 않은 풍경을 선사하는 다리들을 건너고 좁은 골목을 따라갔다. 쇼 윈도에 진열된 명품들은 세련되고 기품이 있었다. 그러나 가격표를 보면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여서 혀를 내밀곤 했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거리 악사들의 비발디 연주를 들으며 보헤미안처럼 걷는 일이 명품 백을 갖는 것보다 즐거웠다.
운하가 멋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양장본 연감 같다면 베니스는 싸구려 노트에 연필로 그린 그림일기 같다. 표정을 알 수 없는 화려한 가면들 천지다. 베니스는 얼굴을 감춘 도시다. 섬 구석구석의 화려한 얼굴에 취한다. 사람들을 취하게 하는 데 여념이 없는 ‘베니스의 상인’들은 더 화려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 유혹하고 또 유혹했을 것이다.
지금은 베니스에 약 400여 개의 다리가 있지만 예전엔 리알토 다리가 유일했다. 16세기가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다리 없이 나무다리를 임시로 사용하다가 돌로 된 최초의 다리를 만들었는데 바로 리알토 다리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1854년 아카데미아 다리가 지어지기 전까지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사람들이 제법 많다.
로마광장에 도착하니 버스며 택시들이 보였다. 배가 아닌 탈 것을 보니 갑자기 신기하다. 광장에 앉아 잠시 쉬며 콜라를 마셨다. 다리가 아팠다. 아름다움에 취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꽤 먼 거리를 온 것이다. 다른 골목을 통해서 호텔까지 걸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근처에서 바포레토(수상버스)를 타고 부라노 섬에 가기로 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베니스 기차역인 산타루치아 프레시아(역)로 들어갔다. 1유로 동전을 집어넣으면 문이 열린다. 그러나 2유로 동전밖에 없었다. 단순히 생각했다.
‘커피 자판기처럼 거스름돈이 나오겠지 뭐’
2유로를 넣었다. 땡그랑! 그런데 거스름돈은커녕 문도 열리지 않았다. 일종의 로마법이다. 주변엔 동전을 교환해 주는 기계도 없다. 근처 매점으로 가 동전을 바꿔줄 수 있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방법을 바꿔야 한다. 감자 칩 한 봉지를 집어 들고 아까와 같은 10유로 지폐를 내밀었다. 없다던 1유로짜리 동전이 마술처럼 내 손에 쥐어졌다. 그리하여 화장실 가는데 강도처럼 삼켜버린 2유로, 감자 칩 2유로, 진짜 화장실 사용하는데 2 사람 2유로, 합이 무려 6유로(9,000원)가 들었다. 기가 막히고 약이 올랐다. 하기야 베니스엔 화장실을 맘껏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 전용 패스까지 판매하지 않는가? 비싼 돈 주고 화장실 체험하고 나니 시원하긴 커녕 배가 더 아팠다.
바포레토 24시간 이용권은 1인당 20유로(약 30,000씩 2인 60,000원)이다. 비싸다. 그러니 곤돌라는 물론이요, 수상택시는 탈 엄두도 못 낸다. 산타루치아 역에서 바포레토를 타고 누오베 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바포레토를 갈아타야 부라노에 갈 수 있다. 배에서 내린 김에 점심을 먹고 갈 요량으로 근처 음식점에 들어갔다. 여행책자나 블로거들이 추천하는 맛 집을 찾아다닐 여유도 없거니와 로컬 주민들이 일반적으로 드나드는 동네 식당에 가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했다. 뒷집 사는 순돌이네, 건너 마을 박씨 아저씨 등등, 동네 사람들이 오다가다 들르는 작은 식당이 좋을 듯싶었다. 피자와 파스타를 경험할 시점이다. 우린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는 청춘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음식으로 정체불명의 맛에서 헤매지 말자는 의미로 이미 검증된 마르게리타 피자와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주문했다. 계모임이라고 있는지 연세 지극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득했다. 명소와는 떨어진 곳이라 여행자는 우리 밖에 없었다. 동양인이 낯선지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목소리 크고 시끄러운 나라는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은 아마도 이태리가 아닐까 싶다. 목소리가 큰 건지, 언어가 주는 느낌이 빠르고 굴곡이 커서인지 모르나 정말 시끄럽다. 유럽의 음식은 대체로 많이 짜다. 그래서 식당에 가면 항상 짜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는다. 못 알아들으면 테이블 위에 있는 소금 통을 들고 바디 랭귀지로 하면 통한다. 비교적 저렴한 값, 고소한 식전 빵, 친절한 아가씨 덕에 점심을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베니스 주변에는 매년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 유리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 그리고 레이스와 건물들의 컬러가 아름다운 부라노 섬이 있다. 원래는 리도 섬에 갈 생각이었다. 여행지인 베니스에서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의 매력에 빠져 열정의 포로가 되어버린 한 중년 남자의 죽음이 남아있는 곳,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병에 걸려 쇠약해진 작곡가 구스타프 아센바흐가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만났던 리도 섬의 호텔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지만 그 해변의 슬픔을 느끼고 싶었다. 아름다운 소년에게 두 눈이 멀어버린 중년 남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을 동경하며 오래전 그가 보았을 아름다움을 쫓고 싶었다. 그러나 베니스에서의 3박 일정으로 리도 섬까지 가기엔 너무 짧았다. 대신 택한 부라노 섬은 본 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부라노로 향하는데 어디서 요란한 경적이 삐요 삐요 하며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앰뷸런스, 즉 병원선이다. 신기했다. 순간 베니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 묘지를 만들까? 정화조와 하수 처리는? 하는 궁금증들이 생겼다. 배가 지나는 근처에 꽤 커 보이는 섬이 보였다. 섬의 테두리엔 붉은 벽돌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안쪽엔 나무들이 보인다. 어떤 섬일까 궁금했다. 나중에 호텔로 돌아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산 미켈레 섬’ 전체가 묘지라고 한다. 죽은 자들의 섬이 따로 있다니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관광책자에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럴 수가!’ 묘지 섬인 ‘산 미켈레 섬’은 부라노 섬으로 가다가 보았던 바로 그 섬이었다.
부라노 섬의 집들은 컬러가 알록달록 상큼하고 고소하고 달콤하며 시원하다. 보라색 집도 있다. 색을 그렇게 각각 다르고 선명하게 칠하는 이유가 있다. 안개가 수시로 끼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귀가하는 남자들을 돕고자 연유한 것이란다. 색을 다시 칠 하려면 그 집이 속한 부지에 허락된 몇 가지 색 중에 골라 칠한다고 한다. 레이스가 유명하다고 하여 기대를 했지만 생각만큼 레이스 가게가 많지 않았고 맘에 들 정도의 상품이 없다. 그곳의 특징상 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다. 그러니 집집마다 창밖에 줄을 매고 빨래를 넌다. 너울너울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 모습이 지저분하다거나 처량해 보이지 않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작은 운하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고 즐겁다.
칠이 벗겨지거나 빛바랜 벽을 보면 따뜻한 정감이 인다. 자연스러운 세월의 굴곡이 아름답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곳의 사진을 찍는 내가 이상한 모양이다.
“폐가 같은 집이 왜 그렇게 좋아? 이상한 취향이야” 한다.
나의 사진을 찍어줄라치면 남편은 무슨 뮤직 비디오 찍으러 온 피디 마냥 진지하다.
“부라노의 여인, 여기 보세용!”
콧소리를 내며 피사체인 나보다 더 갖은 폼을 잡는다. 그는 세심한 사람이다. 아니 그건 생활기록부 기록용 표현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나치게 느긋하여 답답하다. 셔터 한 번 누르려면 하나 둘셋을 세고도 약 10초는 더 기다리며 나름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 맘과 달리 모델인 나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웃고 있는 내 입은 이미 경련이 나고도 남음이다. 찌그러진 양재기 꼴이 될 찰나, 비로소 힘겹게 ‘피식~’ 하는 할아버지 방귀처럼 어렵게 셔터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렇게 공 들여 찍은 사진이라는 것이 매번 모델인 주체, 즉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 그 대목이 중요하다.
본인 사진을 찍을라치면 그 절차와 시간은 더 복잡해진다. 일단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를 걷어낸다. 2차, 두리번거리며 놓아둘 곳을 물색하고 얌전히 내려놓는다. 그다음엔 크로스백을 벗어놓는다. 거기서 끝나면 말 다한 거다. 그게 다가 아니다. 통통하고 하얀 두 손의 손가락을 펴서 좌우 머리에 얹어 너덧 번 매만진 후 옷매무새도 반듯하게 다듬는다. 어떨 때는 겉옷을 벗기도 한다. 이쯤 되면 여행자의 인증 숏, 한 컷이 아니다. 대선 출마 프로필 사진 찍는 품새요, 맘먹고 사진관 찾아가 영정 사진 찍는 격이다. 성미 급한 나는 혈압이 열 번도 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러나 참는다. 그러고 나서 좋은 구도로 사진을 찍어주면 분명히 멋지게, 근사하게 잘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감고 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한 상 부러지게 잘 차려놓고 제를 올릴 때의 주인공인 돼지가 목이 잘릴 때 간지러워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는 것처럼 그의 눈은 감겨 있다. 그게 절반도 넘는다. 이탈리아에서의 사진 찍기 놀이는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매 번 별 다른 변화 없이 쭉 계속되었다. 혈압 터질 뻔했다.
호텔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광장엔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팔짱을 끼고 느리게 걷는 노년의 부부, 알록달록한 샤 스커트와 기괴한 모자를 쓴 일본의 젊은이, 족히 십 년 동안은 자르지도, 감지도 않았을 법한 지푸라기 같은 레게머리의 보헤미안, 인형처럼 예쁜 아기의 무등을 태운 아빠,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그러나 그 틈새엔 도무지 팔릴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조악한 물건을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점상들이 있다. 흑인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는 나라의 대통령이 흑인이다. 그러나 많은 흑인들의 삶은 아직도 세상 어디서나 힘겹고 초라하다. 마음이 아프다. 베니스를 상징하는 멋진 청동 나트륨 등에 붉은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때로 모자라고 아쉬운 것이 외려 따스한 여백이 되는 때가 있다. 까닭 없이 차가운 밤바람 속으로 발을 내밀어 체위를 바꾸는 달을 보는 일이 그랬다. 음악같이 떠도는 사람들의 물결을 한동안 바라보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즐거움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려한 것 중 한 가지가 남편의 먹거리이다. 평소 중식은 기름기가 많아서, 양식은 느끼하다는 이유로 거의 먹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반찬 투정을 하거나 입이 짧은 건 아니다. 즉석 밥, 컵라면, 고추장, 김, 단무지, 그 외 캔에 들어있는 멸치볶음, 우엉조림, 레토르트 육개장 등 거의 가방 하나는 먹거리로 가득했다. 챙기고 옮기고 하는 일은 거북했지만 먹는 시간은 행복했다. 그러니 된 거다.
400여 개의 다리로 이어진 물의 도시, 가다가 길을 잃고 주저앉을 때쯤 비로소 나타나는 길, 탁한 물속에 박혀 있는 떡갈나무 말뚝들, 밝은 만큼 어둡고 음침한 건물 내부가 산 자와 죽은 자의 그림자가 뒤섞이는 연옥 같은 곳 베니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성당 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아름다웠다. 마음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듯 착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했다.
‘저 종소리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변해도 성당의 종소리는 수 백 년 동안 시간이 길을 잃어버린 듯 변함없이 섬의 곳곳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베니스의 새벽은 이상하리만큼 푸르다. 하늘과 바다와 푸르스름한 공기 속에 검은 곤돌라가 빚어내는 분위기는 가히 환상적이다. 게다가 새벽 어느 언저리에 살짝 비를 뿌렸는지 돌길이 촉촉하며 공기가 맑다. 콧구멍이 시원하다. 숨 쉬는 게 좋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 했다. 그날은 바포레토를 타야 갈 수 있는 곳부터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베니스에 창궐했던 흑사병이 사라진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세워진 살루테 성당에 먼저 들렸다. 내가 식당에서 재채기를 하자 옆에 앉은 사람이 나를 보며 ‘살루테’ 했었다. 살루테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건강이라고 말해주었다. 흑사병이 사라지고 건축된 성당의 이름이, ‘살루테’ 이 아니 멋진가?
페기 구겐 하임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자로 명성을 떨치며 20세기 미술계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중 하나인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은 베니스에서 살다 죽었다. 유럽과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베니스에 정착한 지 30여 년 만이었다.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은 현대미술의 주요 작품을 아우르는 대단한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유복한 유대인 집안 출신인 페기는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죽은 벤자민 구겐하임의 딸이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자의 조카다. 그녀는 복잡한 집안 내력과 유산으로 물려받은 부를 지니고 23살에 파리로 가서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현대미술에 눈을 떴다. 그는 한때 사무엘 베케트와도 사랑을 나눴으며, 에른스트의 아내였고, 또 다른 예술가들의 연인이자 후원자였다. 돈 많은 사람이라고 다 그런 사랑을 할 수는 없으리라. 페기의 갤러리에서는 달리, 막스 에른스트, 자코메티, 칸딘스키, 미로, 피카소, 탕기 등 유럽의 전위적 작가들이 전시를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렉산더 칼더,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등도 페기 구겐하임의 지원을 통해 세상에 등장했다. 그녀의 탁월한 안목이 증명되는 대목이다. 1947년 에른스트와 이혼한 후 뉴욕을 떠나 베니스로 간 페기는 자신의 컬렉션으로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회를 열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화려한 남성편력만큼이나 많은 그러니까 하루에 한 점 수집하는 걸 목표로 삼을 정도로 열심히 수집한 수많은 미술작품들을 자녀들에게 한 점도 물려주지 않았다. 그 모든 작품을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베니스의 상인’에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채무자에게 1파운드의 살을 요구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도 유대인이다.
인적 드문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리를 건너 몇 번을 물어물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미술관이라기보다 여느 평범한 가정집 같다. 문 위에 써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이라는 표식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지나칠 정도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오픈 시간이 11시, 한 시간이나 남았다. 마땅한 구경거리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의 한 시간은 무의미했다. 그러나 샤갈과 르네 마그리트, 잭슨 폴락 등의 그림이 있는 그곳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위치 탐색을 하니 가까운 곳에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있다. 그곳 먼저 다녀올 요량으로 발을 돌렸다. 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 극장들은 거의 내 이름은 아무개요 하는 이름표가 커다랗게 붙어있지 않다. 아카데미아 역시 외관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은 어마어마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 파올로 베로네세, 조르지오네 등의 베네치아파의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유명한 작품들이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어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대부분 성화인지라 내용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완벽한 그림에 무임승차하려고 드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더구나 근대 회화에 길들여진 내게 별 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다.
호텔 방의 창을 통해 정면에 빤히 보이는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은 마치 물에 떠 있는 연꽃처럼 아름답다. 그곳에 가려면 페기 구겐하임을 미련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다. 전 날 개시한 24시간짜리 바포레토의 승선권 이용 시간이 거의 다 돼가는 것이다. 바포레토를 탈 때마다 카드 리더기에 스스로 체크를 한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검표원에게 발각되면 어마어마한 페널티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바포레토 페르마타는 거의 중요한 성당 앞에 위치한다. 살루테 페르마타에서 내리면 그곳에 살루테 성당이 있고, 산 조르지오 마조레 페르마타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이 있다. 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안 되니 포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벌써 배에서 폴짝 내린 게 아닌가? ‘에구 그럴 때는 빠르네, 군대 갔다 온 거 맞군’ 어쩔 수 없이 따라 내린 나는 다음 배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10분 후에 배가 있다. 그걸 타면 24시간 내 들어갈 수 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단 숨에 뛰어 올라갔다. 성당이라기보다 작은 미술관처럼 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틴토레토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찾았다. 그림은 충격적이었다. 대각선 구도로 어둠 속에 빛과 함께 하는 천사들과 예수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면서 사실적이었다. 많은 화가들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지만 가장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과는 달랐다. 여유를 갖고 꼼꼼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림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그만 가요” 하니
“동전 있으면 좀 줘” 한다.
급해 죽겠지만 두 말 않고 꺼내 주었다.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유럽은 발에 채는 게 성당이고 미술관이다. 이게 그거 같고 그게 저거 같다. 이제 질리니 그만 보자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었다. 백화점에서 보내는 한 시간 정도의 시간에도 멀미를 하는 게 보통의 남자다. 그러나 기우였다. 그는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많은 걸 궁금해했고 세밀하게 감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꼭 적으나마 헌금을 하고 가늘고 긴 초에 불을 밝히며 두 손을 모으곤 했다. 무엇을 기도하고 소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가 보았다. 동전을 넣고 초에 불을 붙였다. 늦거나 말거나 그게 뭐 대수인가 생각하니 맘
이 차분해졌다. 다행히 성당을 빠져나오자마자 배를 탈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알뜰하게도 타고 다녔다. 산마르코 광장의 야경을 보러 나갔다. 오늘의 메뉴로 추천하는 오징어 먹물 파스타로 식사를 하고 젤라토를 먹었다. 카페 플로리안 뒤쪽의 석호에서 손님들을 기다리는 곤돌리에들과 여행자들을 바라보며 베니스의 마지막 밤을 여유 있게 유영했다.
누군가는 베니스에 오면서 아쿠아 알타 (이탈리아어로 높은 물을 뜻함. 즉 물이 높게 올라와 베네치아 도시가 물에 잠기는 현상)를 만나길 기대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쿠아 알타를 겪게 될까 염려했다. 광장과 골목, 호텔 로비까지 물에 잠겨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겪기 싫었기 때문이다. 우려와는 달리 날씨는 화창했고 새벽달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내고 베니스를 떠나는 날 아침, 온통 안개로 뒤덮인 석호를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 사흘이 꿈처럼 느껴졌다.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촘촘하게 붙어 있는 작은 섬들을 수 백 개의 다리로 연결한 것이, 작은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아름다운 조각 이불 같다. 베니스(Venice)는 영어식 발음이고 본래의 이탈리아 이름은 베네치아(Venecia)지만 나는 ‘베니스’가 더 입에 붙는다. 작가 토마스 만은 아양을 떠는 수상쩍은 미녀 같은 이 도시는 어떻게 보면 동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나그네를 옭아매는 덫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썩기 쉬운 공기를 맡으며 향락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번성했고, 어르듯 감미롭게 잠재우는 음을 음악가에게 제공해 주었다. 신분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쓴 귀족들이 ‘흔들리다’라는 뜻의 곤돌라처럼 사랑에 흔들렸다. 사생아들이 마치 갯벌의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처럼 부유하며 살아갔다. 베니스는 지금 저마다의 자기 나라 문자로 된 이탈리아 책을 들고 다니는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베니스의 아름다움은 아직 지치지 않았다. 곤돌라는 여전히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찰진 소리로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다.
밀라노로 가기 위해 바포레토를 타고 산타루치아 역으로 갔다. 산타루치아는 나폴리의 항구 이름이다. 그게 왜 베니스의 기차역 이름에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이탈리아 여행은 기차가 빠르고 편하다. 베니스-밀라노 구간은 시속 200km로 운행하는 프렌치아 비앙카(하얀 화살)이다. 비행기보다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 넓고 쾌적하다. 전기 콘센트 및 정보 디스플레이 시설도 있다. 와이파이도 가능하다. 기차표를 예매하려면 트랜 이탈리아를 통해야 한다. 그러나 로그인이나 접속하기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기차를 타게 될 날짜의 4개월 전에 티켓을 오픈한다. 물론 여행하면서 그날그날 역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발 빠르게 일찍 예약한다면 기본요금보다 60~70% 싼 가격의 슈퍼 이코노미 요금으로 살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나 또한 수없이 많은 오류에 부딪혔다. 하지만 지난 한 인내심으로 도전한 결과 모든 도시 간 이동할 기차를 슈퍼 이코노미 가격으로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약 200유로(30만 원)쯤 절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역에서 발권하는 티켓은 기차에 타기 전에 각인해야 한다. 티켓이 있어도 각인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게 된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예매한 후 출력한 E-티켓은 좌석에서 검표원에게 보이기만 하면 끝이다. 쾌적하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널찍한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던졌다. 기차가 물 위의 도시를 서서히 빠져나갔다. 언젠가 이 도시의 덫에 다시금 빠질 것 같단 생각이 밀려왔다.